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젤과 소다수 - 문학동네 시인선 202

샤워젤과 소다수 - 문학동네 시인선 202

$12.00
Description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구겨진 뒤축 같은 오늘을 딛고
끝내 내일이라는 약속을 지켜내는 이십대의 초상
체념과 무기력만 남은 듯한 세상에 희망이라는 농담을 던지며 자신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는 청년 세대를 그리는 시인, 고선경의 첫번째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문학동네시인선 202번으로 출간한다.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할 당시 이문재, 정끝별 시인으로부터 넘치는 “시적 패기”로 써나갈 시의 힘이 기대된다는 평을 받은 시인은, 이십대의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냄과 동시에 수상 소감에서 밝혔듯 “무궁무진하고 이상한 미래”로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시편들을 선보여왔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오래된 테이프를 재생하듯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요소들을 배치해 읽는 이를 공감과 향수로 가득한 시세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딴청과도 같은 회상이 끝나고 돌아온 현재는 그러나 지고 또 지는 게임의 연속이다. 시인은 자조적이면서도 능청스러운 유머로 청년들의 고단한 현실을 비틀고, 미지의 내일에 향기롭고 경쾌한 상상을 덧입힌다. 너머를 상상할 수 있기에 앞으로를 다짐하고, 사랑을 약속하며, 끝없는 소망을 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편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꿈꿈으로써 또 한번 오늘을 살아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저자

고선경

2022년조선일보신춘문예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여름오후의슬러시
우리는목이마르고자주등이젖지
여름오후의슬러시
샤워젤과소다수
유통기한이지난약은약국에버려주시면됩니다
연장전
잼이되지못한과거
오!라일락
우리의보사노바
내가가장귀여웠을때나는땅콩이없는자유시간을먹고싶었다
방과후우리의발생
여름밤괴담에서는목탄냄새가난다
밝은산책
츠키에게는
ComeBackHome

2부소다맛설탕맛돌고래맛혼잣말
토마토젤리
알프스산맥에중국집차리기
돈이많았으면좋겠지
땅콩다운땅콩
일요일오전의짜파게티
리얼다큐멘터리
스트릿문학파이터
살아남아라!개복치-몰라몰라내가죽은진짜이유를
사이버시옷시옷
내가심장속에서울타리를꺼냈잖아
긴주말
건강에좋은시

3부진짜로끝나버렸어여름!
우주달팽이정거장
여름감기
수정과세리
메론껍질에남은향기와과육을갉아먹는벌레들
부루마불
반딧불이와금붕어
메론소다와나폴리탄
파르코백화점이보이는시부야카페에서
사랑의달인
밸런타인데이에뱀파이어에게초콜릿을받은건에관하여
별사탕과연금술사
옥수수알갱이처럼가벼운
진짜로끝나버렸어여름!

4부미워서하는말이아니야
무대륙
몬스터의유품
어떻게지내?
완벽한휴가의클리셰
삼다수싸게팝니다
세나나나나나세
외계인이초능력을쓸거라는생각은누가처음했을까?
시집코너
친구,아직도콜드플레이와데미안라이스를듣는가
물속의어항
세기말을떠나온신인류는종말을아꼈다
숨어듣는명곡

해설|망할세상에서농담하기-스트릿문학파이터분투기|박상수(시인,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우리의교환일기는늦여름더위를먹고다타버렸지

심야산책중주운나뭇잎들과너의깨진안경알잡동사니불길한애정모든게따분해졌는지몰라선풍기가고장난빈교실에서있었던일기억해?그날의일기에는귀여운스티커를덕지덕지붙여두었잖아너의펜촉은유창한주삿바늘이었어알록달록한감정들을주입했지통통하게부푼마음을찔릴때마다나는향기로워졌어
_「유통기한이지난약은약국에버려주시면됩니다」에서

고선경의시들은교환일기를쓰고무한궤도와패닉,다프트펑크를듣던그리운한낮의오후로시간을되돌린다.귀엽고감미로운기억의조각들은화자와읽는이를노스탤지어에잠기게한다.그러나시의후반부에이르러교환일기를쓰던화자는“오래전에죽은사람이되어”친구의곁에누워있고,부드러운바람은낡아가며빗방울에는녹이슨다.커져가던회상을과감히떠나보내고화자는현실을인식한다.그리고빚생각에잠못이루는이십대청년으로돌아와중국집주방에서설거지를시작한다.
소셜미디어에서볼수있는화려한젊음의모습은고선경의시에없다.필터없는카메라와에코없는마이크처럼고선경의시는날것그대로의화소로어딘가어설픈청년의일상을포착한다.그런데해고를당해도,시가팔리지않아도고선경의화자는섣불리절망하지않는다.오히려자조적인유머로상황을비틀고자신의처지를재차환기한다.자기를연민하지않으면서현실의무게를정확히대면하는패기가고선경의시편곳곳에어려있다.

