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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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이런 재능은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을까._신형철(문학평론가)
혜성처럼 등장한 독보적 재능, 독특한 이력의 시인
이원하 첫 시집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원하 시인의 첫 시집을 펴낸다. 당시 “거두절미하고 읽게 만드는 직진성의 시였다. 노래처럼 흐를 줄 아는 시였다. 특유의 리듬감으로 춤을 추게도 하는 시였다.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천진 속의 시였다. 근육질의 단문으로, 할말은 다 하고 보는 시였다. 무엇보다 ‘내’가 있는 시였다.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였다. 시라는 그 어떤 강박 속에 도통 웅크려본 적이 없는 시였다. 어쨌거나 읽는 이들을 환히 웃게 하는 시였다”는 평가와 함께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그의 시는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라는 독특한 감각의 제목을 달고 있었고, 당선 직후 문단과 평단, 출판 관계자와 새로운 시를 기다린 독자들의 입에 제법 오르내리며 화제가 되었다. 국어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았고, 미용고를 졸업해 미용실 스태프로 일하고, 영화 〈아가씨〉에 뒷모습이 살짝 등장하는 보조 연기자로 살아온 이력도 한몫했다. 이십대 중반, 늦다면 늦은 때에 문학을 만나 시를 쓰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가 산 것과 신춘문예에서 익숙하게 보아오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개성 역시.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이제 총 54편의 시를 아우르는 첫 시집의 제목으로 독자들을 새로이 마주한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시집을 펼치면 차례 페이지부터 신선하다. 4부로 나뉜 구성에 각각의 부제목이 ‘새’ ‘싹’ ‘눈’ ‘물’이다. 한 음절로 된 단어들인 동시에 ‘새싹’과 ‘눈물’로 읽어도, ‘새싹눈물’로 읽어도 각각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는 짤막한 부제목 아래 다소 긴 편인 시의 제목들.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털어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 ‘서운한 감정은 잠시라도 졸거나 쉬지 않네요’ 등등의 제목은 글인 동시에 말 같고, 혼잣말인 듯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인 듯하다.
저자

이원하

2018년한국일보신춘문예로등단했다.시집『제주에서혼자살고술은약해요』를펴냈다.

목차

시인의말005

1부새
제주에서혼자살고술은약해요/여전히슬픈날이야,오죽하면신발에달팽이가붙을까/약속된꽃이오기만을기다리면서묻는말들/나는바다가채가기만을기다리는사람같다/풀밭에서면마치내게밑줄이그어진것같죠/첫눈물흘렸던날부터눈으로생각해요/참고있느라물도들지못하고웃고만있다/싹부터시작한집이어야살다가멍도들겠지요/섬은우산도없이내리는별을맞고/마음에없는말을찾으려고허리까지다녀왔다/바다를통해말을전하면거품만전해지겠지/동경은편지조차할줄모르고036

2부싹
초록과풀잎같은것들은항상곁에있는데보이질않더라고요그날부터였을거예요/해의동선/달이찌는소리가나를부르는소리였다니/털어내도변하지않는것이있어요/환기를시킬수록쌓이는것들에대하여/빛이밝아서빛이라면내표정은빛이겠다/필꽃핀꽃진꽃/빈그릇에물을받을수록거울이넓어지고있어요/가만히있다보니순해져만가네요/코스모스가회복을위해손을터는가을/말보단시간이많았던허수아비/누워서등으로섬을만지는시간/깊은맛이라는개념은얕은물에만있는것같아요/내가나를기다리다내가오면다시나를보낼것같아

3부눈
선명해진확신이노래도부를수있대요/눈감으면나방이찾아오는시간에눈을떴다/장미가우릴비껴갔어도여백이많아서우린어쩌면/투명한외투를걸쳤다면할일을했겠죠/나를받아줄품은내품뿐이라울기에시시해요/그게아니라취향,취향/아무리기다려도겨울만온다/바다는아래로깊고나는뒤로깊다/귤의이름은귤,바다의이름은물/나비라서다행이에요/마시면마실수록꺼내지는건/하나남은바다에부는바람/산수국이나비인줄알고따라갔어요/잘산물건이있나가방을열어봤어요/내가담근술은얼마나독할까요/하고싶은말지우면이런말들만남겠죠

4부물
눈물이구부러지면나도구부러져요/서운한감정은잠시라도졸거나쉬지않네요/눈동자하나없는섬을걸었다/하늘에갇힌하늘/저녁먼저먹을까,계절먼저고를까/그늘을벗어나도그게비밀이라면/입에담지못한손은꿈에나담아야해요/물잔에고인물/조개가눈을뜨는이유하나더/나무는흔들릴때마다투명해진다/노을말고,노을같은거/꿈결에기초를둔물결은나를대신해서웃는다

해설│자연에서자유까지―웃는사람이원하
│신형철(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유월의제주
종달리에핀수국이살이찌면
그리고밤이오면수국한알을따서
착즙기에넣고즙을짜서마실거예요
수국의즙같은말투를가지고싶거든요
그러기위해서매일수국을감시합니다

나에게바짝다가오세요

혼자살면서나를빼곡히알게되었어요
화가의기질을가지고있더라고요
매일큰그림을그리거든요
그래서애인이없나봐요

나의정체는끝이없어요

제주에온많은여행자들을볼때면
내뒤에놓인물그릇이자꾸쏟아져요
이게다등껍질이얇고연약해서그래요
그들이상처받지않았으면좋겠어요
앞으로사랑같은거하지말라고말해주고싶어요

