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놀이 (이산하 시집)

존재의 놀이 (이산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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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제 저 강을 건너면 누가 나에게 저 푸르름에 대해 설명해줄까…… 날지 않는 새처럼 나는 법도 잊어버리고 울지 않는 새처럼 우는 법도 잊어버렸는데 새라면 좋겠네.
날개 없이도 날 수 있는 그런 새라면 새라면 좋겠네.
목 없이도 울 수 있는 그런 새라면 아- 그러나
저 설명 없는 푸른 강이라면 더욱 좋겠네. _「날지 않고 울지 않는 새처럼」 부분

나무는 잎을 떨어뜨리며 죽음을 연습하고
잎은 떨어지는 힘으로 삶을 연습한다.
헝클어진 뿌리들도 자세히 보면
그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그 어느 잔뿌리 하나 쓸모없는 게 있던가. _「나의 떨켜」 부분

이 웃기는 공범들의 집행유예는 언제나 끝날까?
하지만 공판은 언제나 다시 시작되었고
우리는 모두 ‘꿈 깨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였지만
익명의 벽 속으로 거세된 친구들은 우리들을 향해
이 개새끼들아, 웃지 말고 방구석에 처박혀 꿈이나 꿔!
아-
그러나 1980년 겨울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나에겐 차마 꿈꾸는 짓은 못했으니
꿈꾸면서 물방울처럼 숨쉴 수는 더욱 없었으니…… _「구토 1」 부분
저자

이산하

1982년‘이륭’이라는필명으로『시운동』에시를발표하며등단했다.시집으로『존재의놀이』『한라산』『악의평범성』이있다.2021년김달진문학상,이육사시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개정판시인의말

1부
사랑/이름없는풀/지리산천은사/날지않고울지않는새처럼/토지/열흘붉은꽃없다/고사목/소발자국/쇠똥구리/악몽/벼랑에서서/파리/하늘의밥상/매화꽃이보는곳을보라/물새/생은아물지않는다/어느여름날/살인현장/선운사동백꽃/태풍의눈/실상사가는길/나의떨켜/아프리카야생공원/덩굴식물/부화/어긋나는생

2부
등나무/꽃게는내려오지않을것이다/겨울포도밭/구토1/구토2/존재의놀이0/존재의놀이1/존재의놀이2

출판사 서평

1982년이륭이라는필명으로『시운동』에연작시「존재의놀이」를발표하며시단에나온이산하시인의첫시집『존재의놀이』를문학동네포에지24번으로새롭게복간한다.1999년8월문학동네에서『천둥같은그리움으로』로첫선을보였으나편집자와의착오로제목이바뀌어출간되었다.시집의제목을22년만에『존재의놀이』로바로잡는다.41편을수록한초판에서몇편을덜어내고2부구성에34편을실었다.1987년이산하시인은제주4ㆍ3사건을다룬장편서사시「한라산」의최종원고인서시를1987년3월『녹두서평』창간호에발표한다.당시까지4·3사건은남로당과불순세력이일으킨‘폭동’이었고이를진압하는과정에서민간인학살은정당했다는것이국가의공식입장이었다.이러한국가의언어에정면으로반기를든「한라산」은엄청난충격과파장을몰고왔다.출판사는‘초상집’이되고해당잡지의다른필자들역시대부분수배처지에놓이게된다.같은해11월이산하시인은‘한라산필화사건’으로인한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구속된이후절필하였다가11년만인1998년『문학동네』여름호에「날지않고울지않는새처럼」외4편을발표하면서다시작품활동을시작했다.
시집의1부는1998년봄에서1999년봄에이르는잔잔한시기에쓰인시들을묶었고2부는자신이출렁거렸던1977년봄부터1985년봄에쓴시들이라고시인은밝힌다.그잔잔함과출렁거림의사이가멀리서들려오는천둥소리처럼너무아득하다고(시인의말).도정일평론가는“80년대와90년대라는두시간대사이의높고어지러운낙차로부터나오는소리,그것이이산하의시”라고말하며“그의시에서우리는열정적영혼들이걸어온한시대의정신사를발견”할수있다고말한다.이문재시인은『존재의놀이』속대부분의시편들이80년대후반,한국시문학사에충격을던진미완의장시「한라산」이후십수년동안의공백기를거친다음에쓰여진것임을언급하며작고사소한것에서크고거룩한것들,죽음에서신생을찾아내끌어안는시인의크고넉넉한품에서“한알의밀알을태어나게하는한알의밀알”로서의‘순교’를본다.“‘꿈을깨지않는다’는이유만으로유죄가되는80년대적상황”에서이산하시인의절망은절대적부정으로자기긍정을시도하는한방법이었던것이다(최동호).
『시작』2020년여름호홍용희평론가와의대담에서이산하시인은등단작「존재의놀이」에대해이야기한다.삼중구조로이루어진이시는노란테니스공이네트를넘어가낙하하는그짧은순간을묘사한것으로그짧은순간에테니스공은현상과본질,존재와의식,현실과이상,개인과집단,창조와진화등의경계에서양극점을넘나들며자기를버리기위해맹렬히성찰한다.결국자기자신이단지하나의‘고무제품’에불과하다는사실을깨닫는순간,테니스코트바닥으로뚝떨어져버린다.시인은말을잇는다.글을쓸때늘기대는2개의슬로건이있다고.‘모든사유는뒤늦은사유(afterthoutght)’라는한나아렌트의말과‘언제나이미(alwaysalready)’라는데리다의말로이산하는이것이예술가가중력과광속에굴신하지않는출발점이라고본다.“사진을빛이찍듯시도빛이쓰는것을시인이란도구가대필해요.늘실패하면서도난그빛을이용해중력을이기는싸움을하고있지요.그것이존재의극점입니다.”(「저들은저들이하는일을모르나이다」,『시작』2020년여름)

