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 문학동네시인선 165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 문학동네시인선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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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씨익 웃고, 버르장머리 없이 살아야지”

마녀의 식탁 위에서 손길을 기다리는 폭력들
잘게 짓이겨져 내일의 달콤한 케이크가 되고
문학동네시인선 165번으로 박세랑 시인의 첫 시집을 펴낸다. “치열하게 아프고, 천진하게 탄력이 있는 독특한 매력”(박상수)을 뽐내며 2018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한 박세랑은 “바닥을 쳐본, 심리적 주관성을 가진 명랑우울마녀”(이원)로서 세계에 편재한 폭력과 개인의 고유한 우울을 명랑하게 밝혀왔다. 시집 속 화자들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로 폭력을 발랄하게 채색한다. 다채로워진 폭력은 그 존재를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도드라지고, 이어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삼켜진다. 그처럼 박세랑은 여성들이 혼자 겪고 감당해야만 했던 상처들을 언어화하는 가운데 피해를 피해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폭력의 피해자들이 끝내 집어삼켜지지 않은 채 도리어 폭력을 집어삼키는 존재로 거듭나는 새로운 주체성과 권능의 비약을 주조해낸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어이 발설하기 위해서 뾰족하게 깎아지른 손목으로 나는 또박또박 상처를 기록합니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존재들만 골라가며 사랑했어요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불쌍해서 좀 안아줬더니 결국엔 뺨을 치고 주먹을 날리던걸요
_「누가 너를 이토록 잘라놓았니」에서
저자

박세랑

저자:박세랑
2018년『문학동네』를통해등단했다.그림책으로『울퉁불퉁구덩이』『라면머리아줌마』『깔깔주스』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살아본적없는내미래를누가부러뜨렸니?
마녀의거울/뚱한펭귄처럼걸어가다장대비맞았어/굴러라,사과/눈높이선생님/인형병원/바가지머리/빗자루/벼랑/알리바이/먹으면연필이되는바나나/쭈쭈바를빨면서/기념일

2부갖고놀다쉽게버릴수있는일회용장난감만만나야지!
토스터에서식빵대신주먹이튀어오르던날,마녀는오이를썰어피클을담갔지/한남동17-7번지현대나주택301호저녁밥상은누가차렸나/밤길/진화하는영혼/형벌/대면/분리수거의달인/누가너를이토록잘라놓았니/옥상난간에서떨어진바람한짝을주웠을때/파란말/액자/미미의우아한디저트/아름다운과거

3부굴러다니는깡통처럼신나게밑바닥을보여줘야지!
뾰족한지붕들이눈을찌르고귀마개를뺐더니아무도나한테말을안걸고/프랑켄슈타인의인기는날마다치솟고너희는약맛을좀아니?/다짜고짜키티가좋아서인형뽑기하러다같이갈래?/모자가잡아먹는다/데이트/붉은솥단지/딸기와고슴도치/독수공방실수같은세모씨/예쁜쓰레기/층층기린을어떡할까요?/내가공짜여서사랑한거니?/목소리/고백하던날,딸기크림케이크에얼굴을박은채로울지않았어/풍선크게불다가/삼각김밥머리

4부털어서먼지안나는개가어디있는데?
빨랫줄에걸렸네/리락쿠마와함께한여름방학/중력의법칙/외톨랜드/만두가좋다/지각한날/뒤에서오는여름/예쁜유리였을때/헌옷수거함에버려진얼굴들빨아서재활용해요/줄무늬효과/이후

해설|얼굴없는마녀의치욕요리법
이철주(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시집에서가장먼저눈에띄는것은피해의가감없고솔직한기록일것이다.연인과가족같이가까운사이에서부터가로등밑과골목,또는대로변에서익명의다수가당당히벌이는무수한여성혐오와가해는여전히덜말해지고있다.“진창이랑누명이랑친구먹었어”(「예쁜쓰레기」)말하는화자는간명하고유쾌한표현으로비참한심정을담아낸다.‘진창’과‘누명’을끝내견디지못해사라져간이들은아직도어딘가에닿지못한채떨어지고있고,그들의“끝없이이어지는추락을멈출수가없어서”(「옥상난간에서떨어진바람한짝을주웠을때」)박세랑은“사라진것들이제자리를찾을때까지”“스티커인형놀이”(「눈높이선생님」)를한다.“맞아도꿈적안하니까날아오는돌덩이들”(「인형병원」)사이에서폭력의고발자는두렵지않을수있을까?하지만누군가는시작해야만하기에박세랑은내밀하고,깊게새겨진만큼더치명적인상처를꺼내놓는다.

