출판사서평
조선사대부들의목숨을건소송,산송!
성리학적이념과효의식을지키기위한소송이온나라를뒤흔들다
2010년,파평윤씨와청송심씨간에250년이나끌어온소송이드디어마침표를찍었다.명망있는두가문이서로한치의양보도없이대립하며조정을어지럽히자영조는이들을직접심문해형장을치고귀양까지보냈다.그러나두집안은죽음을직면한상황에서도서로의뜻을굽히지않고길고긴다툼을이어갔다.대체이들은무엇때문에왕의진노까지사면서250년동안싸움을계속한것일까?
파평윤씨...
조선사대부들의목숨을건소송,산송!
성리학적이념과효의식을지키기위한소송이온나라를뒤흔들다
2010년,파평윤씨와청송심씨간에250년이나끌어온소송이드디어마침표를찍었다.명망있는두가문이서로한치의양보도없이대립하며조정을어지럽히자영조는이들을직접심문해형장을치고귀양까지보냈다.그러나두집안은죽음을직면한상황에서도서로의뜻을굽히지않고길고긴다툼을이어갔다.대체이들은무엇때문에왕의진노까지사면서250년동안싸움을계속한것일까?
파평윤씨와청송심씨간의소송의원인은묏자리였다.파평윤씨집안에서는먼조상인고려재상윤관의묘위치를잃어버려옛기록을토대로그의묘를찾아다녔다.그러던중,윤씨가에서경기도파주에서묘갈(墓碣,무덤앞에세우는둥그스름한작은비석)두어쪽을발견해윤관의묘지위치를재확인한다.하지만공교롭게도바로위쪽에청송심씨심지원의묘가위치했다.윤씨가에서는심씨가에심지원묘의이장을요구했고,이에심씨가에서는백여년동안아무문제없이수호해왔으니이장할수없다고맞선다.서로한치의양보도없이맞선윤씨가와심씨가.이들의분쟁을중재하고자임금까지나서지만,단순히묏자리선점문제가아니라조상묘를수호하고자하는위선의식(爲先意識)과가문의사회적위상그리고명예가걸린문제였기에집안의모든구성원이필사적으로저항하고,소송은대를이어계속된다.이처럼분묘및분묘주변의산지를놓고일어난소송을산송(山訟)이라한다.
그동안고문서를통해조선후기사회문제및민인(民人)의소통시스템을지속적으로연구해온조선대학교사학과김경숙교수는『조선의묘지소송』에서‘산송’을통해조선후기사람들이왜그렇게치열하게산송에임했는지를좇고,이를통해친족질서의변동,사회경제적변동,신분질서의동요,향촌사회구조의변화등조선후기사회상을종합적으로읽어나간다.
조선은유교이념이지배하는사회로서양반사대부가드러내놓고경제활동을하거나소송에적극적으로나서는것을기꺼워하지않았다.때문에토지나노비를매매할때도노비를대리인으로내세웠으며,청원서나소장도노비이름으로제출하는경우가많았다.하지만산송은달랐다.갓쓰고도포입은양반사대부가패싸움까지벌이면서목숨을걸고필사적으로매달렸다.명분과체모를중시하는양반사대부의이미지와는거리가멀다.뿐만아니라상중에는진행하던소송도모두중지해야하는데,상중에도유일하게허용된소송이바로산송이다.오히려분묘를조성하는과정,즉상중에산송이발생하기마련이었다.때문에산송에휘말린양반사대부는상복을입고송정(訟廷,소송이진행되는장소,곧오늘날의법정)에드나들었다._머리말에서(7쪽)
조선시대의대표소송,산송
여느소송과달리산송은삼국시대및고려시대에도찾아볼수없고,이웃하는중국,일본에도없는조선후기사회만의특징적인역사현상이었다.노비소송(奴婢訟),전답소송(田畓訟)과함께조선시대3대사송(詞訟)중하나인산송은16세기후반을전후로등장해18·19세기에이르면양반사대부가라면이를겪지않는집안이없을정도로광범위하게발생한다.게다가보통토지나노비매매시에노비를대리인으로내세웠던양반사대부가산송만큼은직접나설정도로적극적인양상이었다.왜이렇게양반사대부들은산송을중요하게생각한것일까?왜조선시대에산송은성행한것일까?
