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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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희덕 시인의 세번째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를 문학동네포에지 43번으로 다시 펴낸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간명하고 절제된 언어”(김진수)로, 그러나 커져가는 세계의 균열을 결코 보아 넘기지 않는 강건함으로 달려온 그다. 오래 사랑받았고 여전히 생생한 이 시집을 다시 펴냄은 서정마저 불온하다 의심받는 지금의 시대에 ‘제 단단함의 사슬’로 지켜온 그의 엄격이 기실 안는 품임을, 잡는 손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일이다.
저자

나희덕

1989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등단했다.시집으로『뿌리에게』『그말이잎을물들였다』『그곳이멀지않다』『어두워진다는것』『사라진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돌아오는시간』『파일명서정시』『가능주의자』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개정판시인의말

1부그때나는괴로웠을까행복했을까
천장호에서/오분간/그곳이멀지않다/푸른밤/그때나는/탱자꽃잎보다도얇은/벗어놓은스타킹/구두가남겨졌다/칸나의시절/품/열대야/누에/시월/만삭의슬픔

2부빚도오래두고갚다보면빛이된다는걸
고통에게1/고통에게2/때늦은우수(雨水)/빚은빛이다/마음,그풀밭에/내속의여자들/밤길/웅덩이/어떤항아리/그러나흙은사라지지않는다/길속의길속의/밀물이내속으로/또하나의옥상/귀여리에는거미줄이많다/이끼

3부가장지독한부패는썩지않는것
속리산에서/뜨거운돌/계산에대하여/누에의방/마지막양식/그골목잃어버리고/황사속에서/부패의힘/가벼워지지않는가방/종점하나전/활주도없이/손의마지막기억/성공한인생

4부모든존재의소리는삐걱거림이라는것을
포도밭처럼/거리/쓰러진나무/복장리에서/나뭇잎들의극락/대동여지도는아니더라도/저자리들/왜/사랑/밥생각/소리들/사흘만/새떼가날아간하늘끝/발원을향해/그이불을덮고

출판사 서평

새로산가방에이끌려돌아오는길
혁명은안되고나는가방만바꾸었지만
공허의무게는가벼워지지않는다
그무거움이마음의굳은살을만든다

그걸알면서
또헛되이가방을살것이다
채울수없는빈방을내안에들여놓는일처럼_「가벼워지지않는가방」부분

시인은신음하나고통을토로하지않으며,세계를재단하는대신내부를가다듬는다.그래서25년전의시집을다시돌아보는지금스스로를가만히위로하게도된다.“그때의나는왜탱자꽃잎처럼얇은마음을찔리면서/비명도지르지못하고한줌의재와침묵을쥐고있었던것일까”(개정판시인의말).그가품은것은“누구를벨수도없는칼날”이면서정작“내속의칼날에마음을자꾸베이는”유일한이는시인자신인까닭이다.그렇게기꺼이울음을먹고칼날을삼킬때이고통스러운자기경신은외부를외면하지않으려는의지이며,그렇게시인에게“사랑이란고통에관해말하지않는방법”(황현산)이다.