나는왜뒤통수를아무한테나맡길까……웃고떠들고몰려다니다보면뒤통수는왜남아나질않는걸까문은계속해서열려있는데누군가를믿으려면힘이있어야하는데……
거울속에서

우뚝솟아오른담벼락을본다

무너지고싶어간신히등을비틀어보면,언니는중화제를뿌린다전염되면소매끝에악몽을대롱대롱매달게될까봐
_「빗자루」에서

그러나이해를갈망하며꺼내놓은기록들은타인의,심지어친구와가족들의한낱유흥거리가된다.불법촬영영상이인터넷을통해쉽사리퍼지고,그누구도피해자에게는관심이없는채“유출된여자의몸을포르노처럼/동시상영하는속보들”(「대면」)과같은이차가해는도무지멈출기미가없다.연인에게데이트폭력을당했지만“소문과수다의맛에중독된친구들”에게“부스러기까지핥아먹”(「분리수거의달인」)히고말거나,“앞니가두개나달아난”‘나’를‘엄마’는“냄새를맡고뛰쳐나와/불심검문처럼내몸을구석구석더듬”고잡아먹으려고한다.그저“숨겨오던불온한상처들에대해서한번쯤은온전히이해받고싶었”(「아름다운과거」)을뿐이지만,“남의고통은문장으로부터최고로인기가많고”(「뒤에서오는여름」),언제나배반당하는혼자에게이해는기만의다른얼굴이라“사람이하는말을믿지못해서/거울속에있는자신도믿지못하고”(「파란말」)만다.

비슷한아픔이있어서겪은일이많아서우리는한데모여들었지여기최초의목소리가발생한지점으로분리수거된여자들이더크게몰려들고있다붕대처럼칭칭감긴길을풀어헤치자곪아터진상처들이보도블록처럼튀어오르고급정거하던차들이추락하게끔도로의허리가끊기고있다길가에쏟아져나온일회용접시들망가진옷걸이들코르크마개들이무리지어힘껏날아오른다날갯짓을흩뿌리듯이밤길을뒤덮으며앞으로앞으로뻗어나가면

너희는무서울정도로아름다워
닿은이빛이세상의싸늘한호의라해도

고장난가로등불빛들이하나둘켜진다
_「밤길」에서

안팎의억압에도화자들은“나는얼굴한두개쯤은/더깨져도안아픈데”(「마녀의거울」)말하며수차례덧씌워진피해와각인되어버린고통,그리고피해자정체성으로옭아매는시선으로부터벗어나는균열을드러내보인다.“약국가서망가진얼굴이나치장해야지/뒤뚱뒤뚱잘못걸어야지”(「뚱한펭귄처럼걸어가다장대비맞았어」)와같이평서문이아닌의지로쓰이는서술어와,“씨익웃고,/버르장머리없이살아야지”(「바가지머리」)다짐하는발화는입꼬리에매달린쓰디쓴맥락을흘려보내고스스로를사랑하기시작하는순간으로읽을수있을것이다.“여자밖에팰줄모르는”남편을병에가둬놓고“찢긴자국과멍든개수만큼위자료를두둑하게챙겨서”(「토스터에서식빵대신주먹이튀어오르던날,마녀는오이를썰어피클을담갔지」)떠날‘마녀’의내일은파도의빛깔로얼마나찬란할까?“똑바로걸어갈거야/마주쳐도못알아보도록점점멀어질거야”(「내가공짜여서사랑한거니?」)결심하고걸어가는그의자유로운뒷모습은새로운주체성의방향을발자국으로가리킨다.

박세랑의시가보여주는경쾌함과뜨거움은상처와치욕의늪에결단코삼켜지지않으려는매번의안간힘과불굴의용기로부터비롯된다.치욕에으깨어진몸을반죽해끈적끈적한디저트로구워냄으로써아직채끝나지않았던폭력의식사에안녕을고하고,오욕에짓밟힌얼굴과몸을더당당히드러내고자신만의고유한식욕에도달하기위한시큼한애피타이저를한가득발명해냄으로써상처의심연에오래도록정박해있던삶의중심을고착된경계의바깥으로조금씩옮기기시작한다.
_이철주해설,「얼굴없는마녀의치욕요리법」에서

박세랑의화자는혼자떠나지않는다.언제나혼자였지만,혼자에게유독살깊숙이박혔던상처를알기에그는혼자들과함께떠나고자한다.물론삶을향한의지는스스로발생하여자급자족하지는않는다.하여,시인은혼자들이서로돌보고여럿이되는모습을그리며그들이완전히꺾이지않도록붙든다.“기억할거야절대로기억할거야”말하며“찢겨나간장면을온몸으로꾹꾹눌러박는”‘나’는“겪어보지않으면전부남의고통인거지?”되물어유독약자에게엄혹한“사방”을“얼음처럼녹아내”(「벼랑」)리게한다.바로“살아날뛰던상처들이큰목소리로//아직덜깨어난상처들을흔들어깨우고있”(「진화하는영혼」)는풍경이다.박세랑은“사랑하던사람은자꾸만살고싶지않다고했다살아가는건끝끝내죽음으로자신을내모는일인걸까”(「액자」)곱씹으면서도,“찢긴자리가얼마나쓰라린지”아는“찢겨본자”의언어를발명해내고,‘벼랑’에몰린혼자들에게“붙들어야해상처이후의삶을”(「이후」)하고간절히당부한다.그러므로박세랑에게이르러시는혼자들의오늘을내일로이어주는안부이자연대의목소리가깃드는장소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