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 산책

선릉 산책

$14.00
Description
“흔들흔들 걷는 엄마가 찍어놓은 발자국에 발을 포개어 걸었다.”
홀로 혹은 함께 걸으며 해답 없는 문제에 골몰하는 인물들
이번 작품집의 또하나의 특징은 편편에서 만날 수 있는 ‘걷는 인물들’이다. 인물들은 홀로 혹은 함께 걸으며 해답 없는 문제에 골몰하거나, 대화를 나누며 다 알 수 없는 진실/진심에 가닿고자 애쓴다. 표제작 「선릉 산책」은 발달장애 청년 ‘한두운’과 높은 시급의 알바가 절실한 청년 ‘나’의 하루를 담았다. ‘나’는 ‘한두운’과 하루를 함께하며 그의 자해 방지용 헤드기어와 무거운 책가방을 벗겨주고, 그에게 놀라운 암기력과 권투 실력이 있다는 것도 발견한다. 여기서 소설이 끝났다면 소통 불가한 상대와의 관계에서 얼핏 엿본 교감의 순간들 같은 말로 포장되었을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보호자로부터 추가로 세 시간을 더 부탁한다는 연락이 온 순간부터 흐름이 바뀐다. 이후의 시간에 벌어진 일들은 두 사람 사이의 필연적인 거리를 확인시켜주며 결국 ‘나’는 무력해진 모습으로 그 산책을 끝낸다. ‘모르겠다’, 속으로 반복해 말하며, 다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을 어쩌지 못하며.

어쩌면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솜씨 좋은 작가처럼 거짓을 진짜처럼 혹은 진실을 가짜처럼. 영혼은 편하게 침대에 눕혀놓고 하루종일 내 손을 잡고 유령처럼 산책하다 집에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모르는 일이니까. (…) 오늘 만난 한두운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정말 권투를 배운 걸까?
저자

정용준

소설가.현재서울예술대학교문예창작학과교수로재직중이다.2009년[현대문학]신인추천으로등단하였다.저서로소설집『가나』,『우리는혈육이아니냐』,『선릉산책』,장편소설『바벨』,『프롬토니오』,『내가말하고있잖아』,중편소설『유령』,『세계의호수』등이있다.젊은작가상,황순원문학상,문지문학상,한무숙문학상,소나기마을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두부
사라지는것들
선릉산책
두번째삶
이코
미스터심플
스노우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어디로가야할지도모르겠다.돌아갈수도없다.여기까지어떻게왔는지도모르니까”
남은자’들에의한,‘남은자’들에대한소설,
실패와상실의경험이후계속사라지는/살아지는삶

‘남은자’들에의한,‘남은자’들에대한소설.이번소설집을관통하는축가운데하나이다.돌이킬수없는실패와상실의경험이후에도계속살아지는삶.‘왜그런일이일어났을까?’라는질문에어떤대답도찾지못한이들에게‘회복’이란쉽게가능할것같지않다.
「사라지는것들」의‘성수’는끔찍한사고로어린딸을잃었다.그후삶은모르는것투성이가되었다.그런그에게도아는것이하나있으니,“그만살기로했다”고아들에게선언하듯말하는그의어머니가그마음을바꾸지않으리란것.“안다.마음먹은사람에게그런마음을먹지말라고하는게얼마나의미가없는지.처음부터그런마음을못먹게했어야지.먹은마음을사라지게할수는없다.”소설은이두모자가강화도로즉흥적으로떠나는것으로시작한다.

내삶은왜이럴까.이유를생각해본적도있었어.죄가있었겠지.운이없었겠지.실수를했겠지.나쁜선택을했겠지.누가나를미워하는거겠지.하지만모르겠더라.극복해보려애썼는데뭘어떻게극복해야하는건지몰라아무것도못했다.그후로모든게다치욕이었다.아무일도없었다는듯뻔뻔하게사는것도.따뜻하지도않고차갑지도않은미지근한분위기도.화를내지않으려고전력을다하는해인엄마를보는것도.이제날좀내버려둬라.그만.그만하고싶어.피곤해.너무피곤해.
_57쪽,「사라지는것들」에서

