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책소개
“가만히눈을감기만해도기도하는것이다.”
―기도하듯주문외듯신탁을전하듯씌어진잠언지향의시편들
진실에진실을계속더해나가면이는제로가되고만다.
가벼워지기만할뿐번안과요약이불가능해진다.그의시가그렇다.
남의일을자신의일로기억하는사람이시인이라면이문재시인은‘타고난’시인이라고문학평론가김종철은얘기한바있다.부단한자기집중을통해자기를비우고,비워진마음으로사물과세계를바라보기때문에이문재시인에게는‘모든것은연결되어있다’는평범한진리가한층선명하게드러나기때문이다.한편자연의모든존재방식으로부터한시도눈을뗄수없는사람이시인이라고,그래서시인에게는사실‘생태계의시’라는것이따로있지않다는게문학평론가도정일의시인론이다.“자연의신음소리,세상가장낮은곳에있는것들의아픈신음이시인들의귀를밤낮으로쟁쟁울리기때문에”(<시인은숲으로가지못한다>)시인은시인일수있는것이다.두원로평론가의이같은시인론은비록근자의것은아니지만,이문재시인의시세계를이해하는데여전히유용한단초를제공한다.“진정한시인이모두심오한생태학자인것처럼,진정한시인은모두미래를근심하는존재”(<마음의오지>)라는시인의선언도같은맥락에위치해있다.
<제국호텔>이후10년만에내놓는이문재시인의다섯번째시집<지금여기가맨앞>이문학동네에서출간되었다.‘지금여기’라는화두는시인의시를읽어온독자들에게그리낯선주제가아니다.시인은1982년<시운동>4집에시를발표한이래,어쩌면그보다도일찍부터,지금여기라는화두를노상품고다녔을지도모른다.그리고그것은동시에‘미래를근심하는’마음이었을것이다.시인은그간적도에서눈썰매타기(“자메이카봅슬레이”),유전자속그리움의정보,“무위로서의글쓰기”“은유로서의농업”“인간중심주의”“세기말”“언제나접속되어있는e-인간들”등을지금여기에서발견하거나발명해왔다.10년전시인에게지금여기가디스토피아또는멋진신세계였다면그래서시인이언플러그드,전원(電源)으로부터절연을이야기했다면,이제그는“지금여기내가맨앞이었다”는새로운인식에도달한듯하다.
천지간모두가저마다맨앞이었다.맨앞이란자각은지식이나이론이아니고감성에서우러나왔을것이다.존경하는친구가말했듯이지금우리에게필요한것은세계관(世界觀)이아니고세계감(世界感)이다.세계와나를온전하게느끼는감성의회복이긴급한과제다.
―'시인의말'부분
모두85편의시가실린<지금여기가맨앞>은4부로나뉘어있다.시집의해설을쓴문학평론가신형철은각부의키워드를‘봄’‘중년성’‘사랑/죽음’그리고‘시공간의사회학’으로포착해<지금여기가맨앞>을읽는다.그리고그는이시집옆에90여년전씌어진T.S.엘리엇의시'황무지'를불러내나란히놓는다.
'황무지'가그러하듯이이시집도봄날의풍경들과함께시작되었는데(1부),이시집의‘나’는'황무지'의5절(‘천둥이들려준말’)에서도울렸던그천둥소리를듣고서자신의사람을돌아보기시작했고('천둥'),그래서그는런던의음산한운하에서낚시를하던'황무지'의어부왕처럼일단제자신의재생을도모하기위해자작령꼭대기에오르고나서는(2부),역시나'황무지'의뭇주인공들처럼우리시대의사랑과죽음에대해성철하다가(3부),더구체적인생활세계로하강하여이와같이대안적상상력을찾고있는것이지않은가(4부).그렇다면이시집이,사막에비가내리며끝이나는'황무지'처럼,사막이초원으로바뀐저기적의순간에끝이난대도좋지않을까.
―해설'지금여기가맨앞인이유'에서
한세기전의시인엘리엇에게지금여기는1차대전이후의유럽사회였다.신형철은그래서'황무지'의시인이‘지금여기가맨끝’이라는생각에더잠겨있었을거라고,그러나현재의시인이문재는“가장간절한간절함으로”“지금여기가맨앞이다”라는인식에도달했을거라며두텍스트의간극까지함께읽어낸다.
다른한편이간극은이문재시인이지난10년을통과하며겪은마음의이력,모종의깨달음이기도할것이다.“네번째시집이후생각이조금씩바뀌어왔다”('시인의말')는시인의고백처럼말이다.
나무는끝이시작이다.
언제나끝에서시작한다.
실뿌리에서잔가지우듬지
새순에서꽃열매에이르기까지
나무는전부끝이시작이다.
지금여기가맨끝이다.
나무땅물바람햇빛도
저마다모두맨끝이어서맨앞이다.
기억그리움고독절망눈물분노도
꿈희망공감연민연대도사랑도
역사시대문명진화지구우주도
지금여기가맨앞이다.
지금여기내가정면이다.
―'지금여기가맨앞'전문
“지금여기가맨끝”이라는구절에서“지금”은시간적으로종말을,“여기”는공간적으로벼랑을뜻한다.그렇다면시인은우리더러지금벼랑끝에서있다고종말이임박했다고말하려는걸까.“네번째시집이후생각이조금씩바뀌어왔다”는고백이앞서나왔던것은벼랑일지모를종말일지모를“맨끝”을“맨앞”으로그러니까이를변증법적으로또전위적으로읽게되었다는이야기를하기위함일것이다.“땅끝”이“바다의끝”“물끝”“땅의맨처음”“땅의시작”이라는각성도그래서함께가능하지않았을까.
10년전시인의벗고종석은<제국호텔>발문에서“걸음은이문재삶의거름이다”라고얘기한적있는데,시인은그간10년을줄곧“홀로,두발로,꾹꾹지문찍듯이걸어”땅의끝까지간것일까.그리고땅끝에서한참바다를마주한끝에왈칵눈물쏟고온몸이환해진다음“이윽고땅의끝에서돌아”서서는“땅의맨처음”을새삼인식한것아닐까.('땅끝이땅의시작이다')“땅바닥”이사실은“하늘의바닥”,“언제나/꼿꼿이서있는”“땅의머리”“땅의정수리”아니겠느냐는깨달음도그렇게함께오지않았을까.('바닥')
“가만이눈을감기만해도/기도하는것이다”라는구절을읽는순간우리머릿속이잠시멍해졌다가이내곧환해지는경험을하게되는건그간시인의산책이,그의마음의이력이읽는이에게고스란히전해지기때문일것이다.“왼손으로오른손을감싸기만해도”“노을이질때걸음을멈추기만해도”“섬과섬사이를두눈으로이어주기만해도/그믐달의어두운부분을바라보기만해도/우리는기도하는것이다”라는시인의아름답고도자상하고도경건한안내앞에서우리는그간익숙했던무언가를조금은낯설게마주하게된다.해설자의앞선경험그대로우리는시인의시를읽고서그간몰랐던것을알게되었다고무릎을치기보다,알았던것을이젠잘모르게되었다고조금은겸손해질지도모를일이다.
“지금여기내가맨앞”이라는자각은“지식이나이론이아니고감성에서우러나왔을것이다.”그래서시인은“세계와나를온전하게느끼는감성의회복”을긴급한과제로설정하고있다.그리고마지막으로시인은주문과도같은기도와도같은바람을전한다.“이렇게모아놓은조금은낯선낯익은이야기가,오래된기도같은이야기가다른사람,다른세계를상상하는사람들과손을잡았으면한다.”('시인의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