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이덕규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이덕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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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후폭풍의 뒤통수를 보는 눈”(이문재), 이덕규 시인의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를 문학동네포에지 46번으로 다시 펴낸다. 2003년 ‘늦깎이’ 첫 시집을 펴내며 젊은 시절의 방황과 노동, 그 피와 땀의 결실을 꺼내어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던 시편들이다. 구름으로 빚어내고 구름으로 흩어지는, 때로는 날 선 칼이고 때로는 환한 빛인 생의 언어들을 19년 만에 새 옷으로 선보인다.
저자

이덕규

1998년『현대시학』으로등단했다.시집으로『다국적구름공장안을엿보다』『밥그릇경전』『놈이었습니다』가있다.현대시학작품상,시작문학상,오장환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개정판시인의말

1부
자결(自決)/독(毒)/단검처럼스며드는저녁햇살/칼/성(聖)핏방울/칼끝에맺힌마지막눈물/천사의가슴/탈출기/빛의원액,그치명적인독/막차/숙박계/사소한균열의끝/그해겨울

2부
풍향계/회오리바람/장물(?物)/백사(白蛇)/사랑/어느인형의노래/손들엇/화성(火星)에서보내온사진한장/구름궁전의뜨락을산책하는김씨/다국적구름공장안을엿보다/우주복/성탄전야/긴수로의끝,늦가을물한자리/월광소나타/순도,0.1퍼센트의눈물/꽃과나비의사상적인과성에관하여/누가방귀를뀌었나/제목,혹은죄목도모르고/허공의사무원들

3부
오차의진실/박쥐/고장난풍향계가가리키는곳/그때밖은칠흑같이어두웠지요/골다공증/자동히터/물위의발자국/부화(孵化)/호출기/이름허물기/봉숭아꽃물번지는저녁/흉터/텅빈둥지속의밥상/철새들사랑/청정해역

4부
삽/한밤을건너가는밥/성화(聖化)/무지개를놓치다/오래된열쇠/경운기속으로들어간아버지/어떤장기기증자/우족탕한그릇/개복숭아/별들/영웅일기/흙의조직을와해시키다/꺽정이같은수상한날에/어처구니/우리집식구중에는귀신이더많다/어떤우물/양수기/무지렁이/유언

출판사 서평

“후폭풍의뒤통수를보는눈”(이문재),이덕규시인의시집『다국적구름공장안을엿보다』를문학동네포에지46번으로다시펴낸다.2003년‘늦깎이’첫시집을펴내며젊은시절의방황과노동,그피와땀의결실을꺼내어대중적반향을일으키기도했던시편들이다.구름으로빚어내고구름으로흩어지는,때로는날선칼이고때로는환한빛인생의언어들을19년만에새옷으로선보인다.

심심하면나는칼끝을보며놀지
칼끝을정면으로오랫동안보고있으면
푸른하늘을배경으로흘러가는
뭉게구름이보이지그위에
흰양떼가노니는게보이지

(……)

모든헛된꿈들이
처형되는비명소리를,뒤틀린기형의
꿈들이거세당한얘기를들려주지
몇몇꿈의조직들이
암세포처럼칼날에묻어나와
현실이된얘기를
현실이다시꿈이되는얘기를들려주지

칼끝을오랫동안보고있으면
마침내천둥이치고석달열흘비가내리고
비로소칼끝이열리어
나는칼속으로들어갈거라고
심심한나는칼끝에앉아
아무것도모르고슬픔의샘으로
물길러가는흰양떼를불러모아놓고
아슬아슬하게놀고있지_「칼끝에맺힌마지막눈물」부분

‘날선칼’은‘뭉게구름’을가르는날카로움이면서구름의세계로들어서는입구이기도하다.칼끝처럼아슬아슬한시어의놀이속에서‘구름’은갈라도흩어도묻어나는독한슬픔이며,꿈에서현실로,현실에서꿈으로끝없이탈바꿈하는세계다.젊은날꾸었던달콤한솜사탕같던꿈은공사현장에서노동하며“삽을쥐고그적자뿐인손익계산서를쓸때”“시커멓게몰려가는먹구름”이된다(「다국적구름공장안을엿보다」).“세상의단면을각각한줄씩읽으며흘러간흰구름들”은무결한생의증거이지만,이또한끝없이포개지면서“슬픈표정의먹장구름”이되고만다(「긴수로의끝,늦가을물한자리」).공사장의임시가설물인비계를‘구름공장’이라부르는허공답보의이미지가노동중추락한인부의뇌CT결과지위하얀반점과겹쳐질때(「구름궁전의뜨락을산책하는김씨」),“현실이된얘기”는“현실이다시꿈이되는얘기”로자리를뒤섞는다.

