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Description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가 없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흰』. 2018년 맨부커 인터네셔널 부문 최종후보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2013년 겨울에 기획해 2014년에 완성된 초고를 바탕으로 글의 매무새를 닳도록 만지고 또 어루만져서 2016년 5월에 처음 펴냈던 책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한 권의 시집으로 읽힘에 손색이 없는 65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강보, 배내옷, 각설탕, 입김, 달, 쌀, 파도, 백지, 백발, 수의…. 작가로부터 불려나온 흰 것의 목록은 총 65개의 이야기로 파생되어 ‘나’와 ‘그녀’와 ‘모든 흰’이라는 세 개의 장 아래 담겨 있다. 한 권의 소설이지만 각 소제목, 흰 것의 목록들 아래 각각의 이야기들이 그 자체로 밀도 있는 완성도를 자랑한다.

‘나’에게는 죽은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의 사연이 있다. 나는 지구의 반대편의 오래된 한 도시로 옮겨온 뒤에도 자꾸만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들에 사로잡힌다. 나에게서 비롯된 이야기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겨간다. 나는 그녀가 나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하고, 그런 그녀를 통해 세상의 흰 것들을 다시금 만나기에 이른다.
소설의 전체가 다 작가의 말이라고 작가 스스로 이야기한 이 작품을 통해 한강의 소설에 관한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 매달려 파생시킨 세상의 모든 ‘흰 것’들에 대해 한강이 써내려간 한강의 문장들 속에서 한강이 끌어올린 넓고도 깊은 서사를 만나게 된다. 소설 발간 즈음 한강은 고요하고 느린 퍼포먼스를 벌였고, 최진혁 작가가 제작한 영상 속에서 언니-아기를 위한 행위들을 언어 없는 언어로 보여주었다. 그 퍼포먼스가 글과 함께 배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2018년, 『흰』을 새 옷으로 갈아입혀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인다.
저자

한강

1970년늦은11월에태어났다.연세대국문과를졸업한뒤1993년『문학과사회』에시를발표하고,이듬해서울신문신춘문예에단편소설「붉은닻」이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장편소설『검은사슴』『그대의차가운손』,『채식주의자』,『바람이분다,가라』,『희랍어시간』,『소년이온다』,소설집『여수의사랑』,『내여자의열매』,『노랑무늬영원』,시집『서랍에저녁을넣어두었다』등이...

목차

1장─나007
2장─그녀045
3장─모든흰115

해설권희철(문학평론가)|우리가인간이라는사실과싸우는일은어떻게가능한가?141
작가의말181

출판사 서평

고독과고요,그리고용기.
이책이나에게숨처럼불어넣어준것은그것들이었다.

1.
이책의끝에붙일‘작가의말’을쓰겠느냐고편집자가물었던2016년사월에,나는그러지않겠다고대답했다.이책전체가작가의말이라고웃으며이야기했던기억이난다.이제이년이지나개정판을준비하며,비로소어떤말을조용히덧붙여쓰고싶다는―쓸수있겠다는―생각이든다.
―‘작가의말’에서

2.
2018년봄,한강작가의소설『흰』을새롭게선보입니다.이년전오월에세상에나와빛의겹겹오라기로둘러싸인적있던그『흰』에새옷을입히게된건소설발간에즈음해행했던작가의퍼포먼스가글과함께배었으면하는바람에서였습니다.작가의고요하고느린퍼포먼스들은최진혁작가가촬영한영상속에서그녀의언니-아기를위한행위들을‘언어없는언어’로보여줍니다.
그리하여다시만나게된한강작가의소설『흰』은수를놓듯땀을세어가며지은책,그런땀방울로얼룩진책입니다.이참이아니라면‘흰’이라는한글자에매달려그가파생시킨세상모든‘흰것’들의안팎을헤집어볼수가있었을까요.‘흰’이라는한글자를뚫어지게쳐다보고있노라니‘흰’이라는한글자의생김과발음에서끓어넘친숭늉처럼찐득찐득한슬픔같은게밀려듭니다.‘흰’,익숙한듯편안했다가낯선듯생경스러워지는이느낌의근원은어디에서비롯될까요.안다고말할수도,또모른다고말할수도없는이기묘하고미묘한‘흰’의세계속에서한강이끌어올린서사는놀라우리만치넓고깊습니다.예민하면서도섬세한특유의감각으로예리하게건져올린사유는얼음처럼차갑고막빻아져나온뼛가루처럼뜨겁습니다.우리는모두‘흰’에서와서‘흰’으로돌아가지않던가요.한강이백지위에힘껏눌러쓴소설『흰』.그밖의모든흰것을말하는소설『흰』.『흰』은결코더럽혀지지않는,절대로더럽혀질수가없는어떤흰것에관한이야기입니다.

