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사람 아닌 것 - 문학동네 시인선 189

오직 사람 아닌 것 - 문학동네 시인선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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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저기 흙 묻은 사람들이 가네
다시 벼와 찰보리를 기리고 섬기는 곳으로 가네”

잊힌 정경 안에 기거하던, 사람의 본모습을 길어올리는 시선
인간 시선의 구석과 그 구석 속 존재들을 밝히고, 그들에게 시의 자리를 내어주었던 이덕규가 네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보인다. 문학동네시인선 189번 『오직 사람 아닌 것』이다. 그 스스로 자임하듯 시인은 “캄캄한 흙속에서 사람이라는 종자로 싹을 틔운 최초의 기쁨”(「농부」)으로서, 자연의 이야기를 시로 풀어낸다. 자연은 사람이 태어난 장소이자, 지금은 멀리 떠나온 집이다. 사람이 떠난 빈집은 일견 황폐하고 허름해 보이지만, 그 속은 오히려 사람 아닌 것들이 왕성히 움직이는 터전이 되었다. 자연을 잊고 인위의 논리를 내세우다 오히려 병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보란듯이, 밀려난 생명들이 찬란한 활기를 뽐낸다. 이덕규는 이들 ‘오직 사람 아닌 것’이 사람보다 앞서 걸으며 선보이는 아름다운 선례를 ‘농부’이기에 가능한 세밀화로 포착해낸다.

맑은 정오, 항아리에 이슬 내린 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눈이 퀭한 짐승이 그 안에 비친 검은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다

산 너머 사리 바다에서 물고기 우는 소리가 종일토록 넘어왔다

먼길을 돌아 일 년 만에 지상에 내려온 누님 발등이 소복이 부어 있었다
_「백중(百中)」 부분

이덕규는 실로 ‘정경(情景)’의 전문가라 할 만하다. “오색 관을 쓴 새”가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는 풍경으로부터 길어올려지는 서러운 서글픔이 있다. 시인은 어미 새가 아기 새에게 먹이를 전해주듯 감정을 반죽으로 넘겨주기보다, 풍경을 통해 정서를 간접적으로 일으킨다. 그제야 밝혀지는 것은 애타는 그리움의 정서가 대상에 빗대어 암시될 때 독자의 마음속에 파문이 자생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가지각색인 억양과 강세, 음의 진동과 고저, 즉 그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새겨지는 정서는 감정을 돋을새김한다. 시인은 그러한 새김만이 시의 경지이고 책무이며 정직한 수행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렇게 시집은 시적인 정경을 담아낸다. 시인은 “가마니를 치는 때 맞춰 첫눈이 오고 꿩과 토끼들이 사람의 마을 가까이로 내려오는”(「때와 일」) 것처럼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삶을 주목한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감히 물물교환 시대를 살았던 그때”(「우리, 오래된 미래」)의 모습들은 우리가 잊고 잃은 천성이기도 하다. 다만 시인이 읊는 정경은 과거를 향하는 맹목이나 자조적인 회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는 그 시절을 아는 이에게는 익숙하고 그리운 기억을 묘사하는 언어가 되고, 지금 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의 손이 일구어내는 연대기를 그려내며, 아직 경험해본 적 없는 이에게는 “깊은 물속에 하루쯤 가라앉아 쉬고 싶은”(「고독의 진화」) 지친 몸과 마음을 보듬는 본향이 되어준다.

장마 끝에 온갖 벌레와 곤충이 울었고 처음 보는 꽃들이 은하수처럼 무더기무더기로 흘러갔다
사라졌던 것들이 짝을 맞춰 돌아왔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 손이 멈춘 곳
사람 발길이 끊긴 들판 한가운데
묵정논 한 배미가 생명의 섬처럼 떠 있다
농약과 화학비료의 바다에 노아의 방주처럼 떠 있다
_「묵정논」 부분

