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심재휘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심재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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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마음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서정이라는 다정하고 따뜻한 말
문학동네 시인선 108번 심재휘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이 출간되었다.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시인이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에 이어 네번째로 펴내는 시집이다. 이 시집은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감정들도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은, 우리와 닿아 있는 감정들이다. 특별한 기교 없이 진솔하게 써내려간 시어들은 그래서 읽는 이에게 스미듯 전달된다. 심재휘가 건네는 다정하고 따뜻한 서정의 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아픔을 달래주는 위로의 말이다.
서정시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 우리 삶의 근본을 이루는 것들을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변해도, 사람들의 생각이 변해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생각과 마음의 차이가 아닐까? 우리가 느끼는 순수한 감정들, 사랑과 비애과 그리움의 마음들은 우리가 가진 가장 내밀하고 소중한 것들이다.
시인은 그 내밀하고 작은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 고독한 존재들이 지닌 감정들을 고요히 응시한다. 시인은 지상에 존재하는 홀로인 것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것에 공감한다. 심재휘의 시에는 특히 자연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자연과 일상이 물 흐르듯이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를테면 ‘내다볼 멀리도 없이 제 몸을 핥는 꽃에게서/ 차례 없이 시든 잎들에게서/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백일홍」), ‘오래 묵힌 음표들도 건들면 음악이고 썩어가는 낙과의 마음은 언제나 꽃이다’(「다정도 병인 양」) 같은 시구들이 그러하다. 시든 잎들에게서 용서를 배우고, 썩어가는 낙과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시인이 마음을 다해 그들을 보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사물의 내면을 마주할 때, 시는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새로 발견하게 한다.
스스로의 마음을 마주하는 것은 홀로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홀로됨은 무언가 떠나감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니 이 시집의 또하나의 주된 정서가 그리움인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왜 어떤 이별은 상실감을 주고 어떤 이별은 그리움을 남기는 걸까? ‘헤어짐이란 서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봉분이 있던 자리」) 말하는 시인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시인은 떠나고 사라지는 일의 슬픔보다 이별이 남긴 의미를 살핀다. 이별이 의미를 남길 수 있는 건 떠나보낸 이가 떠난 이를 여전히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별의 몸이 흥건한 땅바닥에서
그가 둥둥 떠 있던 허공의 어떤 행복으로
괜히 뒷걸음질쳐보고 싶은 저물녘에
나는 와 있는 것이다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다」 부분
저자

심재휘

저자심재휘
1997년『작가세계』를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적당히쓸쓸하게바람부는』『그늘』『중국인맹인안마사』가있다.현대시동인상,발견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없는밑줄도이제는지워야할때

기적
겨울입술
빗금의온도
폭설,그흐릿한길
백일홍
얼굴
몸으로쓰는낙서
위로의정본
터널속에서만난돌
낱·말·혼·자
봉분이있던자리
터미널카페
언문으로쓰여진밤
비와나의이야기
밑줄을긋지는않았지만
잘익은시
봄밤은그에게도유감인듯하였다

2부영월은몸이추웠다

마음의지도
빈집
혼자남은돌?포로로마노
불쑥의표정?피렌체의뒷골목
따뜻한한그릇의말
지나온길은늘멀다
검은새소리?인스부르크
조각유리창이있는골목?베네치아의좁은골목들
호텔부다페스트
다정도병인양
이비시엥침의벽돌조각
영월
저수의역사
우도
경주
함목에가서
풍경이되고싶다

3부희미한파도소리를주머니에넣고

회산솔밭
강릉바람소리
안녕!풍전여관
안목
경포호변
아버지의노동당사
탈상
이월강릉
입춘
매미와배롱
추억에기댄저녁
어느덧나무
정월
가랑비오는저녁에닿다
산앵두나무와의가위바위보
삼월의속수무책

산비둘기가운다
먼길

해설|오래된서정,그따뜻한한그릇의말
|고형진(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떨어지고나서도마저익어가는감’을바라보며‘둥둥떠있던어떤허공의행복’을떠올리는저물녘.떨어져사라져버리는것이아니라온몸으로가랑비를맞으며익어가는감은생의마지막순간에남아있는희망을보여준다.자연스럽게붉게물든하늘을떠올리게하는저녁의풍경은,더없이처연하지만깊고아름다운아련함을자아내고있다.그아름다움으로인해저녁에닿아있는이의마음에도,시를읽는이의마음에도온기가배어든다.이와같은온기를통해시인은떠나가고홀로되는삶의슬픔을노래하면서도,한편으론그런삶의과정안에서그것을극복하고넘어서는삶을상상한다.
시인은「따뜻한한그릇의말」에서아버지가마지막으로남긴‘늦도록외롭지않게살아라’라는말을떠올린다.시인은그말에서동행의의미를발견한듯하다.그리고자신이받은따뜻한말한마디를독자들에게고스란히전달한다.홀로됨을숙명으로타고난게사람이라지만끝내고독하지않을길을담담히가리킴으로써자그만희망을건네고있는것이다.

다만오래걸어가야하는것뿐이란다아들아
먼길을가려면아들아너도
국수를잘먹어야지
―「먼길」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