3.
“흰것에대해쓰겠다고결심한봄에내가처음한일은목록을만든것이었다.”

그렇게작가로부터불려나온흰것의목록은총65개의이야기로파생되어‘나’와‘그녀’와‘모든흰’이라는세개의장아래스미어있습니다.한권의소설이지만때론65편의시가실린한권의시집으로읽힘에손색이없는것이각소제목아래각각의이야기들이그자체로밀도있는완성도를자랑하기때문입니다.비교적얇은볼륨감을가진이한권의소설은쉽게읽혀버리지않습니다.천천히아주느릿느릿읽게하다가,흐린연필한자루를들어문장에혹은단어에실금을긋게하다가,다시금앞서읽은페이지로돌아가그앞선데서부터다시금읽기시작하게만듭니다.내마음의멍울같은게책장에스미면서점점묵직해져가는소설『흰』의무게감을받치기위해불려나온흰것들.예컨대강보,배내옷,달떡,안개,흰도시,젖,초,성에,서리,각설탕,흰돌,흰뼈,백발,구름,백열전구,백야,얇은종이의하얀뒷면,흰나비,쌀과밥,수의,소복,연기,아랫니,눈,눈송이들,만년설,파도,진눈깨비,흰개,눈보라,재,소금,달,레이스커튼,입김,흰새들,손수건,은하수,백목련,당의정……등등온통무참히도흰것들의이름을나지막하게발음해봅니다.이소설은이렇듯눈으로읽고입으로읽는두가지과정속에불현듯진정한제속내를들켜주기도한다지요.흰것을떠올리고불러내고불러주고글로쓰는일련의과정이결국은흰것을보고흰것을읽는우리를치유시켜주는일이아닐까요.

4.
“익숙하고도지독한친구같은편두통”에시달리는‘나’가있습니다.나에게는죽은제어머니가스물세살에낳았다태어난지두시간만에죽었다는‘언니’의사연이있습니다.지난봄누군가나에게물었지요.“당신이어릴때,슬픔과가까워지는어떤경험을했느냐고.”그순간나는그죽음을떠올립니다.“어린짐승들중에서도가장무력한짐승.달떡처럼희고어여뻤던아기.그이가죽은자리에내가태어나자랐다는이야기.”
나는지구반대편의오래된한도시로옮겨온뒤에도자꾸만떠오르는오래된기억들에사로잡힙니다.그러다우연히1945년봄미군항공기가촬영한이도시의영상을보게되지요.“유럽에서유일하게나치에저항하여봉기를일으켰던이도시를(…)가능한모든수단을동원해깨끗이,본보기로서쓸어버리라”는히틀러의명령아래완벽하게무너지고부서졌던도시,그후칠십년이지나재건된도시곳곳을걸으면서나는처음“그사람-이도시와비슷한어떤사람-의얼굴을곰곰이생각”하기에이르지요.