오랫동안독을삼켜왔다
조금씩조금씩먹어온독에의해
나는길들여졌다이제치사량의
독성이나를살게한다
아니그독성을치유키위해
날마다더깨끗하게정제된독이
필요하다이제내몸속엔
독이외의다른성분은없다

나는독이다
밤새도록허공에떠돌던
절망의투명한미세입자들이모이고모여
더이상그무게를견딜수없을때
비로소기척없는
이른새벽이되어지상에내려앉는독_「독(毒)」부분

「자결(自決)」로시작하여「독(毒)」으로이어지는시집의첫머리에서시인은“나는독이다”선언하며,꿈과불화하는현실에끝끝내맞섬으로써이를욱여삼켜내기로한다.“밤새도록허공에떠돌던/절망의투명한미세입자들이모이고모여/더이상그무게를견딜수없을때”지상으로내려앉는이독의이미지에구름이비가되어내리는모습을포개어본다면,비처럼혹은‘빛’처럼삶에날카롭게파고드는이독(「빛의원액,그치명적인독」)이‘희망’의다른이름임을짐작하게도된다.이시집『다국적구름공장안을엿보다』는전원적이미지와꿈같은비유사이에서부유하지만,그별세계가곧현실과괴리된환상,‘뜬구름’의세계로흩어지지않는이유다.구름과단검,혹은꿈과현실이라는아이러니.시집이처음출간된지20여년,“철거당할수있는희망”이라는양날은여전히,또다시,날카롭게빛나고있다.

늘막배를타고멀미하듯돌아왔다더러는
너무멀리나아갔다가돌아오지못한사람들이어느날쫓기듯돌아와
좁은골목출구없는미로속으로숨어들었다
흑백포스터위로총천연색구인광고물들이수없이덧붙여졌으나여전히그뜻을알지못했고
어느새빈호주머니속익명의슬픔에게상처투성이인손들이습관처럼불려들어갔다그리고
누군가내다버린아직식지않은연탄재위로뛰어내린눈송이들이거친숨을몰아쉬는그어디쯤,
막다른골목쪽창안으로단검처럼스며드는저녁햇살이언제든지모든것을
철거당할수있는희망처럼날카롭게빛나고있었다_「단검처럼스며드는저녁햇살」부분

■기획의말

그리운마음일때‘IMissYou’라고하는것은‘내게서당신이빠져있기(miss)때문에나는충분한존재가될수없다’는뜻이라는게소설가쓰시마유코의아름다운해석이다.현재의세계에는틀림없이결여가있어서우리는언제나무언가를그리워한다.한때우리를벅차게했으나이제는읽을수없게된옛날의시집을되살리는작업또한그그리움의일이다.어떤시집이빠져있는한,우리의시는충분해질수없다.

더나아가옛시집을복간하는일은한국시문학사의역동성이드러나는장을여는일이될수도있다.하나의새로운예술작품이창조될때일어나는일은과거에있었던모든예술작품에도동시에일어난다는것이시인엘리엇의오래된말이다.과거가이룩해놓은질서는현재의성취에영향받아다시배치된다는것이다.우리는현재의빛에의지해어떤과거를선택할것인가.그렇게시사(詩史)는되돌아보며전진한다.

이일들을문학동네는이미한적이있다.1996년11월황동규,마종기,강은교의청년기시집들을복간하며‘포에지2000’시리즈가시작됐다.“생이덧없고힘겨울때이따금가슴으로암송했던시들,이미절판되어오래된명성으로만만날수있었던시들,동시대를대표하는시인들의젊은날의아름다운연가(戀歌)가여기되살아납니다.”당시로서는드물고귀했던그일을우리는이제다시시작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