또한 이덕규는 하나의 삶을 소박하게 내놓는 일에 자족하지도 않는다. 시집의 이곳저곳에는 앞만 바라보는 우리의 발길을 잡아채는 돌부리들이 놓여 있다. 그 서늘한 비판의식 안에 담긴 것은 사라진, 그리고 사라질 존재들에 대한 염려다. 사람이 구조에 더 효율적으로 복무하기 위해 저버리고 내던져버린 것들이 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저버린 ‘오래된 미래’에 있었다는 깨달음을 시인은 간곡히 전한다. “사람 발길이 끊긴” 묵정논이 오히려 온갖 생명의 보고가 되어준 실상을 환기하며, 시인은 “흙 묻은 사람들”(「흙 묻은 맨발들의 저문 노래」)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그려본다. “다른 이들의 체온과 맥박”(「업어주는 사람」)을 품은 그들은 어디에서든 생명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 전범으로부터 우리의 내일을 그려보는 일이야말로 바로 시가 해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소임이라는 것이 시인의 올곧은 믿음이다.
시인은 ‘오직 사람 아닌 것’들을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사회적 존재라던 사람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사람을 탕진하고”(「빈자리」) “막막한 벽과/ 겸상”(「혼밥」)하면서, “마지막까지 무례한 삶”(「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한 켤레」)이 강요하는 “고독이라는 맹독성 침묵”을 견디지 못한 채 “뭍에서 물속으로 들어”(「고독의 진화」)가거나 사람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곰으로 돌아가는 사람」) 않는가. 하여 시인은 다시 통렬하게 묻는다. 자연의 정경 속에서 누구보다도 생명답게 살아가는 존재들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은 채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에게 외면받았던 이들 ‘사람 아닌 것’들이 볏단처럼 서로에게 기대어 만들어내는 조화가 시집에 있다. 이들에게 사람이 다시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 ‘사람 아닌 것’들이 사람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이다. 농촌의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하여 상투성과 고정관념에 빠지기 쉽지만,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새롭고 낯선 미적 지평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 그만의 시각과 인식으로 내면을 파고드는 시간의 침습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낙원에서 실낙원으로, 다시 복낙원으로 이행하는 감각과 의식의 극적인 변화가 시의 바탕을 형성해왔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가 폭발시킨 감각의 세계처럼, ‘나’와 ‘나’를 넘어선 본향의 이야기를 그 바탕 위에서 감각하고 발굴해낸다면, 어떤 개념으로도 묶을 수 없는 낯선 장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_이순현 해설, 「발굴하는 자와 발굴되는 자」 부분
저자

이덕규

1961년경기화성에서태어났다.1998년[현대시학]으로등단했다.시집으로『다국적구름공장안을엿보다』『밥그릇경전』『놈이었습니다』등이있다.현대시학작품상,시작문학상,오장환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그밤으로가는달구지

흰죽/백중(百中)/소식/청명/때와일/그밤으로가는달구지/우리,오래된미래/황소배미전설-우는논두렁/흙묻은맨발들의저문노래/도깨비/참붕어한마리/밥벌레/융릉/풍경

2부묵정논

농부/입동/가을걷이끝나자마자서둘러빈손으로떠난오직/사람아닌것들의목록/가자!부처님절받으러/파업/빈자리/혼밥/백년만의폭염속으로/그많던일꾼들은다어디로갔을까/부정(不淨)/비행기똥-스티로폼/그래도잡초는힘이세다/묵정논/통나무와놀다/다디단종점

3부꽃은꽃을버리고기꺼이사람의일을따라나섰네

촛불을끄다/꽃의장례/11월/도굴/글썽거린다는것은/상처없이피가나오는날도있었다/물위의독서/마음이끄는이누구신가/비올확률오십프로/분신(焚身)/이제막눈이녹으려할때/돈을밟고오다/견성한개는주인을물어죽이기도한다/말귀/이름허물기/칼의성혼선언/맥낚시

4부사람에발이묶여

낙심(落心)/섬/먼곳/나무의뒷모습/고독의진화/곰으로돌아가는사람/가지런히벗어놓은신발한켤레/우는인형/독버섯/귀곡성/업어주는사람/사람에발이묶여

해설|발굴하는자와발굴되는자
이순현(시인)

출판사 서평

“저기흙묻은사람들이가네
다시벼와찰보리를기리고섬기는곳으로가네”

잊힌정경안에기거하던,사람의본모습을길어올리는시선

인간시선의구석과그구석속존재들을밝히고,그들에게시의자리를내어주었던이덕규가네번째시집을세상에내보인다.문학동네시인선189번『오직사람아닌것』이다.그스스로자임하듯시인은“캄캄한흙속에서사람이라는종자로싹을틔운최초의기쁨”(「농부」)으로서,자연의이야기를시로풀어낸다.자연은사람이태어난장소이자,지금은멀리떠나온집이다.사람이떠난빈집은일견황폐하고허름해보이지만,그속은오히려사람아닌것들이왕성히움직이는터전이되었다.자연을잊고인위의논리를내세우다오히려병들어가는사람에게는보란듯이,밀려난생명들이찬란한활기를뽐낸다.이덕규는이들‘오직사람아닌것’이사람보다앞서걸으며선보이는아름다운선례를‘농부’이기에가능한세밀화로포착해낸다.

