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김충규 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김충규 시집)

$12.00
Description
김충규 시인의 마지막 기척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문학동네시인선」 제37권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낙타’ 등 5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제1회 미네르바작품상과 제1회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2012년 3월 18일 새벽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저자의 유고 시집이다. 사물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와 고통의 미학을 치열하게 그려온 저자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난 지금 저자가 남긴 마지막 시들을 모아 펴낸 이번 시집에서 우리는 그가 곳곳에 남긴 죽음과 그 이후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맨홀이란 제목’,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말할 수 없이 지겨우니까요’, ‘죽은 조상을 등에 업은 사내’,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는 밤이다’ 등 사막에서 일구어낸 뜨거운 통증과도 같았던 저자가 남긴 마지막 시들을 오롯이 담았다.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불행

썩은 냄새 풍기는 사과를 버리고
쭈글쭈글한 할미를 버리고
술이나 마시는 오후입니다
자학한 만큼 구름이 부풀고
울음을 내놓은 만큼 홀쭉해진
새가 허공에서 문득 비행을 멎습니다
추락은 광기입니다
무엇을 광고하려고 새가 추락하는 건 아닐 텐데요
최후는 찰나이고 고요합니다
너무 고요해서 쭈글쭈글한
할미가 탱글탱글한 처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해도 무심히 쳐다볼 것 같은 오후입니다
죄(罪)를 키워서
내 몸은 참호가 된 지 오래입니다
내 몸이 옥(獄)이고 내 생활이 유배입니다
날개를 갖기 못한 것이 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날개를 가졌다면 허공에서 나는
참혹한 광경을 광고했을지도 모릅니다
날개가 없음을 불행이라 여기진 않지만
술을 마셨는데도 전혀 취하지 않는 이 오후를
벌레처럼 짓이기고 싶습니다
이런 내가 징그럽습니다
저자

김충규

저자김충규는1965년경남진주에서태어나서울예술대학교문예창작과를졸업했다.1998년문학동네신인상에「낙타」등5편의시가당선되어등단했다.시집으로『낙타는발자국을남기지않는다』『그녀가내멍을핥을때』『물위에찍힌발자국』『아무망설임없이』가있다.제1회미네르바작품상과제1회김춘수시문학상을수상했다.2012년3월18일새벽,길지않은생을마감했다.

목차

목차
시인의말을대신하며
라일락과고래와내사람
맨홀이란제목
잠이참많은당신이지
허공의만찬
말할수없이지겨우니까요
수렁
검은눈물을흘리는물새
불행
유리창과바람과사람
저녁?에서아침사이에
(까마귀우는환청이들렸는데)
밀림
안개,풍성한여인
우리는누구인가요?
하필물새여서
오늘은휴일
허공의미궁
지평선에이르기도전에
들불
나비와고양이는서로만나지못했다
그렇지만고래는울지않았다고한다
뼛속에서울렁울렁
가는것이다
어느해변에가야
허공의범람
웃는새
죽은조상을등에업은사내
밤이되면
저물무렵의중얼거림
당신,참이상한사람
오늘저녁메뉴
내일이오지말기를,중얼거리는밤이다
먹구름을위한
뭐였나,서로에게우리는
뱀과의입맞춤
얼른가자숲으로……
물결의고통
당신의귀울림과고래의관계
음악은흐릅니다
언제부터였는지기억나지않는군요
안개속의장례
꽃의웃음에대한비밀
나비요리
산그림자
밀교(密敎)
페루청년의구지가(龜旨歌)
모래냄새를맡는밤
벼랑의일각수
기억의퇴적층
기러기는아프리카쪽으로
지금보스턴에도보슬비가올까
참으로오랫동안
허공을향해중얼중얼
앓는눈동자를꾹누르면
낙타의뼈
구름의감정
미풍,또한다저물고
악몽
포로수용소
추모발문
이병률ㆍ이승희ㆍ이재훈ㆍ조동범

