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에 반의 반

반에 반의 반

$15.00
Description
맹렬히 사랑스럽게, 피할 수 없이 선명하게
소설가 천운영 십 년 만의 소설집
그려보았다.
물에 젖은 늙은 몸이 환하게 빛나는 순간을.
숲의 햇살과 함께 조각조각 부서지는 웃음소리를.

반의반의 반만큼의 상상을 더하여, 더 환한 풍경으로
여성의 목소리로 기록되는 다성多聲과 다감多感의 계보

여성의 원초적 생명력을 바탕으로 도발적인 서사와 관능적인 미학을 선보여온 소설가 천운영이 십 년 만의 다섯번째 소설집 『반에 반의 반』으로 독자 곁을 찾았다. 신동엽창작상, 올해의 예술가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이야기꾼으로서의 저력을 보여준 작가는 그동안 취재에 기반한 생생한 장면 구성과 허위를 부수는 담대한 묘사, 터부에 홀연히 손을 뻗어 이야기 속으로 데려오는 과감함으로 한국문학에 전에 없던 궤적을 그려왔다.
『반에 반의 반』의 아홉 단편에서 들려오는 것은 세대도,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다. 다종다양한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연이 닿은 이들에게 무람없이 먹을 것과 잘 곳을 내어주는 다정함이 바로 그것이다. 본처 자식들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 둘째 시어머니를 다시 거둬들여 평생을 함께하는 며느리(「우니」 「내 다정한 젖꼭지」), 꽃놀이 가는 길에 만난 어린 오누이를 집에 들이고 아껴둔 이부자리를 건네는 할머니(「봄밤」). 가족을 넘어 더 많은 존재들의 생존 그 자체를 긍정하는 이 다감多感의 계보는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이어져갈 듯하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이면이 있을까. 천운영은 ‘반에 반에 반’의 상상을 더하여 그 맹렬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보인다. 체신을 중요시하는 집안의 가장에게는 부끄러움을 잠시 내려놓고 어머니와 물장구치는 순간을 선사하고, 희생만 하는 것 같던 어머니에게는 꿈결 같았던 봄날의 한가운데, 사랑하는 이와의 한때를 회상하게 한다. 소설가 윤성희의 추천의 말처럼 이 환한 풍경은 문장을 넘어 목소리가 되고, 혀끝으로 느껴지며, 마침내 읽는 이의 온몸을 통과한다. 천운영의 천연덕스러운 솜씨로 버무려진 이 시대 여성들의 생생한 삶이 여기, 『반에 반의 반』에 펼쳐져 있다.

천운영의 소설은 눈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귀로 듣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말맛을 느끼려면 읽는 것도 듣는 것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그저 마음을 열어놓고, 불어오는 바람과 흘러가는 구름을 느끼며 풍경 속에 자신을 가만히 두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이야기는 굽이굽이 흘러갈 것이다. 이야기는 휘어지고 휘어질 것이다. 이야기는 내 안에서 “할랑할랑 흔들면서, 어깨를 들썩들썩, 뻗었다가 흘렀다가 올랐다가 내렸다가”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심장이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는다. 추임새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연결되고 삶은 다른 이의 삶으로 연결된다. 그 순간, 천운영 소설은 징해진다. 오메, 이토록 징한 삶이라니. 그 삶이 문장을 넘어서는 순간 천운영 소설은 읽으면서 동시에 듣게 된다. 눈으로 읽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다…… 그러다 마침내 온몸으로 통과하는 소설이다. _윤성희(소설가)
저자

천운영

천운영은1994년한양대학교신방과를졸업했으며1997년서울예대문예창작과를졸업했다.현재고려대국문대학원에재학중이다.지난2000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단편소설「바늘」이당선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지난2001년제9회대산문화재단문학인창작지원금을받았으며같은해등단작을표제로한소설집『바늘』을출간했다.2004년소설집『명랑』을출간했고,지난해장편소설『잘가라,서커스...

