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정홍수의 문학은 가버릴 것으로 도래하는
가버린 것의 슬픔 앞에 속수무책의 사랑을 주문한다.” _신수정(문학평론가)
매일의 겸허한 노동-쓰기로 포개어지는 시간의 연대
가버린 것의 슬픔 앞에 속수무책의 사랑을 주문한다.” _신수정(문학평론가)
매일의 겸허한 노동-쓰기로 포개어지는 시간의 연대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세번째 평론집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제24회 대산문학상을 안겨준 전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이후 9년 만의 신작 평론집이다. “구체적인 삶의 지문(指紋)을 과하지 않은 미문(美文)에 담아”낸 “문학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기에 긍정적이고 책임감 있는 평론”이라는 당시의 심사평은 그의 세번째 평론집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에 더하여 작품과 작가를 향한 신실한 시선은 매일의 겸허한 노동으로서의 쓰기로 이어지고, 종내 ‘안타까움의 미학’이라고 부를 법한 특유의 비평세계를 축성하는 데 이른다.
이번 책의 제목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은 정홍수 미학을 설명하는 결정적 한 문장일 것이다. 구체적 텍스트에서 삶의 구체성을 길어내 독자들의 품에 안겨주는 그의 쓰기 속에서, 이미 ‘가버린 것들’은 현재형으로 되살아나 새롭게 움트기 시작한다. 나아가, 생생한 눈앞의 삶-글에서 ‘가버릴 것들’을 움키듯 읽어내고, 미세한 떨림과 조짐에조차 반응하며 써내려가는 그의 글은, 과연 “속절없는 시간을 향한 문학의 안간힘이자 마지막 표정이라고 할 만하다”(신수정). 그 시간-들의 중첩과 연대 속에서 문학은, 삶은, 사랑은 잇대어지고 또 순환하는 것이리라.
‘가버린 것들’만이 아니라 ‘가버릴 것들’이 있는 시간. 그 사이를 잇대는 사랑이라는 말. 과거의 틈입에도 열려 있지만 가버릴 시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도 개방되어 있는 현재를 시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 처음의 굴절과 상실, 가지 못한 길의 회한, 현재의 누추와 불안, 기다림과 약속의 실패, 그래서는 이미 도래한 것들의 좌절 속에서 미래를 감싸는, 그 모든 시간의 성실한 누적과 포갬으로만 가능한 어떤 세계. 그런 시간의 연대 안에서라면 시인의 말대로 “모두가 다시 일어나 새로운 시작의 힘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까.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 채로 그런 시작의 힘을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학을 읽고 문학에 대해 쓰는 시간이 그런 사랑으로 잇대어지기를 소망해보았다. _「책머리에」에서
“있다면, 이 무지를 껴안는 것이 사랑일 테다.”
정홍수의 비평이 존재하는 한, 한국문학에 사각(死角)이란 없을 것이다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은 총 4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문학을 향한 그의 처음 마음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 작가들을 다룬다. 김윤식, 서정인, 윤흥길, 황석영. 평론가 정홍수에게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자, 한국문학의 기라성인 이 거장들의 작가론을 야심과 공력을 한데 모아 선보인다. 텍스트에 바싹 다가들어 작품과 시대와 사회를 읽어내는가 하면, 일순 툭 하고 마음과 기억을 술회하는 인장과도 같은 그의 문체는 그리움을 한결 증폭시킨다. 예외적이거니와 각별한 애정을 듬뿍 담아 쓴 필립 로스론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해줘 고마워요」는 ‘삶의 구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화두와 한 지향점을 읽어낼 수 있는 보고다. “이야기는 사회적ㆍ역사적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결국은 단독성의 자리로 돌아와서 끝이 난”다는 것, “‘최상’이나 ‘무결’의 이야기가 아니라 ‘최악’과 ‘오점’의 인간 경험이 더 많이 포착되고 그려지는 것도 거기에 모순과 불완전성에서 유래하는 인간의 생생한 현재가 있”(138쪽)다는 통찰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2부는 ‘문학과 정치’ ‘황정은과 김혜진’ ‘편혜영과 윤대녕’과 같은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따로 또 함께 읽어낼 작가와 작품을 유비하며 전개되는 글들을 배치했다. “소설은 하나의 진리를 향한 경연장이 아니”라는 사실, “소설을 설명하고 규정하는 하나의 메타-언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소설의 축복”(「역사적 귀환과 ‘이름 없는 가능성들’의 발굴」, 252쪽)이라는 분석은 그의 비평 자체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증명된다. 더불어 시대에 다급하게 화답하듯 쓰인 「단절과 침묵, 그리고 ‘이어짐’의 상상력」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민주주의 원칙이자 목표인 평등의 이상을 향해 우리가 함께 그려가야 할 지도에는 ‘그리움’과 ‘사라짐’, 불가피한 단절과 침묵을 수락하면서도 서로를 이으면서 밀고 가는 문학의 상상력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167쪽)라는 그의 문장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무른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특히 차별과 혐오의 일상을 새롭게 폭로하고 개선하려는 긴박한 요구에 이어져 있지만, 거기에 개재된 모종의 근본주의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해야 마땅한 거리와 침묵의 영역을 삭제하기도 한다. 과도한 투명성과 가시성의 요구는 사회 관계망 서비스의 확산을 타고 ‘전짓불의 심문’을 은밀하지만 동시에 거의 공개적인 일상의 상호 정치적·윤리적 낙인 방식으로 만든다.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발견하고 확장하는 것과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 테다. 이 차이를 망각할 때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으로 대체됨으로써 ‘공적 영역’의 포기를 무의식적으로 옹호할 수도 있다. _「단절과 침묵, 그리고 ‘이어짐’의 상상력」(150쪽)
3부는 한국문학장의 최전선에서 읽고 쓴 작품들로 채워졌다. 이서수, 이승주와 같은 젊은 작가에서부터 이승우, 이혜경, 최윤과 같은 중견 작가에 이르기까지 장단편을 막론하고 생생한 한국문학의 오늘을 가득 담았다. 특히 김금희의 작품을 다룬 「마음의 접속면을 따라가는 소설의 시선」 그리고 「권여선 소설에 대한 세 편의 글」은 짧은 한 편의 글을 쓰더라도 전작주의자의 면모를 선보이는 정홍수의 물샐틈없는 꼼꼼함과 성실함이 돋보이는 예일 것이다. 작가의 표현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자면 “정말 어지간한”(335쪽) 꼼꼼함이다.