출판사 서평

출판사서평
“더깊은잠을자도돼요당신”
낙타처럼묵묵히시의길을걸어간김충규,
그가지상에남긴마지막기척
-김충규유고시집『라일락과고래와내사람』
1.
「낙타」등5편의시로1998년문학동네신인상을받으며등단한김충규시인.사물이풍기는죽음의냄새와고통의미학을치열하게그려온그가2012년3월18일,심장마비로세상을떠났다.아직갈길이멀었던그의나이마흔일곱이었다.출판사‘문학의전당’대표를역임했고,계간『시인시각』발행인으로바쁜삶을살면서시쓰기도게을리...
“더깊은잠을자도돼요당신”
낙타처럼묵묵히시의길을걸어간김충규,
그가지상에남긴마지막기척
-김충규유고시집『라일락과고래와내사람』
1.
「낙타」등5편의시로1998년문학동네신인상을받으며등단한김충규시인.사물이풍기는죽음의냄새와고통의미학을치열하게그려온그가2012년3월18일,심장마비로세상을떠났다.아직갈길이멀었던그의나이마흔일곱이었다.출판사‘문학의전당’대표를역임했고,계간『시인시각』발행인으로바쁜삶을살면서시쓰기도게을리하지않았던시인김충규.그가세상을떠난지일년후,그가남긴마지막시들을모아유고시집을내놓는다.그가이제세상에없다는사실때문일까.시곳곳에서발견되는죽음과,그이후에관한이야기가유독마음을건드린다.
저렇게살다죽더라도바람이묘비명을남길일은없듯
내가련한영혼과육체가분리되는순간이오더라도
나는묘비명을남기지않을것이다
그저세상이라는유리벽에반복적으로미끄러지다
일생을훌쩍허비한것에불과할테지만
앞을가로막은유리창을원망할필요는없는것
바람은바람없는영원의숙박을
사람은사람없는영원의숙박을
그나나나사후(死後)는그리고요하면아주그만
-「유리창과바람과사람」부분
“나는묘비명을남기지않을것이다”라고했던시인.“죽음이란게어쩌면그사람의일생에서가장화려한꽃이아닐까/그꽃을피우기위하여일생동안피의거름을생산한게아닐까”(「안개속의장례」)하고물었던김충규시인.평소몸이약했던그의시에서고통과죽음은늘유효한질문이었다.그래서일까.그는죽음을오히려“당신의죽음을축하합니다.”노래를불러주고싶은의식으로여긴다.지금여기야말로“산자들이유령처럼보이”고짙은안개가깔린“질식해버릴것같”은죽음과다를것없는삶이기때문이다.그에게삶과죽음은등가이다.그는사물이되어버린시체를바라보며쓸쓸함을느낀다.그것은“시신처럼아무생각이없”는우리를향한다른시선일것이다.그렇다면“푸줏간의갈고리에걸린돼지사체같”(「미풍,또한다저물고」)이느껴지는이세상을그는어떻게견디며살아갈까?그는자신의시적자아를드러낼상징적동물로낙타를선택한다.
2.
그는‘낙타시인’이라불릴만큼낙타의이미지를시에자주활용했다.낙타는물한모금마시지않고두주일을견디며,쉬지않고삼백킬로미터가넘는길을걸어갈수있다.젖과고기,털까지알뜰하게쓰이는낙타는사막에서없어서는안될동물이다.낙타의실용성은살아가기위해노동하며밑바닥까지소모되어야하는인간에대한서글픈통찰과닿아있다.김충규시인에게낙타는조금더특별하다.그에게낙타는“결코벗어날수없”(「낙타의뼈」)고“지름길이없는사막”을묵묵히걸어가는생활인의상징이며“공중의화원에서수확한빛”(「잠이참많은당신이지」)처럼가볍고맑은“발자국들을모아책으로편집”하는시인의또다른자아이기도하다.김충규의시에서낙타는,“아무기적이일어나지않”고“피와고름으로지은밥”을먹어야하는고통스러운삶의조건에적응하고만동물로그치는것이아니다.그에게낙타는삶의부조리를기꺼이수락하는시시포스적상징물이자“거부할수없는문장이”흩날리는사막의주인,즉“고통이우리의밥이었던”(「말할수없이지겨우니까요」)시인의세계를특유의인내력으로감당하는아틀라스인것이다.
