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가엾은 비눗갑들 (이선영 시집)

오, 가엾은 비눗갑들 (이선영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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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언제부터인가 나는 투욱툭 튿어지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내 몸의 어느 부분에서부터 그 튿어짐이 시작되었는지
나를 튿어지게 했던 최초의 충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의지해온 하나의 세계가 점점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 감싸안았던 그것은 유년의 작디작은 몸집이었다
그 몸집의 생존을 위해 마련된 여러 가지 소도구들 가운데 하나로서 비로소 나의 존재는 시작되었고
그때 이후 그 몸집은 내가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단 하나의 세계였다 그런데
한없이 늘어나려는 몸집의 제어되지 않는 욕망이 이제 나의 생존을 압박한다 _「튿어진 옷」 부분

슬프다 치통은 나를 가고 싶지 않은 치과에 가게 한다
벌리고 싶지 않은 입을 벌리게 하고 누구에게도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내 입안,
썩고 더럽고 보기 흉하고 이미 썩어 없어진 치아의 흔적마저 고스란히 싸안고 있는,
의 비밀이 들춰지고 내가 여지껏 잘못 살아왔다는 사실
내 육체의 일부분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불성실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들통나고 _「이 예기치 않은」 부분

비바 70미터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들고
허술히 굴러가는 휴지의 몸통과 아무 저항 없이 풀리고 찢기는
휴지의 살집이 가진 단순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말면 말리고 풀면 풀리는 헐값의 생 _「휴지 같은 이 인생」 부분
저자

이선영

1990년『현대시학』을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오,가엾은비눗갑들』『글자속에나를구겨넣는다』『평범에바치다』『일찍늙으매꽃꿈』『포도알이남기는미래』『하우부리쇠똥구리』『60조각의비가』가있다.김종철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개정판시인의말

1부
서른살을기다리며/짤랑짤랑흔들린다,내인생/헌구두를내려다보며탄식함/즐거운아침을!/나의아랫배이야기/책상위로고개를박다/새로운맛/잘못찍힌도장/기정사실/튿어진옷/이예기치않은/내안에는또하나의사람이/내손엔흠집이/나의게으른다림질/나의제작자와나/나무에게길을묻다

2부
막힌,혹은막히지않은하수구에대하여/60회정기권의가련한생을애도함/생각,그와의사랑/지갑에얽힌이야기/눈길을걸으며/열리지않는문앞에서/지붕이여,너무무겁다/4월의비는연약한사슴을죽입니다/당신의구혼에대하여/내서랍속의귤하나/유리병/주저함없는이입술로/두개의불행한손목시계에관하여/흘려쓴글자/손가락은한없이부드러워/나의벽을찾아서

3부
자동차와아버지/한여름오후를장의차가지나간다/지금나는/나목/오후4시의공원/휴지같은이인생/오,가엾은비눗갑들/쓰레기차는청소부를배반하기도한다/나의저녁식탁은/그집/역에서/다쓰여진치약에게/이가을의그카페앞/수저와어머니/검은색은때로내게공포를준다/더러운,아니,깔끔한,/나쁜꿈/내인생의벽보

출판사 서평

1990년『현대시학』을통해등단한이선영시인의첫시집『오,가엾은비눗갑들』을문학동네포에지25번으로새롭게복간한다.1992년10월세계사에서첫시집을묶었으니그로부터꼬박29년만이다.총3부,50편의시를실었다.1990년『현대시학』봄호‘시를찾아서’코너에서이선영시인은“‘나’라는철저한개인의식과내면의식을진술함으로써‘나’의세계와우주를조명하고주제의응집력을높여가는조사(措辭)가돋보인다”는평을받으며데뷔한다.민중이아닌개인의건강한정서로삶과세계에대한섬세한시각을보여줄90년대의새로운시인으로우리시의한영역을형성할중요한조짐을예고하면서.한국문학의지평에서80년대는우리에게무엇이었는지,문학은우리의삶과현실에어떻게대응할것인지가시인들에게다양한시적방법론으로나타나던1990년이었기에이념적이물질이끼어있지않은이선영의시는그자체로시를읽는즐거움과새로움의시학에서신선감을주었다(김종해).초판해설에서신범순은이선영의시들은그녀의삶이밟아온매우친근한것들의내밀한그림자들로덮인조그만둘레를갖고있다고말한다.그공간은자신의삶과죽음의얼굴들을만들어내고,그것에독특한의미들을새겨넣는장소이다.그것은시인이자신의일상속에서구체적으로체험한범주의가냘프고,단속적이며,불안한선들로자신의테두리를그려내고,그것을원환적으로닫으려시도하는,그러나언제나성공할수없는헛된순간들로이루어진다.이선영의시들을읽으면서독자는거품이모두제거된삶의잘게부서진파편들을만나게되며그러한것들은우리의열정과오만,환상과형이상학들이무너진자리속에흩어져있다.시인은우리존재의한없는일상적둘레들위에서가냘프게펄럭이는‘나’를부수고다시금마름질하면서어떻게살아가야하는지를매우섬세하게포착한다.그녀가살고있는이시적세계는이제까지의어떠한여성시인에게서도볼수없는독특한매력을발산하고있다(「연약한여성적둘레속의인생」).시인은말한다.첫시집은내시쓰기의영도,내시의DNA이자모든그다음시집들을위한금기라고.첫시집을다시읽는일은멜로이기이전에스릴러이지만세상의식탁에어엿이새로올려지게되어기쁠따름이라고.시인은당부한다.“오,가엾은첫시집이여!다시한번세상속으로들어가라.처음그때보다당당히기를펴고네언어들이가고싶어했던만큼갈때까지멈추지말아라.”(개정판시인의말)어떻게든돌아오고마는첫시집이라는애착과통점,그사랑과한계속으로들어가보자.