4부에서는 최정례, 장석과 같은 시인의 작품에서 임우기, 강경석에 이르는 비평가의 작품까지를 읽어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홍수의 시선은 도무지 빈틈을 만들어내지 않는데, 이는 거장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서부터 다시금 문학장으로 귀환한 작가, 시류와 무관하게 묵묵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일구어나가는 작가 이 모두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다시 말해 가버린 것들과 가버릴 것들 모두 정홍수라는 강으로 모여들어 줄기차게 흐른다. 온 마음을 걸어 쓰는 이러한 정홍수의 비평이 존재하는 한, 한국문학에 사각(死角)이란 없을 것이다.
소설은 결국 ‘현실이라는 것’을 그것의 상투적이고 즉자적인 상태로부터 개방해내는 일이다. 개방, 열림과 트임을 가로막는 것은 주어진 현실의 여러 요소와 그 복잡하고 착잡한 연관으로부터도 오지만, 언어와 소설의 관습, 내부의 미학으로부터도 발생한다. 그런 장애들을 헤치고 현실을 새롭게 파악하고 재정의하는 일, 현실의 결을 살려내는 일은 버겁다. 버거운 것은 그 작업이 언제든 전체로서의 현실과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체에 대한 지도가 이념의 형식이나 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지금, 세부 현실을 그것을 넘어서는 지점을 포함해서 붙잡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연관을 ‘전체’에 대한 무력감으로 지워버리고 무시해서도 안 되며, 그렇게 지워진 공백을 소설의 남은 영토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_「전체로서의 현실을 열기 위해」(203~204쪽)
이번 책의 제목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은 정홍수 미학을 설명하는 결정적 한 문장일 것이다. 구체적 텍스트에서 삶의 구체성을 길어내 독자들의 품에 안겨주는 그의 쓰기 속에서, 이미 ‘가버린 것들’은 현재형으로 되살아나 새롭게 움트기 시작한다. 나아가, 생생한 눈앞의 삶-글에서 ‘가버릴 것들’을 움키듯 읽어내고, 미세한 떨림과 조짐에조차 반응하며 써내려가는 그의 글은, 과연 “속절없는 시간을 향한 문학의 안간힘이자 마지막 표정이라고 할 만하다”(신수정). 그 시간-들의 중첩과 연대 속에서 문학은, 삶은, 사랑은 잇대어지고 또 순환하는 것이리라.
‘가버린 것들’만이 아니라 ‘가버릴 것들’이 있는 시간. 그 사이를 잇대는 사랑이라는 말. 과거의 틈입에도 열려 있지만 가버릴 시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도 개방되어 있는 현재를 시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 처음의 굴절과 상실, 가지 못한 길의 회한, 현재의 누추와 불안, 기다림과 약속의 실패, 그래서는 이미 도래한 것들의 좌절 속에서 미래를 감싸는, 그 모든 시간의 성실한 누적과 포갬으로만 가능한 어떤 세계. 그런 시간의 연대 안에서라면 시인의 말대로 “모두가 다시 일어나 새로운 시작의 힘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까.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 채로 그런 시작의 힘을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학을 읽고 문학에 대해 쓰는 시간이 그런 사랑으로 잇대어지기를 소망해보았다. _「책머리에」에서
“있다면, 이 무지를 껴안는 것이 사랑일 테다.”