제주에부는바람때문에깃털이다뽑혔어요,
발전에끝이없죠

매일김포로도망가는상상을해요
김포를훔치는상상을해요
그렇다고도망가진않을거예요
그렇다고훔치진않을거예요

나는제주에사는웃기고이상한사람입니다
남을웃기기도하고혼자서웃기도많이웃죠

제주에는웃을일이참많아요
현상수배범이라면살기힘든곳이죠
웃음소리때문에바로눈에뜨일테니깐요
_「제주에서혼자살고술은약해요」전문

어깨에힘을뺀자연스러운그만의문법을차례페이지에서우선맛본뒤본격적으로읽게되는첫시가등단작이자표제시인「제주에서혼자살고술은약해요」이다.제주에핀수국과바람등서정적인소재에“나에게바짝다가오세요”“나의정체는끝이없어요”같은묘한매력의경어체활용,“나는제주에사는웃기고이상한사람입니다”같은천진한듯한단호함까지.이원하시의힘이모두담겨있다.그러나시집의해설을맡은신형철평론가는이시한편만읽고서는“어떤마음의역사가이시를쓰게하였는지를.이웃음뒤에어떤세월이있으며,이아름다운경어체가어떻게탄생한것인지를”알수없으리라예고했다.요컨대이시를시작으로‘제주에사는웃기고이상한사람’의‘끝이없다는정체’를하나씩만나고난뒤,다시돌아와이시를한번더읽을때비로소이시를완전히갖게되리란것.
분명시집을읽어갈수록‘나’라는사람의이미지가또렷해진다.그는훌쩍제주로떠나살기로한사람,자주바다를바라보고자주나가걷는사람.날이차가워지면얼굴이빨개지는사람,누군가를그리워하는사람,남은미련을곱씹는사람,혼자몰래울고,그울음은숨기고덮으려웃는버릇을들인사람이다.

바람은차갑거나뜨겁고
나무는키가작거나크고
한시절은머물거나건너가며
말한마디는사람을달래거나그반대인데
너는하나예요
_「그늘을벗어나도그게비밀이라면」부분

추억하는일은지쳐요

미련은오늘도내곁에있어요

내가표정을괜찮게지으면
남에게만좋은일이생겨요
(…)

속은한번상하면돌이킬수없어서
아껴야하는데,이미돌이킬수없어서
목요일은잔뜩풀이죽어야했어요
_「서운한감정은잠시라도졸거나쉬지않네요」부분

하도리하늘에
이불이덮이기시작하면슬슬나가자
울기좋은때다
하늘에이불이덮이기시작하면
밭일을하는사람은아무도없을테니
혼자울기좋은때다

위로의말은없고이해만해주는
바람의목소리
고인눈물부지런하라고떠미는
한번의발걸음
이바람과진동으로나는울수있다
_「여전히슬픈날이야,오죽하면신발에달팽이가붙을까」부분

빛을비추면나를알아주지않을까싶어서
웃기만했어

얼마나오래이럴수있을까
정말웃기만했어
_「빛이밝아서빛이라면내표정은빛이겠다」부분

낮이란낮은
다사라졌으면좋겠다

낮에는자꾸다짐하게되니까새마음먹게되니까
내가잘보이니까

자주무섭다가
그상태그대로매번웃는다

섬에살다보니
섬과처지가같아진것이다

혼자한가해서매번혼자회복하는것이다
섬이되어버린것이다
_「동경은편지조차할줄모르고」부분

미련이남아괴롭고,용서하지못할것이있어괴로운내가그럼에도불구하고그리워할수밖에없는‘너’를향해하는말들은속삭임인듯편지인듯한경어체로,습관적으로웃기를택한나와혼자울기좋은나의속내는읊조림인듯일기인듯한평서문으로만날수있다.문체에따라어느새독자가화자의표정을,마음의안부를살피며읽게되는기묘한독서경험.
웃는것으로자신의결여를가려온화자가“바다한가운데놓인화분같은섬”(「필꽃핀꽃진꽃」)에서자기만의꽃을피우는과정을담은것이이시집이라할수있다.제주라는풍요로운자연속에서,아름다운것들속에서자신의마음의서사를탐구해온이의기록말이다.

영원히,말고
잠깐머무는것에대해생각해
전화가오면수화기에대고
좋은사람이랑같이있다고자랑해
그순간은영원하지않을테니까
지금자랑해
이렇게요
_「환기를시킬수록쌓이는것들에대하여」부분

그는노을과함께곧이섬을떠나죠
그뿐이고그러니오늘뿐이고
모든것들은원래다그렇죠

봄날의꽃처럼
한철잠깐이라고생각하면편하죠

올해는오늘까지만아름답다,

이렇게요
_「노을말고,노을같은거」부분

다시「제주에서혼자살고술은약해요」로돌아온다.이제“수국의즙같은말투”를가지고싶어하는나.수국의꽃말은진심과변덕으로,그것은감추는말인동시에드러내는말일것이다.제주의바람때문에깃털이다뽑힌새같은나이지만,“발전에끝이없”다는것을아는나이기도하다.“남을웃기기도하고혼자서웃기도많이웃죠”라고말하는이의얼굴은역시웃음기를머금고있으리라.이렇듯“제주에사는웃기고이상한사람”,이제여러분이이사람을만날차례이다.

그는이제울지않기위해웃는것이아니라웃을수있어서웃는사람이되었다.이웃음은그가쟁취해낸것이지만그는이것이제주의선물이라고말하고싶어한다.“제주에는웃을일이참많아요.”자,그러니시집전체가아니라이시만읽은사람이어떻게알겠는가.어떤마음의역사가이시를쓰게하였는지를.이웃음뒤에어떤세월이있으며,이아름다운경어체가어떻게탄생한것인지를.시집은여기서끝나고그는계속가야할길이있다.자연에서자유로가는길,우리도그길위에있고,시는오로지그길위에만있다.이원하의시는자유를바라보는자연의노래다.
_신형철,해설「자연에서자유까지―웃는사람이원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