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유태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유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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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 검음, 나의 그림자를 너라 부를까”
고유의 욕망과 한계를 지닌 죽음을 모르는 말들
생의 원초적 활력이 그려내는 압도적인 이미지
관념의 영역을 넘어 실체를 가진 존재로서 물질세계에 들끓고 있는 언어의 박동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문학동네 시인선 161번, 김유태의 첫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고유의 욕망과 육체를 지닌, 죽음을 모르는 말들이 도사리고 있는 소요의 장이다. 그의 시들을 일러 ‘림보로의 초대’라고 한 문학평론가 이철주의 표현을 빌리면 김유태의 시는 “정신의 투명한 거울인 줄 알았던 문자가 어느 날 문득 낯설고 생경한 눈빛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순간을, 읽을 수 없는 몸을 지닌 관념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경악스러운 순간들을 매개하고 촉발한다”. 이 시집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목소리인 ‘시인의 말’에서 시인이 “나의 사랑은 불안이다. 내 눈동자에 짓는 공화국의 율서는 불온한 잠언으로 읽히기를 희망한다. 읽을수록 의지를 상실하는 위험한 외경 한 권이 나의 온몸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그대로,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에는 우리의 존재를 저 기저에서부터 뒤흔들 준비가 되어 있는, 위태로운 활력과 에너지로 끓어넘치는 44개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

김유태

1984년서울에서태어났다.서울대학교국어국문학과를졸업했다.2018년『현대시』를통해등단했다.시집『그일말고는아무일도일어나지않았다』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빈방을찾고있었다
임차/낙관(落款)/죽지않는마을/샬레/오래된감염/검은원/검은원/임시가설통로/물의자막/검은원/죄의페이지

2부흰뼈같은꽃이핀다
Pierrot/파양/버드스트라이크/안구건조증/타르/폐원/하나의작은균열/나의갠지스/추상13/검은원

3부앙장브망
Pierrot/사인칭(四人稱)/로미오포인트/피와촛불/앙장브망/기만하는거울/검은서사/선(線)의세계사/예기불안/목욕하는도모코우에무라/나무화석/나스카라인

4부우리의혀를태워떠나보내네
슬픈레시피/십일월/무국적체류자-북양에서/무국적체류자-남양에서/프랙털/것들의역사/거울과거푸집/아무도보지못한숲/심장의편자/검은원/섬망

해설|림보로의초대|이철주(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기린의뿔이떠다니는방에당신이세상에서가장오래냈던음이지나가는중이었고복도는기억과후회로쌓아올린벽이었다마침내인기척이없고뒷모습과기린의그림자가없고나무도없는빈방을찾아냈을때집주인은부러진열쇠를건네며말했다지나왔던모든방이빈방이었다고여러개로쪼개진모든방은시간으로꿰매진하나의같은방이었다고입관이곧시작된다고
_「임차」부분

시집의서두에놓인「임차」에서우리는여러차례감각의전복을경험하게된다.“일사분란하게모여”드는그림자와“알비노기린한마리의털을몽땅잘라만들었다는붓”으로그림을그리는화가의이미지에서느껴지는색채의낙차,“당신이세상에서가장오래냈던음”과“인기척이없”는방에서느낄수있는소리의낙차.그리고이처럼환상적이고불가능한감각의전복속에서실은“지나왔던모든방이빈방”이었으며“모든방은시간으로꿰매진하나의같은방”이었다는고백과함께우리는공존하는삶과죽음,혼재하는시간과공간을맞닥뜨린다.이시에서엿볼수있는것처럼앞으로펼쳐질시들의화자들은살아있지만죽은,죽었기에더생생히살아있는존재의양극단사이에서삶속의죽음을,죽음속의삶을동시에호흡한다.

어두울수록선명해지는검음,나의그림자를너라부를까

덜아문칼자국같은달
밤새펄펄끓던이마를우리는숨긴채
방금버려진꽃을무덤가주변에서한다발씩주우며

무릎을굽힐때마다,서로같은모양이던검은멍을우리는함께문지르면서
_「검은원」부분

죽음의죽음을이제야알았다는듯,인간이란탄원서는언제나별아래에서울지

나도서둘러죽음곁에앉아울어버렸다
_「검은원」부분

형상은수면아래로잠기는한쪽귀와
아직잠기지않은세상의눈을요구한다반쯤얼굴을내민사과는죄인의심장소리를들려준다

빛과소리사이를흘러가는강
물의잔해로모여드는흰사슴떼
_「검은원」부분

시집에는「검은원」이라는제목을가진시가다섯편수록되어있다.러시아의화가카지미르말레비치의동명의그림에서영감을받아탄생한이「검은원」연작은추상회화가매개하는이미지들의물성을시적으로전유한시도라고볼수있을듯하다.시인은거대한관념의중력에무감한일상의감각과언어를정면으로충돌시킴으로써관성에젖은말과이미지들의외피를산산이부서뜨리고,채꺼지지않고남아있는오래된말들의불씨를읽는이의맥동과숨결속에뜨겁게옮겨놓는다.

죽어가는새의명멸을천천히확인하는일

새의뼈에일부러찔려
뼈에새겨진이름을단한번만더듬곤했던일

함께어둡게죽고
다시햇빛에깨어이름을잃고바다에서는일

그런일말고는아무일도일어나지않았다
_「죽지않는마을」부분

시집의표제를제공한이시에서“함께어둡게죽고/다시햇빛에깨어이름을잃고바다에서는일”이라는구절은쉽게잊히지않는다.시의화자가“내가잊은나의이름하나를찾으러”“종말의바다”에왔다는점을상기하면더욱그러하다.다른아무일도없이오직일어난일은“뼈에새겨진이름을단한번만더듬”고는다시햇빛에깨어이름을잃고바다에선것뿐이다.이는시적언어를통해삶을구성하는관념적실체들을탐지하고자하는시도의반복처럼보이기도한다.잠시더듬고잃어버리는것이우리가할수있는,일어날수있는유일한일이라는말.이러한반복이시인의운명그자체가아닐까.어쩌면김유태의시를읽는일도그럴것이다.그의시들은쉽게읽히지않는다.때로는어둡고때로는무겁다.그러나그만큼뜨겁고에너지로끓어넘치는그의시들은때로우리를어둠의심연속으로,하얀극지로안내한다.우리는그의시들을읽으며그안에서일상의표면에드러나는불온한순간들을마주칠것이다.정신으로서의언어와신체로서의언어사이에서단한번도제대로말해진적없는울음들과함께걷고흔들릴것이다.심연으로부터온불길한화인들과마주할것이다.그리고그섬뜩하고불가해한눈빛들에기꺼이응할것이다.그런일들말고는아무일도일어나지않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