오직목소리만을들었을것이다.죽지마.죽지마라제발.알아들을수없었을그말이그이가들은유일한음성이었을것이다.
그러니확언할수도,부인할수도없다.그이가나에게때로찾아왔었는지.잠시내이마와눈언저리에머물렀었는지.어린시절내가느낀어떤감각과막연한감정가운데,모르는사이그이로부터건너온것들이있었는지.어둑한방에누워추위를느끼는순간은누구에게나찾아오니까.죽지마.죽지마라제발.(32~33쪽)

나에서비롯된이야기는그녀에게로시선을옮아가기에이릅니다.“죽지마.죽지마라제발.그말이그녀의몸속에부적처럼새겨져있으므로”나는“그녀가나대신이곳으로왔다고생각”하기에이릅니다.그리고그런그녀를통해세상의흰것들을다시금만나기에이릅니다.희게얼어있는바다여,태양의빛이조금더창백해지기시작하는서리가내릴무렵이여,죽은나비의투명해져가는날개여,움켜쥘수록차가워지는창백한두주먹이여,검은코트소매에내려앉았다녹아사라질때까지일,이초를살다가는눈이여,안간힘을다해움켜쥐어온모든게기어이사라지리란걸알면서걸을때내리는진눈깨비여,어느추워진아침우리가살아있다는증거,우리몸이따뜻하다는증거로입술에서처음으로새어나오는흰입김이여,아무리멀리날아가도시야에서사라지지않는흰새여,날개를반쯤접은새처럼,머뭇머뭇내려앉을데를살피는혼처럼떨어지는손수건이여,얇은종이의하얀뒷면같은죽음이여.

이도시의사람들이그벽앞에초를밝히고꽃을바치는것이넋들을위한일만은아니라는것을그녀는안다.살육당했던것은수치가아니라고믿는것이다.가능한한오래애도를연장하려하는것이다.
그녀는자신이두고온고국에서일어났던일들을생각했고,죽은자들이온전히받지못한애도에대해생각했다.그넋들이이곳에서처럼거리한복판에서기려질가능성에대해생각했고,자신의고국이단한번도그일을제대로해내지못했다는사실을깨달았다.
그리고그보다사소하게,그녀는자신의재건에빠진과정이무엇이었는지도알게되었다.물론그녀의몸은아직죽지않았다.그녀의넋은아직육체에깃들어있다.(…)
그러니몇가지일이그녀에게남아있다;
거짓말을그만둘것.
(눈을뜨고)장막을걷을것.
기억할모든죽음과넋들에게-자신의것을포함해-초를밝힐것.(108~109쪽)

결혼을앞둔동생의신부가죽은어머니의몫으로마련해온흰무명치마저고리를태우면서나는생각합니다.“당신,올수있다면지금오기를.연기로지은저옷을날개옷처럼걸쳐주기를.”그리고나는말합니다.“모든흰것들속에서당신이마지막으로내쉰숨을들이마실것”이라고.‘모든흰’의이름으로알게되고앓게된통증,이고통을온몸으로겪어내고견뎌낸뒤에나누는작별의인사라니최선이라할수있겠지요.이것이진정한만남의인사라할수있겠지요.“이승과저승사이를소리없이일렁이는저거대한물의움직임”이그렇게섞이는거라지요.

죽지마.죽지마라제발.

말을모르던당신이검은눈을뜨고들은말을내가입술을열어중얼거린다.백지에힘껏눌러쓴다.그것만이최선의작별의말이라고믿는다.죽지말아요.살아가요.(133쪽)

『흰』은삶과죽음이라는경계를무력하게만드는소설입니다.삶과죽음이라는벽을모래로허물고,삶과죽음이라는단단함을무르게만들고,삶과죽음이라는당연함을낯설게하고,삶과죽음이라는평면을입체로분산시키고,삶과죽음이라는유한을우주라는무한으로확장시킵니다.넘나든다는일은몸에유연성을기르는일이지요.유연한사고가빚어내는끌어안음은연대를이루기에충분하지요.산자와죽은자의연대,어차피모든산자는모두죽은자가될것이아닌가요.“아기의배내옷이수의가되고강보가관이되었”듯이말입니다.

(※『흰』ebook에는사진작품이수록되어있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