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정화진 시집)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정화진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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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생은 무겁거나 검거나 아프다”
겨울 정원에 구근식물을 심으며 꿈꾸는 생성의 힘,
주체를 지웠을 때 비로소 확장되는 존재에 대한 탐구
정화진 28년 만의 시집
문학동네시인선 178번으로 정화진 시인의 세번째 시집을 펴낸다.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1990),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1994)를 펴낸 시인이 28년 만에 묶는 시집이다. 사반세기 넘는 긴 시간의 침묵을 깨고 돌아온 정화진 시인은, 이전 시집들에서 몇 가지 모티프를 이어오되 훨씬 더 확장된 시공간을 무대 삼아 새로운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우리를 자신의 내면 공간 안으로 끌어들여 한 인간의 유년기를 동시 체험하게 한다. (…) 진정한 초월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성찰을 계속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하재봉)라는 평을 받은 첫 시집 속 단발머리 여자아이와 ‘우산리’의 풍경, 평론가 황현산이 “강의 하구는 그 욕망의 무덤들이다. 파도를 타고 한 번 출렁인 욕망은 다른 파도에 그 욕망을 넘겨준다. 파도가 그렇게 출렁이고 ‘분묘이장공고’가 그렇게 펄럭인다. 그러나 그 욕망의 파도 아래에는 시들지도 않고 떨어진 ‘동백’도, 그 순결한 욕망도 함께 가라앉아 있다”라고 쓴 두번째 시집 표제시 속 ‘강’ ‘파도’ ‘분묘이장공고’ ‘동백’의 이미지들은 정화진 시의 화자가 나이들고 그를 둘러싼 세계의 성분이 달라지는 것과 함께 변화하였다.
세번째 시집에서 도드라지는 변화는 단연 화자의 시선이다. 시의 주체로서의 ‘나’ 혹은 ‘나’의 주관적 진술, 고백적 어조가 대폭 줄고 그 자리에 수많은 ‘너’ ‘그대’ ‘그녀’가 등장한다. 화자의 내부에서 외부로, 인간계에서 그 너머로, 더불어 ‘지금 이곳’에 붙박이지 않은 채 대상을 호명하고 두루 살피고 말을 건네는 59편의 시편들은, 시인의 시세계가 훨씬 더 다층적ㆍ다차원적인 데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일견 전보다 두려움 없이 자유로워진 듯 보이기도 하는데, 성취로서의 자유라기보다는 무력감과 상실감을 감내한 자의,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의 존재를 숭고하게 바라보게 된 자의 연민과 겸양의 태도에 가깝게 느껴진다.
저자

정화진

1959년경북상주에서태어났다.1986년『세계의문학』을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장마는아이들을눈뜨게하고』『고요한동백을품은바다가있다』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베란다창에거꾸로매달려안녕,인사하던
너는길이어두워꽃을보지못했구나/간이의자/거기,계시는거죠?/그대,울지말아요/은화식물들/온몸에바늘을꽂고사막그늘로묵묵히걸어간사람들/벚나무아래/백공천창/부서진노래언덕/섬세한입들에서폭언이장마처럼우거질때/바람의옷/불법체류자들-말의낯선풍경들/북풍과함께/삼월의나뭇가지

2부어떻게이아이를데려가야할까요?
달이뜬다/눈사람/무릎위의고양이/양상추만바삭바삭/두번째눈꺼풀/여기가어디인지모르겠어/숲을불러와주세요/고양이와폴란드여행/여행자들가방/너에게강을빌려주었더니/도꼬마리꽃예쁘네,나를부르시지만않았다면/어둠속장미/쇼윈도/깃털아래-아이탄생하다

3부그가준육포조각으로무엇을할수있을것인가
그때문득바람이불기시작해서/주유소불빛/해변의묘지/섬세한지층/잠든말이잠든마음을흔든다/꽃피리떼/비나이다비나이다-거리의아이들에게/물속관에가서눕다/그해팔월그리고칠석/물의말/꽃피는아이/새장속의육포조각/회색뱀에관한추억/나비또나비

4부벌통으로쓰일책이었단말이지
정밀의책/육포에대하여/색채가끝나는시간,모든육체의자리들이상승한다그리고/마음은복사꽃밭같아서/햇살이참따뜻하고좋다고중얼거리다가/고요정원/바다는쇠물닭을몰고온다/바리데기/가뭄/길/단풍잎은촛불처럼/불안의서식지/또길을잃다-이연주생각/상상극장인부였던목탄의시/견고한숲/우수/[겨울정원]