그해답은유교이념에있다.유교를건국이념으로삼은조선사회에서,16세기이래성리학에근거한종법질서가확립되며부계의식이강화되었고유교식상장례가확산되어갔다.이에따라사람들은조상의분묘를단장하고묘역을조성하는일에관심을쏟게된다.하지만두집안의분산(墳山,묘를쓴산)이인접한다해도각자정해진구역을수호하면그만일텐데왜다툰것일까?이는분묘의규모규정때문이었다.조선시대전반을아우른법전인『경국대전』에서관직의고하에따라분묘범위를차등한규정과『주자가례』의본격적인보급과‘좌청룡우백호’즉용호수호규정의인정으로각각의규정이충돌하면서다툼이원만히해결되지못한경우소송으로이어졌다.특히조선후기에는풍수사상이유행하면서좋은묘터를찾아나섰고,장례를마친뒤에도불길하다는말을듣거나일이뜻대로풀리지않으면빈번히이장했다.기껏찾은길지가다른사람의분산을침해하거나주인있는산이거나,국가의금산일때등사유가있을때는다른자리를찾아야했지만,밤에몰래묻거나봉분없이평평하게만드는등의불법적인투장도감행했다.방법이야어떻든일단투장에성공하면묘를다시파내기가힘들었기때문에족계를결성하거나촌락공동체와협력체제를구축해불법적인투장을원천적으로봉쇄하고자하는움직임이일어나기도했다.
산송은16,17세기유교적상장례가보급되고종족질서가형성되는과정에서등장하기시작했고,18,19세기위선의식과가문의식이심화됨에따라격화되는양상을보인다.이와동시에18세기후반이후신분질서가동요하는사회분위기속에서하층민에게까지산송이확산되었고,산림이용문제도산송에반영된다.이런상황속에서사족층은분산수호를위해친족단위의자체적인결속을강화하고조직활성화를통해족적연대를강화하며향촌공동체와협력함으로써분산수호를실현하고나아가향촌사회에서의위상과영향력을유지하기위한자구책을모색하였다.결국산송은조선후기사회의특징적인역사현상으로서,조선후기사회의관념과가치관의흐름,친족질서의변동,사회경제적변동,신분질서의동요,향촌사회구조의변화등조선후기사회상을종합적으로함축하고있다.산송의전개과정에서나타나는대립과갈등은역동적인사회변동의한반영이라할수있다._본문에서(153쪽)
묘를묻으려는자,묘를지키려는자
무덤을둘러싼싸움은계속된다
여느소송과달리산송은,두분묘의위치와선후관계등을따져서묘를파낼지그냥둘지만결정하면될정도로소송의이유가명백했다.하지만판결이내려진뒤갈등은오히려심해졌다.유교사회에서분묘는살아있는사람처럼취급해서타인의분묘를파내거나훼손하면살인죄를적용해엄중히처벌하였기때문이다.그렇기에승소했다해도직접상대방의묘를파낼수없었고,이런상황을잘아는투장자는미적거리며굴거기한을넘기거나,동절기,39부동총(풍수상3월과9월에는분묘를움직이지않음),농번기등의핑계를대며어떻게든묘를파내지않고버텼다.이런투장자의핑계를관에서도허용했기때문에실제로투장총을파낼수있는기간은2월,10월,11월등3,4개월남짓이었다.투장자는이처럼이런저런핑계를대기도하였고,묘를파내는척하면서속임수를쓰는경우도있었다.하지만이렇게온갖꼼수로버티는투장자앞에서금장자는별도리없이부지하세월할수밖에없었다.특별한경우에는관에서직접무덤을파기도했으나거의인정되지않았기때문에속타는금장자는그저끊임없이관에투장총을파내줄것을요청하고,상언과격쟁등으로국왕에게자신의억울함을호소할수밖에없었다.
이렇게나라와국왕에게자신의억울함을호소하는과정에서남은다량의산송관련고문서가그당시의상황을오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