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사냥 (장석주 시집)

햇빛사냥 (장석주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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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문학평론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장서가, 문장노동자…… 수많은 수식이 있겠으나 그에 앞서 단연 ‘시인’, 장석주의 시집 『햇빛사냥』이 문학동네포에지 50번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이번에 새 판으로 선보이는 『햇빛사냥』은 그의 첫 시집 『햇빛사냥』과 두번째 시집 『완전주의자의 꿈』을 합본한 것이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으로부터 거슬러도 43년, 고교 문청으로서 시를 써온 세월부터 가늠하면 족히 50년에 달하는 그의 시력, 그 첫머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시집인 셈이다.

우리가 어둠 속에 집을 세우고
심장으로 그 집을 밝힌다 해도
무섭게 우는 피는 달랠 수 없다.
가자 애인이여, 햇빛사냥을
일어나 보이지 않는 덫들을 찢으며
죽음보다 깊은 강을 건너서 가자.
모든 싸움의 끝인 벌판으로.
_「햇빛사냥」 부분

첫 시집 속 시들을 엮은 1부 ‘햇빛사냥’에는 “윤동주, 기형도와 함께 영원한 청년시인”(권혁웅) 장석주의 변치 않는 푸름, 시라는 깨어 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실제로 『햇빛사냥』은 故 기형도 시인이 가장 사랑한 시집으로도 알려지기도 했다. 1979년 처음 선보인 이후 두 번의 복간을 거쳐 이번 문학동네포에지까지 네번째 옷을 입었다. 시간이 흘러도 결코 흘려보낼 수 없는 시편들인 까닭이겠다. 날카로운 눈과 탁월한 직관으로 관념의 세계를 꿰뚫고 포착하는 시인의 언어에는 뜨거운 패기와 서늘한 예기가 공존한다.

“(책장) 위를 눈으로 더듬다 장석주의 『햇빛사냥』을 끄집어냈다. 1981년 4월에 발행된 1200원짜리 시집. (……) 어느 단어에는 동그라미를 쳤다가, 어느 단어에는 가위표를 치고, 어느 명사 아랫줄에는 '밝고 힘찬'이란 형용사를 수줍게 적어 놓은. 생전의 그를 떠올리는 순간 엽서 한 장이 책갈피에서 굴러 떨어졌다. 출판사 회수용으로 만들었던, 부치지 못한 독자엽서다. 또박또박 쓴 글씨로 직업: 학생, 좋아하는 시인: 장석주, 이름: 기형도 등이 적혀 있다.”
_「나의글 나의서가…… 故 기형도 시인」, 조선일보, 2001년 6월 1일.

1부가 형이상학의 세계를 향한 정공이었다면 책의 2부이자 두번째 시집을 옮긴 ‘완전주의자의 꿈’은 발아래 현실이라는 세계, 예컨대 ‘생활’을 담은 시편들이다. 1981년 처음 출간되었던 이 시집 속에는 도저한 현실 조건에 맞서 싸우고 이를 넘어서려는 분투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한겨레S와의 인터뷰에서 ‘시마(詩魔)가 찾아온다고 해도 거절할 것’이라고, ‘내 걸 쓰겠다’ 밝혔던 그 곧음과 오롯함의 연원을 돌아보게 한다.

오, 어두운 곳에서 서로 얽힌 뿌리들,
뿌리가 밀어올리는 수액을 받아
연녹색 풋풋한 잎 같은 걸
피우며 살자,
아스팔트 위에서
말없이 손잡는 우리.
_「아스팔트」 부분

등단으로부터 40년이 훌쩍 넘는 기간, 시인은 100권 이상의 책을 썼고 여전히 씀으로 삶을 살아낸다. 그가 스스로를 ‘문장노동자’라 일컫는 이유다. 시집으로 17권을 펴냈고, 절판되어 만날 수 없었던 9권의 시집 중 그 첫걸음이라 할 2권의 시집을 이번 문학동네포에지 『햇빛사냥』으로 한데 묶었다. 나머지 7권 속 시편들 역시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난다, 2021)로 다시 제자리를 찾은 바 있다. 시와 함께, 시로 걸어온 그의 길이 끝나지 않았기에, 끊이지 않을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퍼렇게 날 선 바람 속에서
폐허된 정신으로
서서 잠들리라.
_「바다의 부활수업」 부분

첫 시집을 펴내며 “좀더 밝은 날들에 대한 희망은 포기할 수 없다” 밝혔던 시인은 마침내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시를 쓰는 이와 시를 읽는 이 모두에게 “천만다행”인 일이다.

