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혼자서  (양장)

저만치 혼자서 (양장)

$15.00
Description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

삶에 감겨든 글, 글에 감겨든 삶
『강산무진』 이후 16년, 김훈 두번째 소설집
언제나 운명과 대면하는 인간의 자리에서 글을 써온 김훈의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가 출간되었다. 2006년 첫 소설집 『강산무진』을 펴낸 후 집필해온 7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두번째 소설집이다. 이처럼 김훈의 단편은 귀하다. 그가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 한국문학의 대체 불가능한 명작 장편들을 연달아 발표하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후로 계속해서 성실한 글쓰기와 자기 갱신을 보여왔음에도 그렇다. 그의 단편은 장편에 비해 일상적인 인물과 사건을 주로 다루는바, 그렇다면 김훈은 자신과 가까운 이웃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때 유독 고심한다는 뜻일까. 인간 개개인의 역사에서 일상은 결코 사소한 사건이 아님을 김훈의 단편은 먹먹할 정도로 드러내 보이고 있으므로.

판타지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근작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펴내며, 작가는 “여생의 시간을 아껴서 사랑과 희망, 인간과 영성, 내 이웃들의 슬픔과 기쁨, 살아 있는 것들의 표정에 관해서 말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저만치 혼자서』는 김훈이 이러한 마음으로, 독자 곁의 묵묵하고 다정한 이웃으로서 세상에 내보내는 단편집이다. 작가는 세속과 일상을 유심히 관찰한 끝에 특유의 강직한 문장으로 연약한 존재들의 인생사를 펼쳐낸다. 그 무엇보다 김훈 자신의 견문과 취재로부터 출발했을 이 단편들은 작가의 일상이 소설의 바탕이 되고, 소설쓰기가 곧 작가의 일상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문학 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북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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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훈

1948년5월경향신문편집국장을지낸바있는언론인김광주의아들로서울에서태어났다.돈암초등학교와휘문중·고를졸업하고고려대에입학하였으나정외과와영문과를중퇴했다.1973년부터1989년말까지한국일보에서기자생활을했고,[시사저널]사회부장,편집국장,심의위원이사,국민일보부국장및출판국장,한국일보편집위원,한겨레신문사회부부국장급으로재직하였으며2004년이래로전업작가로활...

목차

명태와고래…007
손…047
저녁내기장기…089
대장내시경검사…121
영자…147
48GOP…185
저만치혼자서…213

군말…249

출판사 서평

세월이지나니견딜수있게된일들과
갈수록드러내기어려워지는연약한감정과
흐르는시간앞에겸허해지는인간존재에대하여

사실에입각하여문장의정확도를겨루는기자출신이기도한김훈은인간의희로애락을다루는소설의영역에들어선이후감정을생략한간단명료한문장만으로마음을울리는독보적인스타일로독자를사로잡아왔다.인물의직업을구체적으로설정하고그직업에관한전문용어를구사하거나업무의디테일을건조하게묘사함으로써세속의구차함을벗어날수없는인간의운명을역설적으로드러내는글쓰기방식은김훈의여전한트레이드마크이다.그러한그의문장은『강산무진』에서생로병사의흐름아래한낱유한한육체에불과해지는인간존재를가감없이그려내냉정하게돌출시키기도했다.

그런데비루한인간사를허무하게바라보던김훈의시선은16년의세월을지나며조금더애틋해진듯하다.물론『저만치혼자서』에서도인간의생애는그들의고통이나절망과관계없이무심하게흐르고,시간은살아가는요령을알려주는대가로그들의신체를허물어갈뿐이다.인간은나약해서이비참한과정을지켜볼수밖에없다.하지만이번소설집에서김훈은그런나약한인간이멈출수없는시간에초연히몸을맡기는모습까지를쓴다.버티다보면힘겨웠던지난일도견딜만한기억으로남고,감정을터놓을상대가점차사라지는외로운과정이곧인생이며,인간은그저시작에서끝을향해갈뿐이라는사실을받아들이고다시금삶에임하는김훈의인물들은한결편안한분위기를풍긴다.