비눗갑속에담긴문드러진비누의몰골을볼때면
지금그비눗갑이느끼고있을슬픔을알것같다
누구에게나그렇듯대부분의새비눗갑들에
처음얹혀지는비누는탄탄한비누여서
보기에따라서는비누가비눗갑안에담긴것이아니라
비눗갑의숨통을누르고앉은것처럼보일지경이다
마침몸에잘맞는아내를얻은듯그때비눗갑은얼마나행복해보이던가?
그러나뭇사람의손때가묻고물만닿아도녹아나는비눗갑이일찍이상상해본적이없는비누의허약한체질은
얼마나비눗갑을놀라게하고실망에빠지게했을것인가?
나날이작아지는비누들나날이풀어지는관념의물컹한살집들
오,가엾은비눗갑들이여,그대들은비누에대해
얼마나순진한기대와어리석은집념을품고있었던가?
한개의비누만을담았던비눗갑이란이세상에선거의찾아볼수없다
더러,젊거나어린나이에,불의의사고로망가지는비눗갑은유감스럽지만흙속깊이버려지곤한다
경험이많은비눗갑들이여,온갖비누치레에닳아빠지고몸을더럽힌
그럼에도오래건재하는비눗갑들이여,그쯤이면평안할수있는건지
_「오,가엾은비눗갑들」전문

■기획의말

그리운마음일때‘IMissYou’라고하는것은‘내게서당신이빠져있기(miss)때문에나는충분한존재가될수없다’는뜻이라는게소설가쓰시마유코의아름다운해석이다.현재의세계에는틀림없이결여가있어서우리는언제나무언가를그리워한다.한때우리를벅차게했으나이제는읽을수없게된옛날의시집을되살리는작업또한그그리움의일이다.어떤시집이빠져있는한,우리의시는충분해질수없다.

더나아가옛시집을복간하는일은한국시문학사의역동성이드러나는장을여는일이될수도있다.하나의새로운예술작품이창조될때일어나는일은과거에있었던모든예술작품에도동시에일어난다는것이시인엘리엇의오래된말이다.과거가이룩해놓은질서는현재의성취에영향받아다시배치된다는것이다.우리는현재의빛에의지해어떤과거를선택할것인가.그렇게시사(詩史)는되돌아보며전진한다.

이일들을문학동네는이미한적이있다.1996년11월황동규,마종기,강은교의청년기시집들을복간하며‘포에지2000’시리즈가시작됐다.“생이덧없고힘겨울때이따금가슴으로암송했던시들,이미절판되어오래된명성으로만만날수있었던시들,동시대를대표하는시인들의젊은날의아름다운연가(戀歌)가여기되살아납니다.”당시로서는드물고귀했던그일을우리는이제다시시작해보려한다.

문학동네포에지3차분리스트

021고정희『누가홀로술틀을밟고있는가』
022남진우『깊은곳에그물을드리우라』
023전연옥『불란서영화처럼』
024이산하『존재의놀이』
025이선영『오,가엾은비눗갑들』
026전남진『월요일은슬프다』
027정끝별『자작나무내인생』
028신기섭『분홍색흐느낌』
029곽은영『검은고양이흰개』
030신동옥『악공,아나키스트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