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 (김혜진 장편소설)

중앙역 (김혜진 장편소설)

$14.00
Description
스스로를 버린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사랑인가 절망인가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김혜진 첫 장편소설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첫 소설집 『어비』(2016)를 비롯해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2017) 『9번의 일』(2019), 중편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2020)과 두번째 소설집 『너라는 생활』(2020)까지 성실히 자기만의 소설세계를 만들어온 김혜진 작가, 그의 첫 책이자 첫 장편소설이었던 『중앙역』을 새로이 선보인다. 『중앙역』은 2014년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으로, 당시 심사위원들은 “과거도 추억도 없이, 심지어 미래도 없이 남녀가 사랑을 나눈다. 이런 사랑이 가능한가? 불모지에 발가벗은 남녀를 풀어놓고 작가마저 망연히 그 여로를 쫓는 것은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중앙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노숙인의 삶과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권력에서 비켜난 존재들의 노동과 정체성, 주거의 문제를 꾸준히 다뤄온 김혜진 소설세계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서울역 다시서기센터에서 일하던 지인을 통해 노숙인 아웃리치 활동을 취재하며 이 작품을 구상했다. 그만큼 생생하게 거리의 삶을 담아낸 이 작품은, 그간 서사의 세계에서 호명받지 못한 인물들의 내면 깊숙이 독자를 데려간다. 사회적 약자라 뭉뚱그리지 않고 한 개인이 가진 가장 개인적인 것을 파고드는 작가 특유의 방식을 통해 “이래도 쉽게 판단내릴 수 있겠습니까?” 묻는다. 내용과 문장을 다듬고 작품 속 두 남녀를 형상화한 듯한 남학현 화가의 그림으로 새로운 옷을 입혔다. 김혜진 작가의 작품에 신뢰와 지지를 보내는 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이 읽힐 선물 같은 소설이길 바란다.
저자

김혜진

1983년대구에서태어나2012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당선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어비』『너라는생활』,장편소설『딸에대하여』『9번의일』,중편소설『불과나의자서전』이있다.

목차

중앙역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맨발에슬리퍼차림으로거리에서살아가는여자와
처음만난그녀가삶의전부가된남자
그리고그들이선택한삶의마지막공간,중앙역

낮동안시끄럽게이어지던공사도중단된깊은밤의중앙역.중앙역은도시한가운데위치한가장큰역이다.캐리어를끌며역사(驛舍)주변을도는한젊은남성이있다.행인들이요령있게그를피하고,자연스레그의앞엔길이열린다.한참만에자리잡은곳은열차선로위에걸린구름다리한구석.박스를깔고앉아보고또누워본다.박스아래깔린돌멩이를고르며가능한한편안한자세를취해본다.그는거리에서먹고자고산다.거리의냄새와소음이삶의풍경인사람이다.

모르는사람앞에빈손바닥을내밀어본사람은안다.그손이얼마나많은이야기를할수있는지절감하게된다.그러니까나는수치심과모멸감을치르고얼마간의돈을쥐는것이다.그러다보면나중엔그것이무엇이었는지조차잊어버리고만다.거리에서한번잃은것은되찾을수없다.그런것들을영원히잃는대가라면우리가받는돈은그냥주어지는것이아니다.잃을게없을때까지잃고또잃고마침내다잃은내모습을상상하는건끔찍한일이다.
_167쪽

어떤이유에선지거리의삶에편입된그는,그러나다른노숙인과자신은완전히같지않다생각한다.중앙역광장에서벌어지는일들,오가는감정과관계들을관찰하며자신의삶과그곳의거리를어떻게든좁히려하지않는다.그러나덜잃기위해애쓰는그의노력이무색하게거리의상황은그가가진것을하나둘빼앗아가고,그에게는남들이부러워하는젊음조차이제는서둘러소진해버리고싶은무엇이된다.
그런그에게‘여자’가나타난다.그의전부나다름없는캐리어를도둑질해갔던늙고병든여자.캐리어가있던자리에들어선여자는어느새그에게새로운,유일한삶의의미가된다.