김훈단편의이러한변화를가장뚜렷하게보여주는표제작「저만치혼자서」는죽음을앞두고호스피스수녀원에모여살게된늙은수녀들과그들을편안한임종으로인도하기위해성심성의껏봉사하는젊은신부의나날을그린다.성직자들조차죽음이라는미지의사건에대해본능적인두려움을느끼고,번민하고,결국죽음을받아들여안식에드는모습이처연한안도감을남긴다.

나이들어무너져가는몸을무연하게지켜보아야하는상황은김훈단편에주요하게등장하는장면이다.작가가공원에벌어진장기판을구경하며구상한「저녁내기장기」는가정이해체되고일터에서밀려나는등각자의비극을품은채알지못하는상대와장기를두는것으로외로움을견디는노년의애환을안구건조증이라는보편적인노화증세를통해상징적으로드러낸다.

「대장내시경검사」에서직장을은퇴하고명예임원직에이름을올린‘나’는처리할일과부탁받은일들에대한고민을대장내시경검사이후로미룬다.검사결과가좋지않을경우더는고민하지않아도될그일들중에는과거의연인‘나은희’가보내온인사청탁도있다.때로는과거의추억에깃든감정을곱씹으며일상을지탱하기도하지만,때로는그감정을정리하고나아가야하는인생의쓸쓸한단면이돋보인다.

「영자」는「대장내시경검사」의‘나’와나은희가보여준지난시절의연애가현대의청년세대에이르러어떻게변모하고있는지생각해보게하는작품이다.작가가노량진에서생활하는공무원시험준비생들을관찰하며쓴이단편은너무이른시기에삶의냉혹성을깨닫고나이들어버린청춘을주인공으로삼아이들이세상에진입하려고노력할수록오히려세상으로부터밀려나고마는세태를포착하며공감을불러일으킨다.

비록문학이삶을구원하지못할지라도
인간의비극을조심스레감싸안으려는글쓰기

김훈은문학은거창한것이아니며,글은삶의무게를온전히감당하지못한다고누누이말해왔다.그런만큼김훈은소설속인물들의고통과절망을매우조심스럽게다룬다.고통과절망을선명하게묘사해드러내는대신글의이면에서감지하게만드는서술은김훈소설을읽는묘미이자등장인물에대한작가의배려이기도할것이다.

특히「명태와고래」「48GOP」에서제도화된폭력에의해덧없이희생되는존재들을그릴때,작가는기원전부터이어져온자연의장구한역사와그에비해너무나짧고부질없는인간문명을대비하는것으로서술을대신한다.「명태와고래」에서한인물을파국으로몰아넣는남북의국가폭력과,「48GOP」에서분단이래수십년에걸쳐청년들의가장빛나야할시기를착취하면서도전사자의유해마저편을가르느라수습하지못하게만드는이념갈등도거대한자연의흐름안에서는미미한흔적으로남으리라는사실이그러한희생의비극성을더욱강조한다.

삶을문학으로옮길때김훈이갖추는겸허한태도는소설집의말미에수록한‘군말’에명확히드러나있다.‘군말’은김훈으로서는이례적으로길게적은‘작가의말’이자작품해제이다.그는이글에서새단편들을작가의자리가아닌이웃의자리에서썼노라고,그럼에도문학의언어로삶의언어를이겨낼도리가없었노라고밝힌다.김훈에게문학은실제삶이상의가치를갖지않는다.

하지만역설적이게도김훈의글은문학으로만도달할수있는성취를보여줌으로써문학의가치를증명한다.김훈이보여주는사유와표현의섬세함은다른매체가아닌오직글을통해서만온전히드러날수있기때문이다.글의힘이의문에붙여지는시대에,언제나인간의자리에서모든남루한삶을예우하며,한결같이빼어난소설을써내는김훈이라는작가의존재는그래서더욱소중하다.

