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애들이다그렇지.
버릇이나빠진건그냥버릇이나빠진거지.
페미니스트로성공하지만
‘남근선망’을한다는야유를받는어머니
아내의성공으로‘거세당한남성’의기분을
묻는질문에난감한아버지
전국토론챔피언이자미래의아이비리그학생이면서
은밀한일탈과보이지않는힘겨루기를즐기는아들……
발라버리고갈라치는말과혐오의시대,
페미니스트어머니와‘남자들’의목소리사이에서
소년은어떻게어른이되어가는가?
심리상담가의소파에누워있는
‘특권의미아들’,그들은누구인가?
두딸아이의아버지인애덤은반의식적으로놀이터를훑어본다.아이들을괴롭힐만한녀석이나바닥에깨진유리가있는지확인한다.놀이터시설의높이와이런저런추락에따를수있는부상을머릿속에새겨놓은뒤잠깐휴대폰메시지를확인한다.그때미끄럼틀에서큰소리가들려온다.여덟살쯤되어보이는남자아이가미끄럼틀위에서발을쾅쾅굴러대며말한다“미끄럼틀은남자용이야,여자는미끄럼틀못타.저리가.”애덤이소년에게다가가말한다.“여자애들도미끄럼틀을타게해주면어떨까?”그러자그애가말한다.“안돼요.이여자애들은멍청해요.그리고못생겼어요.못생기고멍청한여자애들은안돼요.”소년의아버지는아이를제지할생각이없어보인다.그저휴대폰화면만들여다볼뿐이다.머릿속에서‘남자들’의목소리가말한다.“남자애들이다그렇지.버릇이나빠진건버릇이나빠진거지.딸들에게그네를타라고하렴.대립을통해서얻을건아무것도없다는걸알려주렴……”
문학계가주목하는“소설의미래”,미국의젊은작가들을사로잡은소설가벤러너의장편소설『토피카스쿨』이문학동네에서출간되었다.국내에처음소개되는작가의작품이다.시인이자소설가벤러너는만사십세가되기전에‘천재예술가그랜드슬램’으로알려진풀브라이트장학금,구겐하임펠로십,맥아더지니어스펠로십을모두수혜하기도했다.2019년10월에출간된『토피카스쿨』은‘버락오바마선정올해의책’,〈뉴욕타임스〉〈타임〉〈워싱턴포스트〉‘올해의책TOP10’을비롯해스무곳이넘는언론사에서올해의책으로선정되며그야말로그해올해의책리스트를휩쓰는기염을토했다.로스앤젤레스북어워드를수상하고퓰리처상과전미비평가협회상최종후보에오르기도했다.페미니스트어머니와‘남자들’의목소리사이에서어른이되어가는한소년의성장기이자발라버리고갈라치는말과혐오의시대,분노로들끓으며분열하는세계,심리상담가의소파에누워있는‘특권의미아들’에대한날카롭고도탁월한통찰을보여주는전혀새로운경지의메타픽션.
발라버리기_애덤
십대들은점점흔해지는전문의약품TV광고가끝날때마다나오는경고문구를들었다.약물의위험성에관한정보가이해하기어렵게빠른속도로공개되었다.또라디오광고가끝날때마다규칙과절차준수의무목록을빠른속도로읽어젖히는것도들었다.금융기관과의료보험회사에서받는‘작은글씨’에도조금은익숙했다.그수천개의단어로절대못할일이있다면바로그단어들을이해하는것이었다.이런식의공개는은폐를위해서고안된것으로,문제의기관에이의를제기할경우빠른토론대회에서‘반박을포기한주장’으로취급될만한정보를내놓았다.정보가제시된당시에반박하지못했으니쟁점의타당성을인정한셈이라는것이다.반박할시간이없었다는건변명거리가못됐다.미국인들은이십사시간뉴스와몰아치는트윗(트위터는사람들이머뭇거리는동시에빠르게말할수있도록해주었다),알고리즘매매,스프레드시트,디도스공격이일어나기전부터일상적으로‘발렸다’.한편,미국의정치인들은계속해서자신의정책과무관한가치에대해서는천천히,느리게이야기했다._본문38쪽
1997년켄자스시티토피카고등학교졸업반인애덤은전국토론대회챔피언이다.그를토론과연설일인자로만들어준것은바로‘발라버리기’기술이다.‘발라버리기’란상대편이제한된시간내에응답할수있는것보다더많은주장과더많은근거를갖다붙이는토론기술을말했다.주장과근거의질이나내용은상관없었다.더빠르게,더많은내용을말하는것,그래서상대가‘반박을포기한주장’이더많이나오도록유도하는게중요했다.그래서토론자들은말을빠르게쏟아내는것에만집중했다.그내용을이해하는것은포기했다.이해하다보면말이느려지니까.