남은자들은스스로를괴롭히고서로를괴롭힌다.납득될수없는죽음에대한애도에끝이없기때문이다.“너무피곤”한이삶을어떻게이어나갈것인가.실패와상실의이야기가소설에서낯선것은아니다.그러나무엇에대한실패이며왜상실했나,에방점을찍기보다그후의시간이감당할수없는피로감으로남은자를무력하게하는이야기는드물다.절망과체념의다름이름으로써의이피로감은읽는이에게고스란히전달되는감각으로,인간에대한작가의깊은이해가바탕되었기에가능하다.특히이피로감을호소하는주체가어머니라는점도주목할만하다.‘인내하고감내하는모성’대신자기목소리로직접‘자기삶에대한혐오를발화하기로택한’어머니는한국소설에서그간보기어려웠으므로.
「미스터심플」은치명적인상실후견고한상처에갇혀있던두인물이중고물품직거래플랫폼에서알게되어몇차례‘거래’하는과정을담았다.“자신에게조차진짜마음을내보이는것을두려워하”는인물들이,“좋아지는것을원하면서,좋아지는나자신은원하지않는”,그렇게스스로를벌주듯살아가던인물들이우연한만남을통해자기안의슬픔과비로소대면하게된다.
한편「스노우」는‘장소’를잃은사람의이야기이다.종묘해설사‘이도’는예기치못한대지진으로자신의일터였던종묘를화재로잃었다.숭고한무언가가완전히사라져버렸다는데이도는괴로워한다.한편같은곳에서야간경비원으로일하는‘서유성’은“기억하는이들이있고중요하게여기는이들이있는한어쨌든복구될거고다음세대로전승”되리라믿는인물이다.

“아……그걸뭐라고설명해야할까요.그런데말이에요.그설명할수없는감정이꼭장소인것같다니까요.그기분과그느낌이종묘라는생각이들어요.갈수도있고머무를수도있고볼수도있고그래서묘사할수도있는곳.”
이도는별다른대꾸를하지않고감정이장소인것같다는서유성의말을곱씹었다.감정이장소다.감정이장소다.그곳엔여전히어둠이있고고요가있고스노우도있고서유성도있고미안함도있고분노도있고그리움도있다.하나마나한생각이지만그런연쇄되는생각들이좋았다.
_263~264쪽,「스노우」에서

“모두에게일어난비극이었지만내용과상실의감각은제각각이었다.”그비극에대처하는방식또한그렇다.텅빈곳에분명히존재하는‘있음’들.그힘은어쩌면생각보다셀지도모른다.


“흔들흔들걷는엄마가찍어놓은발자국에발을포개어걸었다.”
홀로혹은함께걸으며해답없는문제에골몰하는인물들

이번작품집의또하나의특징은편편에서만날수있는‘걷는인물들’이다.인물들은홀로혹은함께걸으며해답없는문제에골몰하거나,대화를나누며다알수없는진실/진심에가닿고자애쓴다.표제작「선릉산책」은발달장애청년‘한두운’과높은시급의알바가절실한청년‘나’의하루를담았다.‘나’는‘한두운’과하루를함께하며그의자해방지용헤드기어와무거운책가방을벗겨주고,그에게놀라운암기력과권투실력이있다는것도발견한다.여기서소설이끝났다면소통불가한상대와의관계에서얼핏엿본교감의순간들같은말로포장되었을이야기일것이다.그러나보호자로부터추가로세시간을더부탁한다는연락이온순간부터흐름이바뀐다.이후의시간에벌어진일들은두사람사이의필연적인거리를확인시켜주며결국‘나’는무력해진모습으로그산책을끝낸다.‘모르겠다’,속으로반복해말하며,다정리하지못한감정들을어쩌지못하며.

어쩌면그의삶은오해되고왜곡되었는지모른다.아니,우리를속이고있는지도모르지.솜씨좋은작가처럼거짓을진짜처럼혹은진실을가짜처럼.영혼은편하게침대에눕혀놓고하루종일내손을잡고유령처럼산책하다집에돌아간것일지도모른다.아닌가.하지만그럴수도있지.모르는일이니까.(…)오늘만난한두운은도대체어떤사람이었나.정말권투를배운걸까?
_108쪽,「선릉산책」에서