정홍수의 비평이 존재하는 한, 한국문학에 사각(死角)이란 없을 것이다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은 총 4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문학을 향한 그의 처음 마음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 작가들을 다룬다. 김윤식, 서정인, 윤흥길, 황석영. 평론가 정홍수에게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자, 한국문학의 기라성인 이 거장들의 작가론을 야심과 공력을 한데 모아 선보인다. 텍스트에 바싹 다가들어 작품과 시대와 사회를 읽어내는가 하면, 일순 툭 하고 마음과 기억을 술회하는 인장과도 같은 그의 문체는 그리움을 한결 증폭시킨다. 예외적이거니와 각별한 애정을 듬뿍 담아 쓴 필립 로스론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해줘 고마워요」는 ‘삶의 구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화두와 한 지향점을 읽어낼 수 있는 보고다. “이야기는 사회적ㆍ역사적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결국은 단독성의 자리로 돌아와서 끝이 난”다는 것, “‘최상’이나 ‘무결’의 이야기가 아니라 ‘최악’과 ‘오점’의 인간 경험이 더 많이 포착되고 그려지는 것도 거기에 모순과 불완전성에서 유래하는 인간의 생생한 현재가 있”(138쪽)다는 통찰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2부는 ‘문학과 정치’ ‘황정은과 김혜진’ ‘편혜영과 윤대녕’과 같은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따로 또 함께 읽어낼 작가와 작품을 유비하며 전개되는 글들을 배치했다. “소설은 하나의 진리를 향한 경연장이 아니”라는 사실, “소설을 설명하고 규정하는 하나의 메타-언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소설의 축복”(「역사적 귀환과 ‘이름 없는 가능성들’의 발굴」, 252쪽)이라는 분석은 그의 비평 자체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증명된다. 더불어 시대에 다급하게 화답하듯 쓰인 「단절과 침묵, 그리고 ‘이어짐’의 상상력」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민주주의 원칙이자 목표인 평등의 이상을 향해 우리가 함께 그려가야 할 지도에는 ‘그리움’과 ‘사라짐’, 불가피한 단절과 침묵을 수락하면서도 서로를 이으면서 밀고 가는 문학의 상상력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167쪽)라는 그의 문장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무른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특히 차별과 혐오의 일상을 새롭게 폭로하고 개선하려는 긴박한 요구에 이어져 있지만, 거기에 개재된 모종의 근본주의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해야 마땅한 거리와 침묵의 영역을 삭제하기도 한다. 과도한 투명성과 가시성의 요구는 사회 관계망 서비스의 확산을 타고 ‘전짓불의 심문’을 은밀하지만 동시에 거의 공개적인 일상의 상호 정치적·윤리적 낙인 방식으로 만든다.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발견하고 확장하는 것과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 테다. 이 차이를 망각할 때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으로 대체됨으로써 ‘공적 영역’의 포기를 무의식적으로 옹호할 수도 있다. _「단절과 침묵, 그리고 ‘이어짐’의 상상력」(150쪽)
3부는 한국문학장의 최전선에서 읽고 쓴 작품들로 채워졌다. 이서수, 이승주와 같은 젊은 작가에서부터 이승우, 이혜경, 최윤과 같은 중견 작가에 이르기까지 장단편을 막론하고 생생한 한국문학의 오늘을 가득 담았다. 특히 김금희의 작품을 다룬 「마음의 접속면을 따라가는 소설의 시선」 그리고 「권여선 소설에 대한 세 편의 글」은 짧은 한 편의 글을 쓰더라도 전작주의자의 면모를 선보이는 정홍수의 물샐틈없는 꼼꼼함과 성실함이 돋보이는 예일 것이다. 작가의 표현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자면 “정말 어지간한”(335쪽) 꼼꼼함이다.
4부에서는 최정례, 장석과 같은 시인의 작품에서 임우기, 강경석에 이르는 비평가의 작품까지를 읽어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홍수의 시선은 도무지 빈틈을 만들어내지 않는데, 이는 거장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서부터 다시금 문학장으로 귀환한 작가, 시류와 무관하게 묵묵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일구어나가는 작가 이 모두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다시 말해 가버린 것들과 가버릴 것들 모두 정홍수라는 강으로 모여들어 줄기차게 흐른다. 온 마음을 걸어 쓰는 이러한 정홍수의 비평이 존재하는 한, 한국문학에 사각(死角)이란 없을 것이다.
소설은 결국 ‘현실이라는 것’을 그것의 상투적이고 즉자적인 상태로부터 개방해내는 일이다. 개방, 열림과 트임을 가로막는 것은 주어진 현실의 여러 요소와 그 복잡하고 착잡한 연관으로부터도 오지만, 언어와 소설의 관습, 내부의 미학으로부터도 발생한다. 그런 장애들을 헤치고 현실을 새롭게 파악하고 재정의하는 일, 현실의 결을 살려내는 일은 버겁다. 버거운 것은 그 작업이 언제든 전체로서의 현실과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체에 대한 지도가 이념의 형식이나 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지금, 세부 현실을 그것을 넘어서는 지점을 포함해서 붙잡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연관을 ‘전체’에 대한 무력감으로 지워버리고 무시해서도 안 되며, 그렇게 지워진 공백을 소설의 남은 영토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_「전체로서의 현실을 열기 위해」(203~204쪽)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 - 문학동네 평론
$2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