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아무 대가 없이 사랑해줄 수는 없어요?”
사랑을 위한 기초, 세계를 건축하는 행위로서의 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온 천사들이 부르는 처절하고 다정한 노래
제11회 문지문학상 수상작 「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 수록
사랑을 위한 기초, 세계를 건축하는 행위로서의 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온 천사들이 부르는 처절하고 다정한 노래
제11회 문지문학상 수상작 「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 수록
2012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한 이후 첫 시집 『가능세계』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도움받는 기분』까지 펴내는 시집마다 한국 시의 가장 내밀한 고백이 되어온 백은선의 네번째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이 출간되었다. 지금 여기의 시단에서 ‘백은선 마니아’들이 유독 존재감을 지니는 이유는 백은선의 시가 읽는 이의 마음을 깊게 찔러 고유한 일기를 끄집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시집의 제목은 상자를 열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상자를 바라보고 의식하는 눈을 암시한다. 그런 상자 안에 담긴 것은 홀로 직면하기에 버거운 것일 테다. 이를테면 세상의 기준에 위축되어 상자에 담길 정도로 옹송그려진 자신, 그리고 연모하는 이를 향한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랑의 마음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영속되는 괴로움을 해체하는 시작이며, 사랑하는 이에게 나아가는 첫걸음이 된다는 것이 백은선의 시가 알려주는 진실이다. “새로운 심장의 발명”(이원)이라는 평을 이끈 문지문학상 수상작들이 수록된 이 시집에서 독자는 사랑을 위한 기초이자 세계를 건축하는 행위로서 백은선의 다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커다란 기차를 생각했어 기차를 끌어당기는 은빛 선로에 대해 생각했어 그 안에 가득찬 빼곡한 숨을 숨찬 주문을 들으며 들으며 귓속으로 쏟아지는 계속되는 것을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순환의 지독함과 아름다움을 액자 속에 걸려 천 년 동안 서서히 밝아지는 동시에 스러지는 이미지를 떠올렸어 그것을 온전한 절망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은 없기에 책 속에 머리를 박고 활자를 중얼거리며 기차가 달리는 리듬으로 한 문단 한 문단 달리고 달리며 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 출렁이는 물속을 들여다보려 애를 썼고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는 심장처럼 물은 검기만 했고 숨찬 내일 무한을 잠시 엿본 것만 같다고 꽃이 꽃꽃꽃꽃 달리고 달이 달달달달 떨리고 숲이 숲숲숲숲 웃어대는 리듬 속에서 숨찬 내일 두 손을 휘저으며 끝없이 두 손을 휘저으며 이렇게 시끄러운 밤 어떻게 너는 꿈을 꾸고 잠을 자는가 그것이 정말인가 무엇을 향하는지도 모르고 삿대질을 하며 울던 줄곧 가지고 다닌 두 손
손목을 은빛 선로 위에 둔 채 기다리고 있다 기적이 가까워지기를
_「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 부분
시를 읽으며 자신의 언어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인가. “나는 눈을 뜨는 순간 빛의 세계에서 탈락했”(「비신비」)다고 느끼며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줄 순 없으니 차라리 스스로를 숨기고 싶은 이들(“빛나는 것은/ 전부 두 손 안에 있는데// 어째서 자꾸만 숨기고 싶어지는 걸까”(「형상기억합금」)). “한 대 맞고 웃는 일은 너무 쉽다”(「엔젤: 러브레터」)고, “아무리 많은 고통도 현재의 방패가 되어주진 않는다”(「섭(攝)」)며 지나온 생이 자신에게 남겨놓은 상처와 이물감을 실감하는 이들. “이토록 많은 시공간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게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게 끔찍해서 눈물이 날 거 같았다”(「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고 말하는, 감정에 젖어들 때에도 그것을 설명할 언어를 찾느라 눈물이 멎는 이들이다. 백은선은 고통의 전문가라고 할 만큼 삶이 야기하는 괴로움과 아픔에 집중하면서도, 고통의 조건과 인간의 기저를 명징하게 꿰뚫어본다. 하지만 백은선의 관찰이 말뿐인 허울에 그치지 않는 것은 그가 바라보고 말해보는 행위로 자족하지 않은 채, 운명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언제나 인간보다 거대한 운명이 기차가 되어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다가온다면, 선로 위에 자신의 손목을 내어주리라 결심한다. 그럴 때 운명과 자신은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는 관계가 될 터이므로.
우린 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사랑이 아닌 것도. 손이 바빠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우물거리며 고기와 와인을 먹고 커피를 마셨지.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똑똑해진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장면들을 돌려보며 팝콘처럼 터지는 웃음, 열매처럼 뚝 떨어지는 눈물. 계속해봐! 더 해봐! 서로의 등을 밀며 기차는 달린다. 너는 빨강 너는 초록 나는 검정. 모든 게 멋지고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나의 옷을 돌려 입으며, 나는 가끔 무한히 길어질 수 있을 것 같아. 말하려는 순간 딸꾹질이 시작된다.