맑은정오,항아리에이슬내린물이가득차올라있었다

눈이퀭한짐승이그안에비친검은그림자를들여다보았다

산너머사리바다에서물고기우는소리가종일토록넘어왔다

먼길을돌아일년만에지상에내려온누님발등이소복이부어있었다
_「백중(百中)」부분

이덕규는실로‘정경(情景)’의전문가라할만하다.“오색관을쓴새”가항아리속을들여다보는풍경으로부터길어올려지는서러운서글픔이있다.시인은어미새가아기새에게먹이를전해주듯감정을반죽으로넘겨주기보다,풍경을통해정서를간접적으로일으킨다.그제야밝혀지는것은애타는그리움의정서가대상에빗대어암시될때독자의마음속에파문이자생한다는것이다.사람마다가지각색인억양과강세,음의진동과고저,즉그자신의고유한목소리로새겨지는정서는감정을돋을새김한다.시인은그러한새김만이시의경지이고책무이며정직한수행이라고여기는듯하다.

그렇게시집은시적인정경을담아낸다.시인은“가마니를치는때맞춰첫눈이오고꿩과토끼들이사람의마을가까이로내려오는”(「때와일」)것처럼자연과사람이어우러져빚어내는삶을주목한다.“내가그리고우리가감히물물교환시대를살았던그때”(「우리,오래된미래」)의모습들은우리가잊고잃은천성이기도하다.다만시인이읊는정경은과거를향하는맹목이나자조적인회상에국한되지않는다.시는그시절을아는이에게는익숙하고그리운기억을묘사하는언어가되고,지금그삶을살아가는이들에게는그의손이일구어내는연대기를그려내며,아직경험해본적없는이에게는“깊은물속에하루쯤가라앉아쉬고싶은”(「고독의진화」)지친몸과마음을보듬는본향이되어준다.

장마끝에온갖벌레와곤충이울었고처음보는꽃들이은하수처럼무더기무더기로흘러갔다
사라졌던것들이짝을맞춰돌아왔다
어디서오는지알수없었다
사람들손이멈춘곳
사람발길이끊긴들판한가운데
묵정논한배미가생명의섬처럼떠있다
농약과화학비료의바다에노아의방주처럼떠있다
_「묵정논」부분

또한이덕규는하나의삶을소박하게내놓는일에자족하지도않는다.시집의이곳저곳에는앞만바라보는우리의발길을잡아채는돌부리들이놓여있다.그서늘한비판의식안에담긴것은사라진,그리고사라질존재들에대한염려다.사람이구조에더효율적으로복무하기위해저버리고내던져버린것들이있다.그러나정작사람이사람답게살아갈수있는가능성은우리가저버린‘오래된미래’에있었다는깨달음을시인은간곡히전한다.“사람발길이끊긴”묵정논이오히려온갖생명의보고가되어준실상을환기하며,시인은“흙묻은사람들”(「흙묻은맨발들의저문노래」)의발걸음이향하는곳을그려본다.“다른이들의체온과맥박”(「업어주는사람」)을품은그들은어디에서든생명을만들어낼것이다.그전범으로부터우리의내일을그려보는일이야말로바로시가해낼수있는가장정직한소임이라는것이시인의올곧은믿음이다.

시인은‘오직사람아닌것’들을통해독자에게말을건넨다.사회적존재라던사람은과연어떤모습을하고있는가.“사람을탕진하고”(「빈자리」)“막막한벽과/겸상”(「혼밥」)하면서,“마지막까지무례한삶”(「가지런히벗어놓은신발한켤레」)이강요하는“고독이라는맹독성침묵”을견디지못한채“뭍에서물속으로들어”(「고독의진화」)가거나사람이된것을후회하지는(「곰으로돌아가는사람」)않는가.하여시인은다시통렬하게묻는다.자연의정경속에서누구보다도생명답게살아가는존재들이누구인지.드러나지않은채로묵묵히자신의일을했기때문에사람에게외면받았던이들‘사람아닌것’들이볏단처럼서로에게기대어만들어내는조화가시집에있다.이들에게사람이다시배울수있다면어떨까.‘사람아닌것’들이사람을일으켜세우기위해다가오고있다.

가장오래된것이가장새로운것이다.농촌의이야기는너무나익숙하여상투성과고정관념에빠지기쉽지만,어떻게접근하느냐에따라새롭고낯선미적지평이가능하다는점을이시집은보여준다.그만의시각과인식으로내면을파고드는시간의침습을이겨냈다는것이다.낙원에서실낙원으로,다시복낙원으로이행하는감각과의식의극적인변화가시의바탕을형성해왔다.프루스트의‘마들렌과자’가폭발시킨감각의세계처럼,‘나’와‘나’를넘어선본향의이야기를그바탕위에서감각하고발굴해낸다면,어떤개념으로도묶을수없는낯선장르를만날수있을것이다.
_이순현해설,「발굴하는자와발굴되는자」부분

■시인의말

당신이곤고했던농부의몸에서내린밤
집앞텃논에평생새긴별보다많은발자국이한순간환하게하늘로올라가는걸보았습니다.

나는이제저어둑해진텃논의유업을밝히기위해

날마다맨발로소를몰고나가
캄캄한무논을갈아엎는심정으로당신의빛나는발자국을따라가겠습니다.

2023년3월
이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