해설|주체없는생성으로서의시학
노태맹(시인)

출판사 서평

숲으로가는길은멀기도하지
이곳은덥고메마른곳이구나
쑥부쟁이민들레야
서재에이끼부터키워놓고너희를불러줄게
그래우리모두시선을돌려보자
생의진창을건너왔다고말하지말자
피비린내나는삶이라기록하지않을게
물을뿌려줄게
_「숲을불러와주세요」에서

얘야,갈곳없는공원뒷길이층카페에서만나자.
바삭거리는밀웜과양상추와에픽테토스의지팡이로
기우뚱세월을견뎌보자꾸나.
양상추만바삭바삭아삭거리며시간을재촉하지않니?
우리대화나나눌까.
_「양상추만바삭바삭」에서

‘쑥부쟁이민들레’와‘아이’를향한화자의시선이은은하게밴사랑으로다정하다.삶의신산함을섣불리말하지않고,동시에쉽게희망을말하지않는화자를짐작할수있다.‘나’의실존에골몰하지않고인간과자연과사물을아울러‘존재함’자체가끊임없이발생시키는우연적인것들을골똘히들여다보는화자역시짐작할수있다.시인노태맹이해설에서화이트헤드를빌려쓴가상인터뷰와같이“생성은연속적이고보편적인흐름이아니라불연속적이고우발적인”것이며“이미지의발생과그과정도마찬가지”일지모른다.물을뿌린뒤에무엇이어떻게자라날지,세월을견디고대화를나눈이후에어떤일들이가능할지알수없지만무언가의생성을도모하는자세를견지한다면.
시집전반에배음처럼깔린‘생성의힘’과그에대한탐구는주로‘여성’과‘자연’에서길어올려진다.“베란다창에/거꾸로매달려안녕,인사하던/그녀,그녀들”.“세계의크기보다더아픈,소리없는비명속에,생을일찍마친,마치고있는,마치고말,오래된그녀들,오늘의그녀들,미래의그녀들생각을”시인은오랜시간끊임없이해왔으리라.(「삼월의나뭇가지」)“너무섬세해서첫얼음얼듯/살얼음낀일상을내딛는여자들//(…)//파들대는저섬세함을어쩌나/겹쳐진아픔들을,두번째눈꺼풀들을”내내염려했으리라.(「두번째눈꺼풀」)이는“유령이출몰하는시간,낮게”핀“은화식물들”의세계(「은화식물들」)와닿아있고,“동백과목련사이,꽃핀자리”의시간적낙차는“생은무겁거나검거나아”픈것임을다시금확인시켰을것이다.(「벚나무아래」)“날개위에노래를얹어두고우리는슬픔의그늘아래앉”았기에(「섬세한입들에서폭언이장마처럼우거질때」)“잠든말이잠든마음을흔”드는것을예민하게감각할수있었을것이다.(「잠든말이잠든마음을흔든다」)

그래그래
조금만조금만더기다려보자
황소야무거운황소야저나뭇가지좀보아
날개가돋아나려나봐
붕대를풀고날아오르는저희고흰나비떼좀보렴
그래,나비또나비야
그런데말이지
그게문제야넌아니?
_「나비또나비」에서

나비가고치를뚫고나오는순간이해방의순간만은아님을시인은“그게문제야넌아니?”라는마지막한문장으로보여준다.익숙한은유와재현또한하나의억압으로생각한다면,우리가쉽게타자화하고규정지었던관계들이새로운이미지의공간으로창조될수있을터다.

또다른공간
생의뒤뜰
고요와명징함들이지키고있는어떤환한곳의정결함들
그곳에의현혹이결국나를어떤공백,어떤텅빈곳의환함으로잇닿게하는
생이끌고가는가장본래적인힘인고독에의접근
피붙이처럼따라다니는그무수한공백들
고요들
_「고요생활」에서

그녀들말의향기로저복사꽃핀산자락이색채가끝난시간들또는육체들이상승한자리위에얹힐때,인간의마음은분홍의꽃밭같아져서말마저잊고향기로가득세상을채우리라
_「마음은복사꽃밭같아서」

이처럼오랜숙고끝에돌아온시인이손에쥔건결의나야심이아닌‘정결함’과‘공백들’,‘고요들’이다.그는회백색‘겨울정원’에구근식물을심고“근본적인무력감에기대보려”베르그송을읽었다.“사랑과죽음과무지와맹목”을잃지않았고마침내“무력함의정원에첫스노드롭꽃대”가솟는것(「[겨울정원]」)으로시집은마무리된다.오랜시간기다려온시인이이번시집을기점으로찬찬히펼쳐보일새로운풍경의정원에여러분을초대한다.“순정하고아름다운,그소녀소년들,청년들께,그대들께,아침마다다시피어날이슬묻은나팔꽃다발을,이시집을,드린다.”(「시인의말」에서)

◎정화진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안녕하세요,28년만에세번째시집을출간하셨는데요.소감한말씀부탁드립니다.아주오랜만에출간하는시집이라감회가남다를것같습니다.그간어떻게지내셨는지도궁금합니다.