목차

우리는우리의편이되어007
아버지가되어주오035
반에반의반069
우니099
명자씨를닮아서131
내다정한젖꼭지163
봄밤191
다른얼굴199
금연캠프239

해설관능의할머니,미지의어머니서영인(문학평론가)279
작가의말297

출판사 서평

세상이라는격랑을헤치는주름진손

표제작「반에반의반」은어느여름날계곡에서물놀이하던‘나’의할머니를추억하며시작된이야기다.십이년전세상을떠난기길현할머니의제삿날,둘러앉은친척들은물에젖어속이훤히비치는속치마하나만입고춤을추던그녀를각자의기억에서꺼내온다.그러나기길현의장남인‘나’의큰아버지만큼은그런기억이없다고잘라말한다.대신그가기억하는것은다른장면이다.

사람들이아버지를잡겠다고집에들이닥쳤는데,문앞을딱막아선사람이바로네할머니였어.양팔을쫙벌리고버티고서서는,눈을부릅뜨고사람들을쏘아보는거야.울고불고애원하고빌고그러는게아니라,그냥버티고서있는거야.그러곤나지막이사람들이름을불러.아이누구아짐,아이누구자식,누구동생,누구아버지.하나하나눈을맞추면서,무언가를골라내고있는사람처럼.아이,아이,아이.
(…)
어머니는그때골라내고있었던거야.그양반이떡을해먹였던사람들을.자식들굶겨가며만들어돌렸던그떡.그떡이아버지를살렸다.사람들말마따나그동안쌓아둔인심이._「반에반의반」,82~84쪽.

그가들려주는것은6·25전쟁의한가운데,작은몸으로거대한힘에맞서는기길현의모습이다.없는형편에도동네대소사를챙기며떡을나누던그녀는그렇게얻은인심으로남편을위기에서구해낸다.큰아버지에게기길현은집안을건사하고재생산을가능케한강인한어머니이지“함부로옷벗어던지고흐트러지고그럴분”이아닌것이다.그러나소설가인‘나’는상상속여름날의계곡에할머니와큰아버지를함께소환해낸다.기길현의아들로서,순수한마음으로어머니와물장구를치는그를그려본다.반의반의반만큼의상상력으로그려낸그순간은더없이환하고애틋하다.관습과관성에서벗어나어머니와아들이순수히어우러지는기꺼운장면.천운영은가부장의전형성을깨뜨리는시도를통해더환한풍경으로우리를이끄는듯하다.

「우니」「명자씨를닮아서」「내다정한젖꼭지」「봄밤」으로이어지는연작소설은살아가고자하는존재들에게무람없이먹을것과잘곳을내어주는한여성의이야기이자그녀에게길러진존재들의뒷이야기다.재취자리로들어갔다가남편의죽음이후본처자식들의반발로집에서쫓겨난순임.그런순임을다시거둬들인것이순임의며느리기길현이다.수십년을함께하는동안,그들은핏줄보다서로를더잘아는사이가되었다.어느날,꽃놀이를떠난두할머니는갈곳없는어린오누이를집으로데려오고만다.갑자기눌러붙은군식구가달갑지않을법한데도길현은오누이에게이부자리를내어준다.

입을삐죽거리던길현씨가더이상은못봐주겠다는듯자리를박차고일어섰다.계집애는길현씨가쿵쿵발소리를내며안방으로들어가고도한참뜸을들인후에야엉덩이를조금더안쪽으로들이고앉았다.신발은벗지않은채였다.한동안애젖빠는소리만가만가만했다.순임씨의몸이박자를맞추듯좌우로살짝살짝흔들렸다.계집애의몸이닿을듯말듯했다.별안간안방문이요란스레열리더니길현씨가우렁차게외쳤다.뭐하고들앉았어!어서자지않고서는.고함과함께베개가툭튀어나오더니이어이불한채가문지방을타고넘어왔다.길현씨가막내며느리에게혼수로받아장롱속에모셔둔새명주이불이었다._「봄밤」,196~197쪽.

이장면에어울리는단어는‘연민’보다는‘탄생’이다.가족을넘어선새로운공동체의탄생이라설명해도좋을것이다.동네사람들에게인심을쏟고,연이닿은사람들을먹이고재우는것.그것은천운영소설의여성들이할수있는당연스러운베풂이다.생존하고자하는사람들에게무람없이자리를내어주는그다정함은여성의원초적생명력과닮아계속해서뿌리를뻗는다.

