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눈 (장석남 시집)

젖은 눈 (장석남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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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가장 섬세한 것에서 가장 강력한 얘기를 채집해온”(황현산) 시인 장석남의 『젖은 눈』을 문학동네포에지 44번으로 다시 펴낸다. 1998년 처음 출간되었으니 24년 만의 반가운 만남이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변함없이 우리 시 서정의 한 극단을 지켜온 그다. 『젖은 눈』은 지금까지 출간한 여덟 권의 시집 중 세번째로,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제 시의 갈 길을 바라보는 동시에 그 서정의 출발지이자 본원을 돌아보는, ‘깊이 젖은 눈’으로 담아낸 시편들이다.
저자

장석남

1987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등단했다.시집으로『새떼들에게로의망명』『지금은간신히아무도그립지않을무렵』『젖은눈』『왼쪽가슴아래께에온통증』『미소는,어디로가시려는가』『뺨에서쪽을빛내다』『고요는도망가지말아라』『꽃밟을일을근심하다』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개정판시인의말

1부
봉숭아를심고/일모/서풍부/밤의창변/돌멩이들/가여운설레임/부엌/궁금한일/해도너무한일/초승달에서/국화꽃그늘을빌려/자전거주차장에서/살구나무여인숙

2부
외딴집/솔밭길/솔바람속/나의유목(遊牧)/밤비/속삭임민가

3부
민들레/오동나무가있던집의기록1/오동나무가있던집의기록2/자화상/멧새앉았다날아간나뭇가지같이/답동싸리재어떤목련나무아래서/달의방1/달의방2/낯선방에서/소묘1/소묘2/소묘3

4부
풍화(風化)/꽃이졌다는편지/저녁산보/뱃고동곁에서/만(灣)/무인도를지나며/봄빛근처/뻘밭에서/비가득머금은먹구름떼바라보는할머니눈매/춤꾼이야기

5부
인연/팔뚝의머리카락자국그대로/가까이와/뻐꾸기소리/파꽃이하얗게핀/벽에걸린연못/꿈이야기/새로생긴무덤/감꽃/가을의빛/산길에서/말들을길어다/새의자취/그믐

출판사 서평

국화꽃그늘을빌려
살다갔구나가을은
젖은눈으로며칠을살다가
갔구나
(……)
모든
너나나나의
마음그늘을빌려서잠시
살다가가는것들
있거늘_「국화꽃그늘을빌려」부분

시인은한철머물다가는것들을오래들여다본다.둥굴레꽃이피고감꽃이떨어지고,꽃진자리에초록이밀려드는것을,그꽃그늘아래‘잠시살다가가는것들’을본다.제주에서묵었던여인숙의바닷소리,옆방의자장면그릇,감색목도리를한새와주인집고양이도왔다가간다.시인도달포머물다떠나며그자리엔‘맑은집’만이남는다(「살구나무여인숙」).그렇게왔다가떠나는계절에삶을빗대어,포개어놓을때,눈이시리도록가만한응시에젖어드는눈은곧‘맑은눈’이되기도할것이다.

감색목도리를한새가하나자주왔으나
어느날주인집고양이가
총총히물고걸어가는것이보였다
살구나무엔새의자리가하나비었으나
그냥맑았다나는나왔으나그집은
그냥맑았다_「살구나무여인숙」부분

이문재시인은그눈이향하는곳을‘어리고여린것들’이라했다.“새로모종한들깨처럼풀없이흔들리는”,만돌린처럼외롭고고드름처럼외로운삶(「자화상」)말이다.얻어온봉숭아씨가조그맣게싹을틔운화분앞에쪼그리고앉아이어리고여린“애기들”을가만보고있자면마침내꽃이피고씨를터뜨리는미래가겹쳐진다.시인은그렇게앉은자리에서작고간절한일생이왔다가가는것을,그한평생을다본다(「봉숭아를심고」).감꽃이피고지는사이를생각하며“이세상에와서울음없이하루를다보낼수있는사람이있다고는믿을수가없다”는시인에게이짧디짧은머묾이란“일체가다설움을건너가는/길이다”.