_「만나서 시쓰기」 부분
실로 백은선의 시는 더이상 구원과 낭만을 믿지 않게 되어 “날개를 접고 내려앉은”(「진실은 구체적이다」) 천사들이 가장 낮고 단단한 지면에서 발을 내딛는 행위이다. 그 천사들은 익숙한 신의 사랑이 아니라 어설픈 인간의 다정을 부단히 반복한다. 파토스 가득한 어조, 자유롭고 아름다운 비약, 솔직한 내면의 고백 등 백은선에 뒤따르는 수식어들이 있지만, 그 사이에서 백은선의 다정은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물론 백은선은 손쉬운 다정을 믿지 않는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다정해지는 게 있나요?”(「앙망」) “사람이 이 이상 다정할 수 있어? 묻지만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어요”(「픽션다이어리」). 그러나 “마음이라는 이 좆같고 애매한 말!”(「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이라고 외치며 세계와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려는 이가 꺼내는 마음에는 진실이 담겨 있기에 진심이라고 이르게 된다.
백은선의 시가 솔직하다면 그가 정직하기 때문이다. 올곧게 사랑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아무 대가 없이 사랑해줄 수는 없어요?”(「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묻는 백은선의 질문은 사랑에 주저하는 이들의 폐부를 찌르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건넬 편지지가 되어준다. 글씨를 연습하듯 백은선의 문장을 따라 쓰는 동안, 읽는 이는 백은선의 다정을 자기에게 옮겨담게 될 것이다. 그 다정은 곧, 사랑 앞에서 자신을 허무는 자세이자, 시야를 좁혀 사랑하는 이를 그대로 바라보는 눈맞춤이고, 사랑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이며, 사랑만 있다면 신이 없는 세상도 괜찮다는 의연한 믿음이리라.
백은선의 시가 반드시 우리 앞을 가로막는 한계를 뛰어넘고 초월하게 하는 물리적인 날개가 되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시를 읽고 마음이 북받쳐 뛰어오르고도 장대에 걸려 철푸덕 넘어져 이가 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와 가능성, 무한이라는 단어가 지긋지긋해서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땐 의심과 번복을 꼬리에 주렁주렁 달고도 이어지는 백은선의 다정을 생각해보자. 그 언어가 어떻게 우리에게 계속하고 반복할 수 있는 의지와 연습이 되어주는지를. 문학이 삶을 닮고, 삶이 문학을 닮아가는 우리는 만나서 시를 쓸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백은선에게 배운 시이자, 백은선의 시를 읽은 이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고픈 삶의 태도였다.
_편집자의 말 「다정한 시」 부분*
* 백은선 시인과 담당 편집자가 시집의 편집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수록 시들에 대한 이해가 서로 크게 겹치고 있다는 생각이 감돌았고, 보통의 시집 말미에 해설이나 발문을 싣는 것과 달리 시인이 편집자의 목소리가 들어가길 요청해 ‘편집자의 말’이 수록되었다.
커다란 기차를 생각했어 기차를 끌어당기는 은빛 선로에 대해 생각했어 그 안에 가득찬 빼곡한 숨을 숨찬 주문을 들으며 들으며 귓속으로 쏟아지는 계속되는 것을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순환의 지독함과 아름다움을 액자 속에 걸려 천 년 동안 서서히 밝아지는 동시에 스러지는 이미지를 떠올렸어 그것을 온전한 절망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은 없기에 책 속에 머리를 박고 활자를 중얼거리며 기차가 달리는 리듬으로 한 문단 한 문단 달리고 달리며 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 출렁이는 물속을 들여다보려 애를 썼고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는 심장처럼 물은 검기만 했고 숨찬 내일 무한을 잠시 엿본 것만 같다고 꽃이 꽃꽃꽃꽃 달리고 달이 달달달달 떨리고 숲이 숲숲숲숲 웃어대는 리듬 속에서 숨찬 내일 두 손을 휘저으며 끝없이 두 손을 휘저으며 이렇게 시끄러운 밤 어떻게 너는 꿈을 꾸고 잠을 자는가 그것이 정말인가 무엇을 향하는지도 모르고 삿대질을 하며 울던 줄곧 가지고 다닌 두 손
손목을 은빛 선로 위에 둔 채 기다리고 있다 기적이 가까워지기를
_「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 부분
시를 읽으며 자신의 언어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인가. “나는 눈을 뜨는 순간 빛의 세계에서 탈락했”(「비신비」)다고 느끼며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줄 순 없으니 차라리 스스로를 숨기고 싶은 이들(“빛나는 것은/ 전부 두 손 안에 있는데// 어째서 자꾸만 숨기고 싶어지는 걸까”(「형상기억합금」)). “한 대 맞고 웃는 일은 너무 쉽다”(「엔젤: 러브레터」)고, “아무리 많은 고통도 현재의 방패가 되어주진 않는다”(「섭(攝)」)며 지나온 생이 자신에게 남겨놓은 상처와 이물감을 실감하는 이들. “이토록 많은 시공간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게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게 끔찍해서 눈물이 날 거 같았다”(「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고 말하는, 감정에 젖어들 때에도 그것을 설명할 언어를 찾느라 눈물이 멎는 이들이다. 백은선은 고통의 전문가라고 할 만큼 삶이 야기하는 괴로움과 아픔에 집중하면서도, 고통의 조건과 인간의 기저를 명징하게 꿰뚫어본다. 하지만 백은선의 관찰이 말뿐인 허울에 그치지 않는 것은 그가 바라보고 말해보는 행위로 자족하지 않은 채, 운명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언제나 인간보다 거대한 운명이 기차가 되어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다가온다면, 선로 위에 자신의 손목을 내어주리라 결심한다. 그럴 때 운명과 자신은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는 관계가 될 터이므로.