애덤은토론챔피언인동시에모든과목에서A를받는모범생이고시를읽고쓸줄알았으며어쩌면아이비리그에진학하고나중에는의회로진출할지도몰랐다.게다가그는또래의마초문화에도적극적이었다.규칙적으로웨이트트레이닝을했고운동후에는단백질셰이크를잊지않았다.또래남자아이들과의보이지않는힘겨루기에서도절대겁먹은기색을보이거나뒤꽁무니를빼는법이없었다.그는상대를훑으며머릿속으로상대의체급을가늠하고이런저런레슬링기술을시뮬레이션했다.언제든몸싸움을벌일준비가되어있었다.또한친구들과의일탈도기꺼이즐겼다.그덕에부모에게는자랑스러운아들,또래사이에서는‘쿨한친구’일수있었다.그러나이런이중플레이가언제나효과적으로작동하진않았다.모든비뚤어진욕망과현실과상상속갈등상황에서오는스트레스,‘진짜남자’로보여야한다는중압감,언제든침대에누워엄마를찾는어린애로전락할지모른다는두려움으로극심한편두통을앓곤했다.
남자들_제인
전화를건‘남자들’은내가여보세요,라고말하면나를다양한종류의쌍년이라고부르기위해서목소리를귓속말수준으로낮추었어.나는들리지않는척했지.“죄송한데,크게말해주실수있을까요?”그러면보통혼란스러워하면서뭐든자기가했던말을조금더큰소리로되풀이했단다.나는그남자의목소리가제대로들렸지만똑같이공손하게,이전화의성격을알고있다는내색을전혀하지않고말했지.“죄송하지만연결상태가좋지않은가봐요.조금만더크게말해주실수있을까요?”나는계속해서그찌질이한테목소리를높여달라고공손하게부탁했지.그는메시지를한두번쯤되풀이하다결국자기가하는말을듣고너무당황한나머지-아니면그냥누가엿들을까봐걱정했던걸지도몰라,이런남자중옆방에아내나딸이있는남자가몇명이나됐을지모르겠구나-목소리가떨리거나갈라지곤했어.대부분은그냥전화를끊어버렸지.수치심이밀려와서그랬을거야._본문138쪽
애덤의엄마제인은성공한페미니스트이자심리상담가다.동료들은그녀의성공을두고‘남근선망’이라느니뒷말을해댔고그녀가하는말,행동하나하나를‘남근을갖기위한노력’으로분석했다.그리고집으로익명의남자들이전화를걸어오기시작했다.제인이전화를받으면그들은거의속삭이는듯한목소리로온갖욕설을퍼부어댔다.그들은제인이그들의결혼생활을망친쌍년이라는점을,그녀같은쌍년들,페미나치들이야말로요즘여자들의문제라는점을,쌍년들은입을닥쳐야한다는것을알려주고싶어했다.그러던어느날제인은‘남자들’의전화를처리할기술을발명한다.제인은전화소리가잘들리지않는척그들에게거듭목소리를높여달라고요청했다.그러면‘남자들’은결국자신이내뱉은말에너무부끄럽고당황한나머지전화를끊어버리곤했다.