맹렬히사랑스럽게,피할수없이선명하게

소설집의포문을여는「우리는우리의편이되어」는중년의여성소설가‘나’가주인공이다.한잡지사에서인터뷰를중심으로한새로운형식의소설을제안했을때,‘나’는친구의딸을떠올린다.친구의뱃속에있을때부터알아온그녀는이년전가족에게커밍아웃을했고,독실한기독교신자인친구는이를받아들이기힘들어한다.비록각자의신념때문에평행선을달리는듯보이지만,이들이인터뷰의마지막에떠올리는건서로다.가족이기에겪고마는갈등의뒷면에는서로를향한맹렬한사랑이있음을소설은말하는듯하다.
「아버지가되어주오」에서‘나’의부모님은지금막위장이혼을마쳤다.절세를위한방편이었다지만아버지는어머니가정말로자신을떠날까부산을떨고,큰딸인‘나’는이참에정말로갈라서라며아버지의과오와어머니의희생을소리높여이야기한다.그러나식사자리는평소처럼끝나고,아버지는밝은얼굴로손을흔들며귀가한다.허탈해하는‘나’에게어머니는나지막이묻는다.“넌네엄마인생이,그렇게정리되면,좋겠니?”(43쪽)
‘나’는그렇게나딸을귀애했다는외할아버지의이야기를어머니에게전해듣는다.벌이는변변찮아도어머니에게무한한사랑을주었다는외할아버지는그녀가덜컥혼전임신으로아기를낳고남편될사람과함께찾아왔을때이렇게말한다.“이제부터네가,저사람아버지가되어줘라.”(61쪽)

아버지는왜나한테그런말을하셨을까?당부였을까충고였을까걱정이었을까.사랑을주라는말이었을까,사랑을받으라는말이었을까.그래서일단사랑을주기로했어.내아버지는사랑을주는사람이었으니까.그런데사랑을받아본적이없는사람은사랑을할줄도,받을줄도모르더라.내가주는것이사랑인줄도몰랐지.그래서사랑을받는법부터알려줘야했어.끊임없이사랑을주면서.그래야또내가사랑을받을테니까.
_「아버지가되어주오」,63쪽.

어머니는‘아버지가되어주라’는말을사랑을베풀라는뜻으로받아들이고이를실천한다.‘나’가희생과인내라는고역으로기억했던어머니의삶은어머니본인의시선에서는한없는사랑의역사였던것이다.가부장제아래고통받는여성의삶을전형화하는‘나’에게엄마는일깨워주는듯하다.실제그녀들의삶은모두다르고,자주진취적이었으며,어느봄날두연인의눈맞춤처럼설레고아름다웠다는것을.

「다른얼굴」의‘나’는독일에이주한한국인으로,스시집을운영하고있다.이들은독일의한시립교향악단소속한인들을중심으로공동체를꾸리고,적당한때가되면모여함께만두를빚고수다를떨며시간을보낸다.어느날,‘나’는지갑을도난당한다.아마도자신의지갑을훔쳐갔을,눈이마주쳤을때아무일없는듯웃어보이던아랍계남자의얼굴을떠올리며‘나’의마음에는의심이싹튼다.그날,그들부부의집에서파티가열리고,여느때와다름없는대화속에서‘나’는허위를감지한다.아랍계이민자,1세대한인이주자들과자신들을비교하며그들을낮춤으로써스스로를높이는구분짓기의대화가전에없이낯설다.

웃는얼굴로남의지갑을훔쳐간것은그냥범죄일뿐,그범죄자가아랍인인것과는아무상관이없다.범죄를범죄로받아들이는것과모든아랍인을잠재적범죄자취급하고,문제집단으로취급하는것은다른문제다.그러나그녀의정원에모인사람들은아무렇지도않게그문제를뒤섞어놓으면서그것을자신들의친밀과유대를확인하는잡담거리로삼는다.꽃을먹는달팽이를으깨죽이는천진한아이처럼,그들은담소를나누고만두를빚으면서아랍인들을멸시하고위세대이민자들을비웃는다.범죄자의얼굴을일람하고의심을배운그녀가이가족적인화목을박살낸다.달팽이를죽인아이에게무서운얼굴로소리를지르면서,평화로운가든파티를중단시키면서.이화목해보였던교포집단은앞으로더이상가족행세를할수없을것이다._서영인,해설「관능의할머니,미지의어머니」,293쪽.