여자가아니면누가내게이렇게다정한말을건네고따뜻한체온을나눠줄수있을까.다른누군가를꿈꿀수없는가난한처지가서로를유일한존재로만들었다고해서그게사랑이아니라고누가말할수있나.나는새파랗게핏줄이불거진여자의몸을조심스레끌어안는다.
_217~218쪽

그들이어떻게거리의생활을하게되었는지는알수없다.작가는그들의나이와이름과얼굴을지워,그조건들이상징하는모든편견에서벗어나작품을읽는독자저마다의상상력과구체성으로이야기를완성해나가도록한다.‘나’와‘여자’로호명될뿐이다.작품후반부,‘나’가‘여자’의이름을부르는장면이나오나,그역시그들의일일뿐독자에게는그이름이들리지않는다.그들의삶을다알겠다고착각하지않도록작가가의도한바이리라.가족도,법도,사회제도도그들을비껴갔으며,미래도희망도더는보이지않지만,거리는그리고광장은두사람의사랑을타인의시선으로섣불리판단하지않고온전히받아주는공간으로기능한다.

다른누군가를꿈꿀수없는가난한처지가
서로를유일한존재로만들었다고해서
그게사랑이아니라고누가말할수있나.
그는여자와눈비피할수있는안전한방에서생활하기를꿈꾼다.여자가덜아프길바란다.여자가고통을잊기위해술을찾는밤이그는괴롭다.다포기했다생각한삶에목적이생기고미래를바라게되니괴롭다.여자는그의바람이편하지만은않은듯하다.그보다훨씬더오래거리의삶을살아온여자에게‘시간성’이란희박한것이된지오래다.두사람의관계가깊어갈수록여자의과거를궁금해하는남자에게,여자는단호히말한다.“나도너를몰라.(…)그래도이렇게같이있잖아.그거면된거아니야?(…)인생은아주짧아.나한테는지금이전부야.과거도미래도없어.(…)너한테도과거가있잖아.다지난일이야.우리도언젠가과거가돼.그렇게되어버려.”
현재에머무르려는여자와미래가중요해진남자.그러므로노력하고행동하는것은남자다.위험하고더럽고어려운일이어도좋다.그는재개발지역철거용역으로일하며원주민을쫓아낸다.농성중인사람들을무력으로진압한다.자신처럼힘없고돈없고의지할데없는사람들을괴롭히는데죄책감느끼지않는다.그는신분증을팔고,미래를저당잡히는일도마다하지않는다.그러나돈을벌고모으는것은어렵고,뺏기거나속아넘어가는일은쉽다.그는점점더자신이거리두고자했던사람들과닮아간다.

나는아무에게나손을내밀고돈을구걸하기시작한다.아무망설임없이손바닥이펼쳐지는게놀랍다.언젠가빈상자앞에엎드려있던사람이생각난다.부끄러운줄도모르고공중을향해환하게펼쳐진손바닥.아무도모르게상자안의동전을재빨리수거하는손놀림같은것들.보이지않는경멸과멸시따위가지하도계단을바쁘게오르내렸다.이제나는그런게뭐대수인가생각한다.손바닥을내미는게뭐가힘든일인가.혼자가되는것에비하면모르는사람에게손을펼치는것은너무나쉬운일이다.
_250쪽

“무언가를쥐고붙잡는게아니라텅빈채로무언가떨어지기만을기다”리는그의손.동정이든경멸이든상관없으니뭐든값을쳐달라손내미는그에게사랑은절망인가,구원인가.여자와의관계를부정해야만그도살고여자도살수있는상황앞에서,그가내리는선택은가슴아픈것일수밖에없다.완전한절망에빠졌을때나타난단하나의사랑,유일한사람을잃었을때만나게되는밑바닥보다더한추락의고통이인간을인간답게하는최후의경계를우리눈앞에보여준다.

김혜진작가는현대화가낳은불가피한산물로여겨지는,사회로부터완전히배제된존재에빛을비춘뒤,‘사랑’이라는보편적감정의레이어를입혀이야기를불편하고도익숙한것으로만들었다.작가의작품을읽어본이라면불행한삶으로내몰린이들의순애보적사랑을짐작하지는않았을것이다.그는자신의첫장편에서이미전형적인것과는거리가먼인물들을내세웠다.우리가어디론가이동하기위해역을찾았을때,그곳을삶의마지막공간이라생각하고모여든이들을멀찍이떨어져지나칠때,그때쉽게판단해버리고마는것과는다른삶을말이다.인물들의가까이에서서그들의이야기를잘듣는귀를가진작가.그덕분에우리는무심히바라보고평가하던삶의풍경하나를새로이바라보는눈을갖게된다.과거도미래도모두잃거나포기했지만,누구보다생생한현재를쥐고있던그,열망으로넘치던그현재마저잃은그가마주할삶은과연어떠한것일지.마지막장을덮은뒤에도쉽게가시지않는여운속에서먹먹한마음으로생각해보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