감꽃이피었다지는사이엔
이세상에와서울음없이하루를다보낼수있는사람이있다고는믿을수가없다

감꽃이저렇게무명빛인것을보면
지나가는누구나
울음을청하여올것만같다

감꽃이피었다지는사이는마당에
무명차양을늘인셈이다
햇빛은문밖에서끝까지
숨죽이다갈뿐이다

햇빛이오고
햇빛이또가고
그오고가는여정이
다는아니어도감꽃아래서는
얼핏보이는때가있다
일체가다설움을건너가는
길이다_「감꽃」전문

시인이어린것들에게,삶에게,자기자신에게거듭질문하는것은‘자리’다.바닷가에서주워온돌멩이들의맨처음있던자리를생각하노라면“살아간다는것이,/이렇게외따로있다는것”을실감하고(「돌멩이들」),박수근의그림앞에서“그커다란손등위에서같이꼼지락거렸을햇빛들이며는그가죽은후에그를쫓아갔는가아니면이승에아직남아서어느그러한,장엄한손길위에다시떠있는가”물으면이윽고“궁금한일들은다슬픈일들”임을깨닫는다(「궁금한일」).시인자신의삶또한한시절의머무름이니,강물곁에앉아“내가죽은후에내가살던자리에무엇이있을까”생각게도된다.그자리는제한몸머물던공간일뿐아니라“내가생각하던내생각안의어머니자리”이고,한세월을지나온길들이자온생애의자취이기도하겠다.그생의곡진함이또시인의눈을뜨겁게적시고,차가워진볕자락을찾게하는것이다(「서풍부」).

풀이눕고그위에
바람과같이우리가눕던자리는
저만큼이다
거기머물던적막은그러나
이제보니다적막은아니다
못보았던샛길이하나막어디론가가고있다_「벽에걸린연못」부분

그럼에도시인의젖어드는눈은슬픔만을,떠나온자리만을보지않는다.“여기는모두/선상(船上)이다”(「비가득머금은먹구름떼바라보는할머니눈매」)선언할때,있다가또스러지는존재모두머무는한철배위이고길위다.5부에걸친이시집의마지막에시인은「그믐」을두었으니,꽃이피고지고,해가뜨고지고,삭(朔)과망(望)의사이머물던적막또한“다적막은아니다”,적막만은아니다싶다.그의시를두고‘뒤로걷는언어들’(홍정선)이라할때,그시의걸음은거슬러돌아가는일이아니라돌아보며나아감일테다.
처음시집을내던해시인은“서른넷,初”라썼다.이제시집을다시펴내며그아래에나란히한줄을더한다.“쉰여덟,初!”머물렀으며또지나간,지금도지나고있는그스물네해의시간을물끄러미들여다보는시인은아직,“여전히젖은눈이다”.

나를만나면자주
젖은눈이되곤하던
네새벽녘댓돌앞에

밤새마당을굴리고있는
가랑잎소리로서
머물러보다가
말갛게사라지는
그믐달
처럼_「그믐」전문

■기획의말

그리운마음일때‘IMissYou’라고하는것은‘내게서당신이빠져있기(miss)때문에나는충분한존재가될수없다’는뜻이라는게소설가쓰시마유코의아름다운해석이다.현재의세계에는틀림없이결여가있어서우리는언제나무언가를그리워한다.한때우리를벅차게했으나이제는읽을수없게된옛날의시집을되살리는작업또한그그리움의일이다.어떤시집이빠져있는한,우리의시는충분해질수없다.

더나아가옛시집을복간하는일은한국시문학사의역동성이드러나는장을여는일이될수도있다.하나의새로운예술작품이창조될때일어나는일은과거에있었던모든예술작품에도동시에일어난다는것이시인엘리엇의오래된말이다.과거가이룩해놓은질서는현재의성취에영향받아다시배치된다는것이다.우리는현재의빛에의지해어떤과거를선택할것인가.그렇게시사(詩史)는되돌아보며전진한다.

이일들을문학동네는이미한적이있다.1996년11월황동규,마종기,강은교의청년기시집들을복간하며‘포에지2000’시리즈가시작됐다.“생이덧없고힘겨울때이따금가슴으로암송했던시들,이미절판되어오래된명성으로만만날수있었던시들,동시대를대표하는시인들의젊은날의아름다운연가(戀歌)가여기되살아납니다.”당시로서는드물고귀했던그일을우리는이제다시시작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