참으로긴세월이지나갔네요.다시독자들앞에서는일이두렵기도하고많이설레기도합니다.긴시간동안압축되었던시어의무게로독자들을힘들게하지나않을까염려됩니다.
첫시집을내고이듬해늦은결혼을하여세아이를둔엄마가되었습니다.그러고보니아이들은이제모두성년이되었네요.십여년은출산과육아에따른노동속에파묻혀있었습니다.그무렵지방소도시에서교사생활을하던남편이직장을접고작은국어학원을열었어요.저도학생들과고대철학사를함께공부할기회를얻게되었고,그철학공부의즐거움에많은시간을보냈습니다.

Q2.시집에등장하는‘그대’라는대상은다양한층위에서변주되는것같습니다.

많은아이들과함께한시간이중첩되고이어지는동안,그겹쳐진시간과공간속에서만난순정한이들이모두‘그대’입니다.너,당신,우리,사랑하는사람들,예고없이등장하는유령들,모두를아우르는,각각의호명입니다.
‘그대’는성장하고생성중인사랑의말이기도합니다.
아프고,상처받고,우울하고행복한,어두운길위에서있는아이들,사람들,나무들,식물들뭇짐승들,모두안아주고쓰다듬어주고싶은어여쁜존재들의총칭입니다.

Q3.바다,바람,꽃,나무등인간을둘러싼,혹은인간과는다른방식으로운용되는자연계의요소들이시집에자주등장합니다.화자가느끼는억압을다소나마해제하는역할을하는동시에,유한하고한정된인간의삶을다른방식으로마주하게하기도하는것같습니다.부연해주실말씀이있으실까요?

사물인터넷,증강현실,메타버스와같은가상현실이일상화되는시기입니다.자연계의사물들이저에게는가상현실의존재들처럼각각의고유한존재양식들로다가왔습니다.그존재들이어떻게변모를거듭하는지에대한탐색또는사유의흔적들이제시가접근한세계이고,시창작에숨통을열어준또하나의물줄기이기도합니다.비근한예를든다면지구의지각판이동이히말라야고산지대에서많은소금을얻게하듯이저의시에서바다에대한고체이미지를낳기도했습니다.이어서차마고도붉은소금밭에서어린여성의쉼없는노동에서느낀큰아픔이「길」이라는시로육화되었고,바다의고체성을강화시킨흔적입니다.소금의이동수단이된당나귀의노동까지더불어연민의정서가함께했습니다.
그객체들,사물들,자연물들이소우주를형성하고저의시안에서아직거듭생성중에있습니다.인간의유한성과맞닿아있으나또다른존재양식인사물들의세계이기도하지요.화자가느끼는여러억압으로부터해방공간은도시적삶의황폐함과는다른대자연적요소이지만,그자연계의요소들에많은의문을가지고있습니다.그‘객체들’에대한탐색을위해계속공부할예정입니다.

Q4.이시집에서특별히아끼는시가있다면무엇인지궁금합니다.그이유도요.

육아노동에심하게노출된시기에쓴시입니다.신체해체의경험,아니수면부족의그궁핍함속에서……호호,이렇게표현해도될까요?누적된피로의결과물인꿀잠,낮잠은존재를해체시키고해방시키는지경에이르게하지요.그때쓴시가시집을묶는과정에저에게좀유쾌한시라고느껴졌습니다.또한바다이미지를순수하게받아들이던몽환적시이기도한오래된시,봄날의시,「햇살이참따뜻하고좋다고중얼거리다가」입니다.

Q5.마지막으로,『끝없는폭설위에몇개의이가또빠지다』를읽을독자들에게인사를건네주세요.

제목이좀엽기적이죠.
여러분을만나뵙게되어영광입니다.
목탄이쓴상상극장의시가개봉했습니다.
극장이너무어둡죠.천천히자리에앉아주셔요.
귀기울여존재들의말을들어주실래요.
다음기회엔
유쾌하고신나는익살과환희의말들을되직하게섞고곁들여
독자여러분을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