우린 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사랑이 아닌 것도. 손이 바빠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우물거리며 고기와 와인을 먹고 커피를 마셨지.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똑똑해진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장면들을 돌려보며 팝콘처럼 터지는 웃음, 열매처럼 뚝 떨어지는 눈물. 계속해봐! 더 해봐! 서로의 등을 밀며 기차는 달린다. 너는 빨강 너는 초록 나는 검정. 모든 게 멋지고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나의 옷을 돌려 입으며, 나는 가끔 무한히 길어질 수 있을 것 같아. 말하려는 순간 딸꾹질이 시작된다.
_「만나서 시쓰기」 부분
실로 백은선의 시는 더이상 구원과 낭만을 믿지 않게 되어 “날개를 접고 내려앉은”(「진실은 구체적이다」) 천사들이 가장 낮고 단단한 지면에서 발을 내딛는 행위이다. 그 천사들은 익숙한 신의 사랑이 아니라 어설픈 인간의 다정을 부단히 반복한다. 파토스 가득한 어조, 자유롭고 아름다운 비약, 솔직한 내면의 고백 등 백은선에 뒤따르는 수식어들이 있지만, 그 사이에서 백은선의 다정은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물론 백은선은 손쉬운 다정을 믿지 않는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다정해지는 게 있나요?”(「앙망」) “사람이 이 이상 다정할 수 있어? 묻지만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어요”(「픽션다이어리」). 그러나 “마음이라는 이 좆같고 애매한 말!”(「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이라고 외치며 세계와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려는 이가 꺼내는 마음에는 진실이 담겨 있기에 진심이라고 이르게 된다.
백은선의 시가 솔직하다면 그가 정직하기 때문이다. 올곧게 사랑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아무 대가 없이 사랑해줄 수는 없어요?”(「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묻는 백은선의 질문은 사랑에 주저하는 이들의 폐부를 찌르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건넬 편지지가 되어준다. 글씨를 연습하듯 백은선의 문장을 따라 쓰는 동안, 읽는 이는 백은선의 다정을 자기에게 옮겨담게 될 것이다. 그 다정은 곧, 사랑 앞에서 자신을 허무는 자세이자, 시야를 좁혀 사랑하는 이를 그대로 바라보는 눈맞춤이고, 사랑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이며, 사랑만 있다면 신이 없는 세상도 괜찮다는 의연한 믿음이리라.
백은선의 시가 반드시 우리 앞을 가로막는 한계를 뛰어넘고 초월하게 하는 물리적인 날개가 되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시를 읽고 마음이 북받쳐 뛰어오르고도 장대에 걸려 철푸덕 넘어져 이가 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와 가능성, 무한이라는 단어가 지긋지긋해서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땐 의심과 번복을 꼬리에 주렁주렁 달고도 이어지는 백은선의 다정을 생각해보자. 그 언어가 어떻게 우리에게 계속하고 반복할 수 있는 의지와 연습이 되어주는지를. 문학이 삶을 닮고, 삶이 문학을 닮아가는 우리는 만나서 시를 쓸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백은선에게 배운 시이자, 백은선의 시를 읽은 이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고픈 삶의 태도였다.
_편집자의 말 「다정한 시」 부분*
* 백은선 시인과 담당 편집자가 시집의 편집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수록 시들에 대한 이해가 서로 크게 겹치고 있다는 생각이 감돌았고, 보통의 시집 말미에 해설이나 발문을 싣는 것과 달리 시인이 편집자의 목소리가 들어가길 요청해 ‘편집자의 말’이 수록되었다.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 문학동네 시인선 195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