포도주한병씩들고할아버지와나는포도밭으로갔다.
포도나무뿌리는아직도바다로뻗어등대까지이르고
그것은지난해보다더크게굽어있었다.
저녁이내릴무렵등대지기가보내온불빛아래에서
우리는포도주를마셨다.
할아버지는포도송이만바라보며따기를멈췄던예전처럼
조용히병을내려놓고점점깊어가는어둠만뚫어지게보았다.
하지만우리를덮고있는이어둠은
포도를따기전에도이미내려와있었다고말하고싶었지만
나는끝내입이열리지않았다.
깊어가는파도소리와함께어둠이조금씩짙어가지만
한동안씩은아무것도변하지않았다.

내가태어나기전그해초가을
파도가등대를덮자황소는포도밭으로달아났다.
황소발자국만한포도송이들이터져
포도밭이온통발효시킨포도주로뜨겁게달아올랐다.
물방울은땀방울을흘리고땀방울은핏방울을흘려
포도나무뿌리들은서로땅을움켜쥔채소용돌이쳤다.
온종일울어도목이쉬지않는어린아이처럼
할아버지의흐느끼는목소리위로무수히잎이내리고
그잎사이로아이들이촛불을켜고뛰어다닐동안
나는그의기억의강끝에이르는푸른물줄기의방향을돌려놓았다.
이제겨울포도밭은불꺼진성당처럼어둠속으로가라앉고
할아버지와난아직조금남은포도주를바다에뿌린다음
어둠밖으로걸어나오지만결코지난해의그어둠은아닐것이다.
_「겨울포도밭」전문

.■기획의말

그리운마음일때‘IMissYou’라고하는것은‘내게서당신이빠져있기(miss)때문에나는충분한존재가될수없다’는뜻이라는게소설가쓰시마유코의아름다운해석이다.현재의세계에는틀림없이결여가있어서우리는언제나무언가를그리워한다.한때우리를벅차게했으나이제는읽을수없게된옛날의시집을되살리는작업또한그그리움의일이다.어떤시집이빠져있는한,우리의시는충분해질수없다.

더나아가옛시집을복간하는일은한국시문학사의역동성이드러나는장을여는일이될수도있다.하나의새로운예술작품이창조될때일어나는일은과거에있었던모든예술작품에도동시에일어난다는것이시인엘리엇의오래된말이다.과거가이룩해놓은질서는현재의성취에영향받아다시배치된다는것이다.우리는현재의빛에의지해어떤과거를선택할것인가.그렇게시사(詩史)는되돌아보며전진한다.

이일들을문학동네는이미한적이있다.1996년11월황동규,마종기,강은교의청년기시집들을복간하며‘포에지2000’시리즈가시작됐다.“생이덧없고힘겨울때이따금가슴으로암송했던시들,이미절판되어오래된명성으로만만날수있었던시들,동시대를대표하는시인들의젊은날의아름다운연가(戀歌)가여기되살아납니다.”당시로서는드물고귀했던그일을우리는이제다시시작해보려한다.

문학동네포에지3차분리스트

021고정희『누가홀로술틀을밟고있는가』
022남진우『깊은곳에그물을드리우라』
023전연옥『불란서영화처럼』
024이산하『존재의놀이』
025이선영『오,가엾은비눗갑들』
026전남진『월요일은슬프다』
027정끝별『자작나무내인생』
028신기섭『분홍색흐느낌』
029곽은영『검은고양이흰개』
030신동옥『악공,아나키스트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