제발자국들을모아책으로편집한낙타가
나무에기대어있다서역을건너온지친표정으로……
싣고온검은피륙들을사방에펼쳐놓은채……
등에올라타고서역으로가자청하면
혀를내빼고허물어질것같은눈빛으로……
그런낙타에게서역의사막은어김없는밀교가아니었을지
흩날리는모래들은거부할수없는문장이아니었을지
-「밀교(密敎)」부분
3.
그의시에서또하나부각되는이미지는,해안가에밀려와신음하며죽어가는고래다.수중생활을하는고래가왜해안가로올라와죽어가는지이유는밝혀지지않았다.시인은말한다.먼조상의부름탓일거라고.고래의먼조상은개나고양이처럼작은네발짐승이었다고진화론에선이야기한다.뭍에서나고물로갔으나다시뭍의기억으로돌아오는삶.이것은우리존재가현생,지금이삶에서끝나는것이아니라미처모르는아득한시간대를다른존재와공유하며순환한다는우주적인상상력을보여준다.“나는숨이찬사람입니다.내가태어난곳은바다가분명합니다”(「어느해변에가야」)라고말하는시인.그는자신이고래였던시절,그리고고래일시절을기억하고있는것이다.그고래는죽어가지만누구도훼손할수없는거대한순수성으로표현된다.불볕이내리쬐는사막은밤이되면바다로변하고시인의몽상속에서고래는거대한몸을뒤척인다.
그렇지만고래는울지않았다고한다
뭍에올라온고래의울음소리를듣기위하여우르르미친자들이구름같이해변에몰렸다고한다
그렇지만고래는클,클,숨소리도거칠게내지않았다고한다아주조용했다고한다
고래의이마에작살이꽂혔던자국이있다고누가말했으나고래는긍정도부정도하지않는눈빛으로
사람들을제눈망울에천천히다담았다고한다
걱정마,내가일어나면당신들다내배속에품어멀고
아득한해저로데리고갈게하는듯이……
-「그렇지만고래는울지않았다고한다」부분
울지마곧밤이와밤이오면지금까지와는전혀다른모습으로변하여
저허공에성곽을지으러올라가야지허공만이유일한안식처
둥둥허공으로떠오르는영혼들을봐지상에서고단했던영혼일수록더가볍게둥둥
(……)
만약에허공이없었다면어찌이생을견뎌낼수있었을까
아,허공이없다는상상만해도질식해버릴것같아
-「허공의만찬」부분
내심장을꺼내먹이면
고래가숨을얻어허공을헤엄쳐오를까
그러면나타날거니?내사람
-「라일락과고래와내사람」부분
우리는“이미발목을다”쳤고“세상의어떤숲으로도날아들지못”(「가는것이다」)한다.고래의이마엔작살이꽂혔고,미친자들의구경거리가되어죽어가지만,“우리에겐그들을구해줄힘이없다”(「들불」).고단한영혼이둥둥떠오를저허공은바로“내심장을꺼내먹”인“고래가숨을얻어(……)헤엄쳐오”르는곳이다.고통속에서죽어가는고래는아무도탓하지않는다.오히려모두를품어“아득한해저로데리고가”려한다.그래서일까.그는“당신도나도불행하다고말”하지않는다.나는그저“언제든/주저앉을수있는사람”일뿐이다.그렇게“당신은당신의나는나의/내일을그려”본다.“우리의피는아직/어둡지않기때문이다.”이러한시인의목소리가유독아프게다가오는이유는,이것이유고시집이기때문만은아닐것이다.그의음성을다시들을수없고그의온기를느낄수없기때문만도아닐것이다.시인이시를통해도달하려했던존재의멀고도그리운근원,그따뜻함과아프도록분리되어있는우리자신을,그리고고통을주는세계를껴안는방식을슬며시돌아보게하기때문일것이다.
4.
이병률ㆍ이승희ㆍ이재훈ㆍ조동범.이들은김충규시인의유고시집과함께기억의결을더듬어시인을호명한다.이들의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