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 허수경 시집 - 문학동네포에지 045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 허수경 시집 - 문학동네포에지 045

$12.00
Description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신형철), 그로써 단연 “시인 같은 시인”(서영채). 2018년 우리 곁을 떠나 ‘혼자서 무한으로 걸어간’ 시인(허연). 허수경의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문학동네포에지 45번으로 다시 펴낸다. 2001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니 21년 만이다.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후 한국에서 두 권의 시집을 내고 홀연 독일로 떠나, 긴 방황과 외로움, “섬처럼 떠돌아다니던 시간”을 지나며 써낸 글들이다. “이제 더이상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하지 않는 지혜”로, “내가 나를,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살아갈 것”(시인의 말)이라는 다짐으로 엮은 단단한 책이다.
저자

허수경

저자:허수경
1964년경남진주에서태어났다.1987년『실천문학』을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슬픔만한거름이어디있으랴』『혼자가는먼집』『내영혼은오래되었으나』『청동의시간감자의시간』『빌어먹을,차가운심장』『누구도기억하지않는역에서』가있다.동서문학상,전숙희문학상,이육사문학상을수상했다.2018년10월3일독일뮌스터에서생을마감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나는어느날죽은이의결혼식을보러갔습니다/아픔은아픔을몰아내고기쁨은기쁨을몰아내지만/어느날눈송이까지박힌사진이/그밤에붉은꽃에/늙은들개같은외투를입고/늙은새는날아간다/머리에흰꽃을단여자아이들은/여자아이들은지나가는사람에게집을묻는다/안개와해사이/그러나지나가는세월도/어느날애인들은/구름은우연히멈추고/내영혼은오래되었으나

2부
그러나어느날날아가는나무도/내마을저자에는주단집,포목집,바느질집이있고/맑은전등/베를린에서전태일을보았다/그옛날공장은삶은과일들의자궁/미술관앞에노인들은물흐르듯앉아/아이가달아난다/두렵지않다,그러나말하자면두렵다/흑백사진한장/검은노래/청아한가을/붉은노래

3부
바다가/나의고아들은/그날의사랑은뜻대로되지않았네/부풀어오르는어머니/해는뜨겁고/붉은조개를단거북/동천으로/성(聖)숲/꿈,불/여관에서태어난아이들은/옛사랑속에는전장의별들이/몽골리안텐트/모르고모르고/이지상에는

4부
우연한나의/누런달아래있는놀이터/비행기는추락하고/폭발하니토끼야!/숨은사랑/우리들의저녁식사/눈안의눈/갑자기생긴길/오후두시경/어느눈덮인마을에추운아이하나가/숨/청동염소/물빛

출판사 서평

뿌리를뽑고날아가는나무도
공중에서자라나는뿌리마저
제손으로자르며날아가는나무도
별달을거쳐수직도수평도아닌채
날아가는나무도

공중에집을이루고
또금방,
집아닌줄알고날아가리라_「그러나어느날날아가는나무도」전문

한국을떠나독일로,발굴을위해시리아와터키를오가며시인은“몸의눈을닫고마음의눈으로”다양한세계를만났다.그렇게사라져버린도시와되살아나는역사사이에서시인은태어남과죽음을,광막함과외로움을본다.선연한것은전쟁과폭력이남긴핏자국이다.전쟁을피해왔다는전철속가수의입안으로여전히탱크가지나가고(「베를린에서전태일을보았다」),국경을지나는사람들앞에“탱크는길을파고비행기는길을막는다”.사람들이제목을자르며들어간차가운땅속(「늙은새는날아간다」),시인이자고고학자였던그가발굴한것은폭력의유구함이자문명의한계,유한성에대한예감이기도하다.