어느날아들애덤이사고로뇌진탕을일으킨다.의식을잃고병원중환자실침대에누워있는아들을보며제인은기도했다.하느님께빌었다.더높은힘을향해약속했다.“애덤을살려주세요,그애만무사하다면다시는글을쓰지않을게요.”그녀의머릿속에서어떤목소리가말했다.“당신남편이불쌍해,아들이불쌍해.당신이그런책을쓰지만않았다면아들은무사했을텐데.아무일도없었을텐데.”제인은계속기도했다.“맞아요,그말이맞아요.나는나쁜아내,나쁜엄마,나쁜딸이고,가정파괴범이에요.그냥애덤만괜찮게해주세요.그럼말잘들을게요……”
특권의미아들_조너선
그애들에게는냉장고가득음식이있고에어컨과TV도있었다.또한낙인이나국가적폭력으로부터도자유로웠다.그아이들이고통의정체를모른다는점보다명백한사실이있을까?그들에게뭐든고통이있다면그건바로고통의결핍이었다.너무편해서,너무설탕을많이먹어서생긴일종의신경장애,존재론적통풍.그아이들은속빈강정이었다.한마디로그들은너무배가불렀다.한마디로그들은배가고팠다._본문91쪽
신경증적인부모들이걱정하는대로그런음악들을천천히거꾸로재생했을때정말로가사에서사탄의메시지가드러난다면얼마나쉬웠을까.아무리음침하다해도,공허함에대한분노대신거꾸로녹음해숨긴비밀스러운질서가있었다면._본문89쪽
애덤의아버지이자제인의남편조너선역시심리상담사였다.그의환자들은대개십대소년이었는데,유난히그의머릿속을복잡하게만드는부류가있었다.바로안정적인가정의인텔리중산층백인아이들.누구보다‘정상적인’환경에서부족함없이자란아이들.민주적인가정에서부모에게엉덩이한대도맞아본적없이사랑받으며자란아이들.이런아이들은모범적인학교생활과탁월한성적을보여주다가보름사이에급격히망가지더니순식간에수업을빼먹기시작하고대마초냄새를풍기곤했다.부모가대체왜그러는지설명해보라고하면입을꾹다문채자기방으로향했다.그러더니어디서슬쩍한독주를들이붓고는부모의차를몰고나가길거리에주차된다른차를박아버리고,판사로부터소년원에가든지정신과치료를받으라는얘기를듣게되는것이었다.
조너선은멍청하진않지만재능이뛰어나지도않은사람,매일길에서마주치는집합적얼굴의평범한사람이었다.그러나대화를이끌어가는솜씨가좋았다.대화의물꼬를트고,서로의견해를나누고,견해의차이를인정하고상대에게존중받는다는느낌을전할줄알았다.그래서제인과달리동료들은물론이웃사람들과도잘지내는편이었다.친절한대화가남자답지못한것으로여겨지는데도상관하지않는듯했다.간혹제인의성공때문에‘거세당한남성’의기분을물어오는질문에난감하기도했지만대체로아내의페미니즘과성공을지지했다.‘남자들’의전화에제인보다더분노하기도했다.그러나그는결정적인방식으로아내를배반했다.아내의친구와외도를저지른것이다.
“분노에차있지만결국사랑에대한이야기.”
머리양옆은바짝깎고나머지머리카락은포니테일로당겨묶은,미소조차짓지않은이열일곱살짜리소년은누구일까?부모의좌익성향과그가어린시절을보낸공화당지지주의타협이재앙에가까운헤어스타일로나타난것일까?소년은엄청난속도로거의자기만알아듣는언어를말한대가로딴메달을목에걸고있다.이사진속사람들은무슨생각을하고있을까?무얼느끼고있을까?무엇이이장면으로이어졌는지부터이야기해보자._본문42쪽
『토피카스쿨』은혐오와분열의시대,발라버리고갈라치는말들로가득한작금의상황이어떻게,왜일어나게되었는가에대한첨예한보고다.작품속‘발라버리기’는듣는상대의반응을고려하지않은일방적인방식이며상대의입을다물게하는말하기다.정보는과다할수록언어의기능은붕괴된다.언어의본래목적인소통을저버린채오히려불통을유도한다.또한오직이기기위한방편이며약육강식과적자생존의논리에따른말하기방식이기도하다.작가는한때미국정치인혹은논객이자주쓰던무기였고트럼프시대의도래와몰락을함께했던‘발라버리기’가정치,TV광고,온라인,일상의대화에까지광범위하게퍼져있는상황을짚어내고더불어미국백인-남성정체성의위기,레드넥의출현과뉴라이트의부상,백래시현상에까지나아간다.
또한이작품은가족과사랑,성장,희망에대한이야기이기도하다.애덤의성장기는‘특권의미아들’의성장기를대변한다.자유주의세대보다더자유로운세대라는그들은민주적인가정환경과물질적풍요속에서자랐다.그러나수많은선택지사이에서방황하고배가부른동시에배가고프다.그들에게는고통의결핍이고통그자체다.페미니스트어머니와‘남자들’의목소리사이에서고군분투하던아이가어떤어른으로성장할것인가,“남자애들이다그렇지”라고말하는목소리가잔존하는세상에서‘착한아들키우기’는과연가능한가,서로를발라버리고서로에게발리는말하기의대안은존재하는가,혐오로들끓으며분열하는지금소통과화합,연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