오영환소방사의글을읽고나서나는그에게전화를해서그때의손의느낌을더자세히,더육감적으로말해보라고다그쳤는데그는간절한,강력한,따스한,세마디를반복할뿐이었다.

(…)다시읽어보니,나의이야기는꿰맨자리가여기저기드러나있다.간절한,강력한,따스한……이세마디를이겨낼도리가없다.글은삶을온전히감당하지못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인간의손은여전히나의소중한테마다.노동하는손,사랑하는손,쓰다듬는손,주무르는손,주는손,받는손,부르는손,보내는손,기도하는손,연장을쥐는손,악기를쥐는손,무기를쥐는손,고운손,부르튼손,그리고이세상의수많은손잡이에남아있는손들의자취와표정에대해서나는쓰고싶다._김훈,‘군말’에서

책속에서

수억년의새벽마다수평선너머에서해가떠올라빛과어둠이스미면서갈라졌지만바다에는시간의자취가남아있지않았다.바다의시간은상륙하지않았다.바다는늘처음이었고,신생新生의파도들이다가오는시간속으로출렁거렸다.아침에,고래의대열은빛이퍼지는수평선쪽으로나아갔다.고래들이물위로치솟을때대가리에서아침햇살이튕겼고,곤두박질쳐서잠길때꼬리지느러미에서빛의가루들이흩어졌다._「명태와고래」,9~10쪽

구두에서도철호의발냄새와철호가밟고돌아다닌땅의흙냄새가났다.싱크대배수관이막혔거나에어컨,냉장고가고장나서수리공을부를때,새로산세탁기를배달시킬때,나는여자혼자사는집안으로낯선남자를들이기가무서워서철호의구두를꺼내현관에놓고집에남자가있는것처럼위장했다.나는성폭행범의구두를나자신을보호하는위장물로쓰고있었다._「손」,58쪽

법원의직인이찍힌문서를읽으면서이춘갑은한생애의모든일상이소멸된자리에서갯벌처럼드러나는공터를느꼈다.

이춘갑은경남해안의여러소읍과포구를옮겨다니며자랐다.이춘갑은아버지의생업이무엇이었는지뚜렷이기억이나지않았지만,아버지는밥이라는천형을복역하기위해이세상에태어난것같았고,태어났을때부터무기징역을받은것같았다._「저녁내기장기」,106쪽

나는사람들틈으로뒷모습만보고도나의전처,월롱동을알아볼수있었다.어떤특징이그런식별을가능케하는지는알수없었으나,전처월롱동은확실히그자리에앉아있었다.지나간세월의돌이킬수없는갈등과불화가별것도아니라는듯이앉아있는그모습은익숙한만큼낯설었다.월롱동은거스를수없는그시간의무게를모두깔고앉듯이문상객들틈에앉아있었다.남의뒷모습이마음속에새겨진듯이익숙하게느껴지는사태는견디기어려웠다._「대장내시경검사」,142쪽

임하사의분대는작업장의잡초를제거했고,파낸흙을들것으로옮겼다.임하사는들것을들고구덩이들사이를걸어가면서뼛조각들을들여다보았다.뼈들은헐거워보였다.작은구멍들사이에봄볕이오글거렸다.뼈들은오십년만의햇볕을힘들어하는것같았다._「48GOP」,209쪽

봄부터초겨울까지,수녀원마당에서장미는피고지기를잇대었고,지면서더욱피었다.꽃한송이는죽음의반대쪽에서피는것이아니었으므로꽃이지는것이죽음은아니었다._「저만치혼자서」,229쪽

사한다는것은이미저지른죄업의존재를부인하는것이아니고,영혼을그죄업에서건져내는것입니다.그것은말너머에서이루어지는은총일것입니다.가서,알아들을수없는손수녀님의죄를사하여주십시오.하느님께서장신부님의편임을믿습니다._「저만치혼자서」,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