1
희망이
모든 가난한 사람의 빵이 아니듯
나의 시는
나의 칼이 아니다.
캄보디아나 아프리카 신생 공화국 같은 곳에서
빈혈의 아이들이 쓰러져가고 있을 때
백지의 한 귀퉁이에
얌전히 적혀 있는 나의 시는
나의 칼이 아니다.

2
내 생각의 서랍을 열면
그 어두운 구석에 숨겨져 있는
추억이라는 오래된 빵에
파랗게 피어 있는 곰팡이,
먹어서 허기를 면할 수도
갈아서 무기로 쓸 수도 없는
그것이 나의 시다.
_「나의 詩」 전문
저자

장석주

1979년조선일보신춘문예를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햇빛사냥』『완전주의자의꿈』『그리운나라』『어둠에바친다』『새들은황혼속에집을짓는다』『어떤길에관한기억』『붕붕거리는추억의한때』『크고헐렁헐렁한바지』『다시첫사랑의시절로돌아갈수있다면』『간장달이는냄새가진동하는저녁』『물은천개의눈동자를가졌다』『붉디붉은호랑이』『절벽』『몽해항로』『오랫동안』『일요일과나쁜날씨』『헤어진사람의품에얼굴을묻고울었다』등이있다.애지문학상,질마재문학상,영랑시문학상,편운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1─『햇빛사냥』에부쳐
시인의말2─『완전주의자의꿈』에부쳐
개정판시인의말

1부햇빛사냥
햇빛사냥/가을병(病)/쓸쓸한바다저녁여덟시/시월/아이들을위하여/아내의잠/손은지는꽃잎을받을수없고/민둥산에서의하룻밤/섬/잠자는바다/날아라시간의포충망에붙잡힌우울한몽상/이여/1978년가을혹은숨은기쁨/벌판1/벌판2/벌판3/저녁/새벽,해뜨는바다로의보행/연금술사의잠/비가(悲歌)/하나의무서움/하루가저물고/동행/심야1/심야2/조용한개선/가을예감/바다의부활수업/저녁,눈내리는묘지로의보행/꿈꾸는사냥꾼의비가(悲歌)/풀잎/병후(病後),혹은살아있는기쁨에게/새/파가니니/순은의햇살이빛나는아침까지악사(樂士)는자작나무숲에서잠들고/올훼여꿈꾸는영혼이여/먼산먼강/바다사냥

2부완전주의자의꿈
나의詩/밥/등(燈)에부침/폐허주의자의꿈/둘이,혹은여럿이동행할때그중한사람의괴로움은누구의것?/자정의물받기/애인에게/완전주의자의꿈/쇠붙이의부식에관한짧은명상/사람은나무밑에서잠들기도한다/제주에서/다시제주에서/부랑/바다풍경/사랑을위하여/겨울저녁/옛사진을보며/홀로찬집에누워/아스팔트/죽은자의장사(葬事)는죽은자에게/1974년겨울/가을에/불에부침/추억/어느날/고향의달/시간을묘사하는연습혹은어떤비참했던날의추억/안개,또는하얀탑들이밤마다암호를묻는다/집,어둠속에서있는/꿈/공기/불행/공원의사진사/거리에서,나는,보고싶다,무엇을?/겨울,뛰어내린다,우리는,어디로?/폐쇄된해안으로달려간아이들은?/거지/안개/말에관한새로운조서(調書)

출판사 서평

그리운마음일때‘IMissYou’라고하는것은‘내게서당신이빠져있기(miss)때문에나는충분한존재가될수없다’는뜻이라는게소설가쓰시마유코의아름다운해석이다.현재의세계에는틀림없이결여가있어서우리는언제나무언가를그리워한다.한때우리를벅차게했으나이제는읽을수없게된옛날의시집을되살리는작업또한그그리움의일이다.어떤시집이빠져있는한,우리의시는충분해질수없다.

더나아가옛시집을복간하는일은한국시문학사의역동성이드러나는장을여는일이될수도있다.하나의새로운예술작품이창조될때일어나는일은과거에있었던모든예술작품에도동시에일어난다는것이시인엘리엇의오래된말이다.과거가이룩해놓은질서는현재의성취에영향받아다시배치된다는것이다.우리는현재의빛에의지해어떤과거를선택할것인가.그렇게시사(詩史)는되돌아보며전진한다.

이일들을문학동네는이미한적이있다.1996년11월황동규,마종기,강은교의청년기시집들을복간하며‘포에지2000’시리즈가시작됐다.“생이덧없고힘겨울때이따금가슴으로암송했던시들,이미절판되어오래된명성으로만만날수있었던시들,동시대를대표하는시인들의젊은날의아름다운연가(戀歌)가여기되살아납니다.”당시로서는드물고귀했던그일을우리는이제다시시작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