「이코」의‘주우’와‘미이’도함께걷는다.틱장애로괴로워하던‘주우’는스스로말문을닫아버렸고,‘미이’는학창시절‘주우’의유일한친구였다.두사람은함께도시의이곳저곳을말없이걷는다.“초조하지도답답하지도않은침묵.편하게주고받는대화를능가하는자연스러움이녹아있었다.”「두번째삶」의‘준범’은남한강산책로를혼자걸으며그강어딘가에유골이뿌려진‘지운’을생각한다.학교폭력가해자로지목되어십년형을살고나온‘준범’은자신을‘악마’로만든동급생‘한준일’을생각한다.나쁜짓을저지른사람과,나쁜짓을저지르도록만든사람사이의복수와단죄란어떤식으로가능할것인가.「두부」의화자‘나’는자신이잃어버린반려견‘두부’와꼭닮은개와줄을잡고함께걷는남자의뒤를따라걷는다.‘두부’는어머니가돌아가시고사라졌었다.
이렇듯인물들이내딛는여정에따라이야기가흘러간다.그길의끝에해결이나회복같은손쉬운해답은허용되지않고,다만“(엄마가)오른발을디딜때마다오뚝이처럼십오도쯤몸이기울었다.흔들흔들걷는엄마가찍어놓은발자국에발을포개어걸었다”(「사라지는것들」)거나,“두사람의것으로보이는발자국이찍혀있었고작은발자국에발을맞춰걸었다.(…)걷는동안미스터심플의호른연주를떠올렸고멜로디그대로허밍을했다”(「미스터심플」)거나하는식의앞선이의발자국에내발을포개어보는일정도.그러나부서지고무너진누군가가자기만의슬픔을묵묵히걸을때그뒷모습을지켜보고손을흔드는일정도만으로도어쩌면그의삶이증인이되어줄수있지않을까.서서히,슬픔을슬픔아닌쪽으로보내주는조용한산책의시간들이쌓여“아무변화도없지만그사이시간이흐르고종종기분도마음도나아지는밝은밤들”(‘작가의말’에서)이찾아오게되리라.


<책속에서>
하지만문제는두려워하는것이무엇인지모른다는거였다.나는무엇을두려워하길래언젠가그것이찾아오리란생각에서이토록벗어나지못하는걸까.그래서일단애썼다.방어적으로살았다.사건하나,갈등하나가뭔가를일으킬거라고생각했다.그래서그것을걱정하고대비하며지냈다.하지만지금은안다.어떤일때문에무너지는게아니었다.일이일어나지않게버티는힘으로무너지는거였다.안에서밖으로점점갈라지다가스스로무너지는초라한집한채.그래서누구를탓할수도없는어리석은삶.
_59쪽,「사라지는것들」에서

“넌몰랐지?왜울었겠어?널친구라고생각했으니까.배신당한아픔이주먹으로맞는것보다더아팠던거야.그런데너도똑같네.걔를친구로생각하고있는거야.그래서네가아직까지걔를생각하는거야.걔이름도아는거고.난기억도안나.그래서네가더많은벌을받은거야.맞는건아무것도아니거든.피도멈추고멍도사라지고뼈도붙어.그런데네가한짓은회복이안돼.사람을죽이거든.”_144~145,「두번째삶」에서

천막한쪽구석에서팽이를만지작거리는주우를보는미이의마음이복잡했다.하도만져이제는까만보석처럼변한한토막의나무를주우는부적이라했고친구라고했으며충격을막아주는쿠션같은것이었다고했다.왜너는부적이필요했을까.왜쿠션같은것이있어야만했을까.나외에는친구가아무도없었던걸까._170쪽,「이코」에서

세탁과건조에각각삼십분.짧지만순도높은시간이다.잘읽히고잘써진다.활자가눈을통해뇌로바로인쇄되는것같다.생각과이미지는막힘없이단어와문장으로번역된다.하지만이상하지.여기에오면좋을걸알면서,이렇게써지고읽게될것을알면서,안오게된다.아니,그래서안오는것일지도.좋아지는것을원하면서,좋아지는나자신은원하지않는마음.지친다.지겹고.
_199쪽,「미스터심플」에서

나는내삶에서뭘배웠나.무엇을알고있나.그래서얼마나,얼마큼,표현할수있나.솔직하게?순간마음을뚫고무엇인가가지나갔다.국수를먹으려다젓가락을움켜쥐었다.얼마나힘을줬는지관절마디가하얘졌다.그순간내표정에서무엇이보였던걸까.그가내눈치를살피는것이느껴졌다._217쪽,「미스터심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