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 영화처럼 (전연옥 시집)

불란서 영화처럼 (전연옥 시집)

$10.00
Description
난 이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까
눈 내리는 변방에 그림자를 구기고 앉아
내 이마를 때리는 고통의 눈발들이
그대의 야윈 발등 위에 일용할 슬픔으로 쌓이기 전에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배운 것이라곤
시린 처마끝에 슬픈 꼬랑지를 감고
어두운 지붕을 향해 묵묵히 그네를 타는 일뿐 _「거미」 부분

누가 뭐라 해도 너의 다리는 아름다워
어두운 찬장 서랍 속에서도
기교적으로 달릴 수 있고
아침햇살과 만나면
눈부신 사랑의 평등한 힘으로
내 발등 위에 신발 자국을 낼 수도 있지만 _「바퀴벌레」 부분

자정이 넘자 내 몸을 뚫고 들어오는 예리한 핀침에 의해 나는 표본되었다 숲에는 아직도 곤충들이 살고 있는지 굳어오는 손끝을 움직이며 나는 황홀하지만 풀 한 포기 없는 이곳에서 나는 무얼 먹고 사나 포충망 가득히 날아오르는 날개를 바라보며 조카는 내 몸 깊숙이 또 한 개의 핀침을 박고 한 방울의 에테르로 나를 잠들게 하지만 무엇 때문일까 자꾸만 살고 싶어지는 이 이유는 _「곤충채집」 부분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전연옥 시인의 첫 시집 『불란서 영화처럼』을 문학동네포에지 23번으로 새롭게 복간한다. 1990년 3월 민음사에서 첫 시집을 묶었으니 그로부터 꼬박 31년 만이다. 초판과 동일한 55편의 시를 싣고 몇 편의 순서만 조정했다. 중앙일보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박재삼, 황동규 시인은 당선작 「멸치」를 가리켜 “우리가 항용 당선작으로 만나는 시보다 스케일이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인 단단함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느낌과 생각에서 오는 단단함이다. 험난한 길을 계속 걸어 ‘전연옥’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쓴다. 초판 해설에서 이광호 평론가는 전연옥의 시에 대해 친근한 일상적 소재들을 가지고 삶과 현실의 묻혀진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명징한 비유체계를 축조하고 있다고 평한다. 그가 택한 소재와 상징들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들이지만 시라는 문학적 관습의 틀 속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독특한 시적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쉬인이 아닌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당선 소감)로 그는 아직 걸어가는 중일까.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방법들은
어찌하여 이 모양 이 꼴로 매양 피곤한 것뿐일까
고통의 다리를 뻗고 누워 안식의 깊은 잠을 청할
미래의 내 묫자리가 사나워서 그런 것일까
주일날 늦은 아침
아득한 벌판에 홀로 서서 해바라기를 즐기고
그대로 어둑한 그림자가 되어 저물녘을 헤매일 때
내 사랑은 불란서 영화처럼 우아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때로,
유치했던 기억들은 몸살 나게 아름다워
접어두었던 미래와의 약속을 새롭게 하거나
부재중인 희망도 달무리로 돌아오게 한다
그래서 침묵은 이다지도 낯선 것인가
누구나 한 번쯤은 뒤틀린 손금을 보고 진저리를 치겠지만
그리하여 지극히 간단한 보폭으로
악몽의 길고 긴 회랑을 빠져나오겠지만

나는 그때 얼마나 가득해진 모습으로
병약한 내 일생의 녹슨 고리를 벗겨낼 수 있을까
잘 영근 생각으로 선택의 생각을 공손히 다듬고
나를 가두고 있는 불치의 소문들도 떨쳐버릴 수 있다면
그때 내 사랑의 방법들은 좀더 구라파식으로

좀더 삼류적으로 비감해질 수 있을까
사나운 잠자리를 탓하지 않고
원색의 현란한 꿈의 밧줄에
내 사랑의 방법론을 매달 수는 없을까
_「불란서 영화처럼」 전문
저자

전연옥

1985년중앙일보신춘문예를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불란서영화처럼』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개정판시인의말

불란서영화처럼/멸치/굴비/내나이스물하고아홉에/솔베이지노래/제비붓꽃/불효/로맨스그레이/양파/영등포여자/유령/콜걸/첫사랑/실업/처세술/물위의집/나는그게우습다/안개/선운사/거미/한강엔나팔꽃/고추/연필/들러리/실연/김밥/프리댄서/노모/고백/클레멘타인/새우/청진동블루스/민달팽이/손금/마늘/메두사/내사랑도한편의시가되어/낙지/수제비/숨바꼭질/영천에가면/방게/시인,그리고쉬인/별/까치는참춥겠네/에디트피아프(?dithPiaf)/콩나물/사마귀/물잔디/바퀴벌레/빨래를하며/곤충채집/입영일기/하면된다/사랑니

출판사 서평

■기획의말

그리운마음일때‘IMissYou’라고하는것은‘내게서당신이빠져있기(miss)때문에나는충분한존재가될수없다’는뜻이라는게소설가쓰시마유코의아름다운해석이다.현재의세계에는틀림없이결여가있어서우리는언제나무언가를그리워한다.한때우리를벅차게했으나이제는읽을수없게된옛날의시집을되살리는작업또한그그리움의일이다.어떤시집이빠져있는한,우리의시는충분해질수없다.

더나아가옛시집을복간하는일은한국시문학사의역동성이드러나는장을여는일이될수도있다.하나의새로운예술작품이창조될때일어나는일은과거에있었던모든예술작품에도동시에일어난다는것이시인엘리엇의오래된말이다.과거가이룩해놓은질서는현재의성취에영향받아다시배치된다는것이다.우리는현재의빛에의지해어떤과거를선택할것인가.그렇게시사(詩史)는되돌아보며전진한다.

이일들을문학동네는이미한적이있다.1996년11월황동규,마종기,강은교의청년기시집들을복간하며‘포에지2000’시리즈가시작됐다.“생이덧없고힘겨울때이따금가슴으로암송했던시들,이미절판되어오래된명성으로만만날수있었던시들,동시대를대표하는시인들의젊은날의아름다운연가(戀歌)가여기되살아납니다.”당시로서는드물고귀했던그일을우리는이제다시시작해보려한다.

문학동네포에지3차분리스트

021고정희『누가홀로술틀을밟고있는가』
022남진우『깊은곳에그물을드리우라』
023전연옥『불란서영화처럼』
024이산하『존재의놀이』
025이선영『오,가엾은비눗갑들』
026전남진『월요일은슬프다』
027정끝별『자작나무내인생』
028신기섭『분홍색흐느낌』
029곽은영『검은고양이흰개』
030신동옥『악공,아나키스트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