꽃들을지키려고탱자는가시를가졌을까
지킬것도없이얇아져가는나는
내속의칼날에마음을자꾸베이는데
탱자꽃잎에도제가시에찔린흔적이있다

침을발라탱자가시를손에도붙이고
코에도붙이고놀던어린시절
바람이와서탱자가시를가져가고살을가져가고

나는어제보다얇아졌다
나는탱자꽃잎보다도얇아졌다
누구를벨지도모르는칼날이
하루하루자라고있다_「탱자꽃잎보다얇은」부분

슬픔속에서그사연을풀어내지않으려는침묵,고통을말하지않는시인은대신기다림의의지를결연히할뿐이다.너의이름은“헛되이던진돌멩이들”이되어새떼대신메아리만날아오르는데(「천장호에서」)“너는정작오지않”는다(「고통에게1」).그러나이삼킴,이절제의밑바탕에‘견고함에의의지’가있다면그의부단한헛발과헛걸음조차끝내‘너’에게로향해있는까닭이다.“너에게로가지않으려고미친듯걸었던/그무수한길도/실은네게로향한것”이라,끝내“나의생애는/모든지름길을돌아서/네게로난단하나의에움길”(「푸른밤」)이었음을고백하듯이.
시인은시의슬픔을마른폭포,건천에서들려오는소리에비유한바있다.그것은또한“채탄되지못한슬픔”(「때늦은우수(雨水)」)이고“얼어붙은호수”일테다.“불빛도산그림자도”“아무것도아무것도품지않는다”(「천장호에서」)말하였으나그렇게단단하게침묵함은기어이들려오는세계의소리에귀기울이겠다는의지가된다.스스로를옭매는사슬이아니라너에게로,그곳으로가겠다는약속이고결속일테다.“사람밖에서살던사람도/숨을거둘때는/비로소사람속으로돌아”오는법임에(「그곳이멀지않다」),“잊지말아야할것을잃어버린적이없는,잊어야할것조차잃어버린적이없는”자리로,사람들의자리,사람곁으로.

저자리들은어떤뜨거움을,꽃을,누구의등을,또는손이나발의길을기억하고있는것일까

발길에닳아빠져가운데가우묵해진나무계단,붉은불빛아래치욕에시들어가는여인들의살갗,누군가지친등을기대었던담벼락,고즈넉한꽃한송이피워올렸던꽃받침,문밖에서싸늘하게식어가는연탄재,반생의기억에저를둥글게말아서남은반생또어디로굴러가고있는것일까

잊지말아야할것을잃어버린적이없는,잊어야할것조차잃어버린적이없는,저자리들,누군가남기고간자리들_「저자리들」전문

“그곳이멀지않다,고여전히말해보려합니다”(개정판시인의말).출간된지20년이훌쩍넘는시간한결같이사랑받아온이시집을다듬어펴내며시인은다시‘그곳’으로향한다.“그가구두를끌고다닌게아니라/구두가여기까지그를이끌어온게아니었을까”반성하며,“구두가멈춘그자리”에서문득멈추었던걸음(「구두가남겨졌다」)을,그러나다시,옮기는것이다.아직더걸을수있기에,그곳이멀지않으므로.

화엄사뒷산
날개도채굳지않은날벌레들
벌써눈뜨고날아오겠다

발녹인나도
한닷새는더걸을수있겠다_「그이불을덮고」부분

■기획의말

그리운마음일때‘IMissYou’라고하는것은‘내게서당신이빠져있기(miss)때문에나는충분한존재가될수없다’는뜻이라는게소설가쓰시마유코의아름다운해석이다.현재의세계에는틀림없이결여가있어서우리는언제나무언가를그리워한다.한때우리를벅차게했으나이제는읽을수없게된옛날의시집을되살리는작업또한그그리움의일이다.어떤시집이빠져있는한,우리의시는충분해질수없다.

더나아가옛시집을복간하는일은한국시문학사의역동성이드러나는장을여는일이될수도있다.하나의새로운예술작품이창조될때일어나는일은과거에있었던모든예술작품에도동시에일어난다는것이시인엘리엇의오래된말이다.과거가이룩해놓은질서는현재의성취에영향받아다시배치된다는것이다.우리는현재의빛에의지해어떤과거를선택할것인가.그렇게시사(詩史)는되돌아보며전진한다.

이일들을문학동네는이미한적이있다.1996년11월황동규,마종기,강은교의청년기시집들을복간하며‘포에지2000’시리즈가시작됐다.“생이덧없고힘겨울때이따금가슴으로암송했던시들,이미절판되어오래된명성으로만만날수있었던시들,동시대를대표하는시인들의젊은날의아름다운연가(戀歌)가여기되살아납니다.”당시로서는드물고귀했던그일을우리는이제다시시작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