「금연캠프」에등장하는8인의여성도마찬가지다.자발적으로금연캠프에입소한중증흡연자인그녀들은첫만남에다과를나누며친절을베풀지만,은근하게다복함을뽐내고상대방의몸가짐이나옷차림으로어울릴만한사람인지를평가한다.캠프가끝나자,함께식사하자는겉치레말조차온데간데없이사라지고,남는것은씁쓸한담배맛뿐이다.우리공동체가당면해있는계급문제를인물들의생생한발화를통해암시하는천운영의솜씨는읽는이는피할수없이선명한현실의화소로이끈다.

서희주는캠프에도착할때와마찬가지로엘리베이터앞에서남편이보낸기사에게캐리어를건넸다.오명자는손주얼굴에입술을비빌생각을하니모든금단증상이사라졌다.김숙희는아는동생에게전화를걸어고양시에있는숯가마에서만날약속을잡았다.오현주는자기자신에게상을주는의미로집까지택시를타고가기로마음먹었다.모두손을흔들며서로의안녕을빌었지만,다시만날일이없기를바랐다.육지에도착한뱃사람들처럼뒤도안돌아보고뿔뿔이흩어졌다.그들이금연에성공할지는그누구도모를일이었다._「금연캠프」,276쪽.

『반에반의반』의수록작들은‘명자’와‘기길현’이라는두여성의이름으로꿰어져있다.같은이름을지녔지만,각각의단편에서그들은조금씩다른삶을살아가고있다.하나의전형으로모일수없는여성들의이채로운목소리를천운영은들려준다.그러나이중에서아직이름을가지지않은이도있다.명자와기길현에게서태어난새세대의여성들이바로그들이다.명자와기길현이세상을떠난지금,그들은새로이자신의길을개척해나가야한다.새시대의배턴을넘겨받은그녀들이다성多聲과다감多感의계보를이어나갈수있을까.소설가천운영이써내려가고있는이야기를따라가다보면걱정은사라지고응원의목소리가샘솟는다.이미잘해내고있으니,앞으로건투를빈다고.천운영의작품들은그렇게말하는듯하다.

추천사

천운영의소설은눈으로읽으면서동시에귀로듣는소설이다.하지만이소설의말맛을느끼려면읽는것도듣는것도잠시내려놓아야한다.그저마음을열어놓고,불어오는바람과흘러가는구름을느끼며풍경속에자신을가만히두어야한다.그러다보면이야기는굽이굽이흘러갈것이다.이야기는휘어지고휘어질것이다.이야기는내안에서“할랑할랑흔들면서,어깨를들썩들썩,뻗었다가흘렀다가올랐다가내렸다가”춤을추게될것이다.심장이얼쑤하고추임새를넣는다.추임새가메아리처럼울려퍼지면,이야기는다른이야기로연결되고삶은다른이의삶으로연결된다.그순간,천운영소설은징해진다.
오메,이토록징한삶이라니.그삶이문장을넘어서는순간천운영소설은읽으면서동시에듣게된다.눈으로읽고,귀로듣고,입으로맛보다……그러다마침내온몸으로통과하는소설이다._윤성희(소설가)

작가의말

엄마는요즘외출을할때면꼭이렇게말한다.오늘이제일젊고제일예쁘고제일싱싱한날이니재미지게놀다와야지.그모습이얼마나예쁘고어찌나서러운지.기록해두어야했다.오늘제일생생한엄마의기억들을.그몸에쌓여온무늬들을.언젠가당신이기억해낼수없게되었을때,그리고언젠가당신얘기를영영들을수없게되었을때,내가대신기억하고들려줄수있게.
엄마의이름은명자다.중학교때단짝친구어머니이름도명자였다.우리는그래서더빨리각별해졌다.반이바뀌어도명자라는이름의엄마를둔아이한둘은꼭있었다.성은기억나지않지만아무튼명자.성격도환경도내력도다르지만우리모두명자씨의자식들.미자화자영자정자경자옥자숙자그세대의흔한자식‘자’자이름까지다불러모아명자씨.명자씨는어머니와같은단어.그렇게명자씨는태어났다.
그리해서라도되고싶었던모양이다나는.내어머니의엄마가.다음생이아니라지금생에.어머니는나를낳고나는명자씨를낳고,그렇게서로의자식으로생을마감할수있기를.
_‘작가의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