머리가둘달린아이들이태어나자라나
성안마을을돌아다니고
머리는하나이고몸을둘인아이들은술청에앉아
오래된노래를부른다

검은군인들이일으킨일을잊을수가없다고
둘인몸은서로를껴안고하나뿐인얼굴에서는눈물이흐른다
오오어느날
가버린사람들은별이되었을까,오래된노래는
성안마을시궁을흐르고시궁에서는먹가슴같은물이흘러
노을은지나다가가끔멈추어서서피곤한얼굴을씻는데_「붉은노래」부분

낯선땅에서시인은썼다.쐐기문자부터라틴어,고대중국어,수메르어등잊혀가는여러말들을익히고읽고되새기면서도,오직‘한국어라는바다에만머물며’시를썼다.닿지않으리라는불안과돌아오지않는메아리가쌓아올린외로움의집에서시인은시인자신을썼다.“나에게편지를썼으나나는편지를받아보지못하고”“어느날애인들은나에게편지를썼으나나는편지를받지못하고”(「어느날애인들은」),“누구도읽지않은편지위로구름은우연히멈추고”“읽지않은편지속에든상징도사라져갈것”을알면서(「구름은우연히멈추고」),시인은멈추지않고썼다.편지가든가방만과수원나무에매달려있을지라도,어느날거기서“오래된문자로쓰인편지가지상으로떨어”질것임을,“누군가공장의그늘아래에멈추어서서늙은연인에게서온편지를읽”을것임을(「그옛날공장은삶은과일들의자궁」)믿었다.고독과절망속으로들어가되기어이맨눈으로버티어서보았고,죽음을향해떠내려가는말들을붙잡아썼다.

그날의일기속에는불안같은흰꽃을단여자아이들,너의품을빠져나온오랫동안잠을잔혀는아이들의머리에매달린흰꽃에입을맞추고흐르는불처럼창밖너머펼쳐진숲을건넌다오오,그렇게다시시작되고너의품속에서새로운생을끄집어내듯나는아프다오오새로운지문의날들은그렇게시작되고그때너는일기를다시쓰고일기장속에서오래된시간은잠든다오래된시간은얼마나고요히우리를예언했던가머리에흰꽃을단여자아이들이순한시간속에서사라질것을오래된시간은얼마나고요히예언하고있었던가_「머리에흰꽃을단여자아이들은」전문

투병중이던2018년,개정판산문집『그대는할말을어디에두고왔는가』(난다)를위한자신의약력을정리하며그는이런말을둔다.“세번째시집『내영혼은오래되었으나』를내었을때이미나는참많은폐허도시를보고난뒤였다.나는사라지는모든것들이그냥사라지지않는다는것을짐작했다.물질이든생명이든유한한주기를살다가사라져갈때그들의영혼은어디인가에남아있다는생각을했다.”이시집은시인이남긴여섯권의시집중한편이다.생전그는세권의산문집,세편의장편소설,두권의동화책을펴냈고,2018년10월3일우리곁을떠나며세편의유고집을남겼다.어느오래된영혼이머물다간시간,우리에게남은것이이토록많다.

왜사람들은사랑할때와죽을때편지를쓰는가
왜삶보다사랑은더어려운가
왜저배우는유럽의어느지하도,더러운하수장에서죽어가면서도
하수도를따라떠내려가는편지를잡으려고하는가
_「내마을저자에는주단집,포목집,바느질집이있고」부분

■기획의말

그리운마음일때‘IMissYou’라고하는것은‘내게서당신이빠져있기(miss)때문에나는충분한존재가될수없다’는뜻이라는게소설가쓰시마유코의아름다운해석이다.현재의세계에는틀림없이결여가있어서우리는언제나무언가를그리워한다.한때우리를벅차게했으나이제는읽을수없게된옛날의시집을되살리는작업또한그그리움의일이다.어떤시집이빠져있는한,우리의시는충분해질수없다.

더나아가옛시집을복간하는일은한국시문학사의역동성이드러나는장을여는일이될수도있다.하나의새로운예술작품이창조될때일어나는일은과거에있었던모든예술작품에도동시에일어난다는것이시인엘리엇의오래된말이다.과거가이룩해놓은질서는현재의성취에영향받아다시배치된다는것이다.우리는현재의빛에의지해어떤과거를선택할것인가.그렇게시사(詩史)는되돌아보며전진한다.

이일들을문학동네는이미한적이있다.1996년11월황동규,마종기,강은교의청년기시집들을복간하며‘포에지2000’시리즈가시작됐다.“생이덧없고힘겨울때이따금가슴으로암송했던시들,이미절판되어오래된명성으로만만날수있었던시들,동시대를대표하는시인들의젊은날의아름다운연가(戀歌)가여기되살아납니다.”당시로서는드물고귀했던그일을우리는이제다시시작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