아르바이트를잘리고가게를나서기전
얼음물좀마셔도되겠습니까물었다
물을마시면서
세상에는야무지지못한사람도있는겁니다
쯧,훈수를둔뒤사장의어깨를두드려주었다

(……)

밤이
방까지몰고온안개에얼굴을파묻는다
나는빚이있단말이야바보야빚은
푹신푹신하다
_「알프스산맥에중국집차리기」에서

조금만견디면더나은삶이우리를기다리고있을거라는믿음이사라지고있는시대.이시대의청년들은어떻게현재를견뎌내고있을까.고선경은무궁무진한상상을덧입혀눈앞의삭막한풍경을경쾌하게바꿔버린다.잠못이루게만들던빚은베개처럼푹신푹신해지고,도시는색색의비로젖어들며,비탈에는빨간토마토가데굴데굴굴러간다.이러한풍경을지켜보고있노라면어느새고민은떠나가고마음은가뿐해진다.비록실패가예정되어있더라도상상이라는해방구를열어두는자세에서시대가아닌자신을믿고다독이는시인의태도를엿볼수있다.
고선경의핍진한시선과발랄한상상력은사랑을말하는시편들에서혼합되며독특한반전을만들어낸다.사랑하는사람과함께일때,운동화의구겨진뒤축은웃는표정으로바뀌어보인다.소다수의기포처럼연약하고유한한것들은단단해지고무한해진다.이제세상은그자체로견고하고아름다운풍경이된다.

현관에놓인신발의구겨진뒤축이웃는표정을닮았어너는침대에누워있고바람이많이부는청보리밭에가고싶다멸종된기억을가지고싶다너의머리카락이가볍게흩날릴때나는사라진언어를이해하게된다

아침의어둠이이젠익숙해
그래도같이씻을까
산책을갈까

세상에서가장느린산책로
쓰러진풍경을사랑하는게우리의재능이지
_「샤워젤과소다수」에서

시인고선경의재능은이렇듯쓰러진풍경너머를상상함으로써새로운가능성을꿈꿀때빛을발한다.체념과무기력에잠식당하기쉬운지금,이제막세상으로나온고선경의문장들은“우리여기남아삶을더지속해보자”(해설)고선언하는것만같다.삶의무게를떨쳐내고미지의세계로첫발을내디딘청년의초상이『샤워젤과소다수』의사랑스러운향기를따라그려지는듯하다.

고선경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첫시집『샤워젤과소다수』가출간되었습니다.2022년조선일보신춘문예로데뷔한후일년반만인데요.첫시집을선보이는마음이어떤지궁금합니다.데뷔후지금까지어떻게지내셨는지도요.

단한번뿐인처음이어서일까요?뭐라고말하기두렵고어려운마음입니다.사람들에게어떻게읽힐까,읽히기는할까걱정도되고맥없이의기소침한나날이에요.그런데오늘부모님께서카카오톡프로필사진을제시집표지로바꾸셨더군요.감사하게도저보다더저를응원하는분들이있어서그분들이계시는한주눅들어선안되겠단생각이들었습니다.다만이시기를무탈하게보내고싶어요.데뷔후에는다시서울에서자취를시작했습니다.그러면서과자가게아르바이트를했고시도썼고여행도다녔고연애도했고대학원에입학했고공부는잘안했고사람들만나놀기좋아했습니다.

Q2.'샤워젤과소다수'라는제목을처음들었을때톡톡터지는탄산과향기를뿜는비눗방울이떠올랐어요.어떻게이제목을생각하게되었는지궁금합니다.

청량하고경쾌한이미지를떠올렸어요.그것이이시집의첫인상이되기를바라기도했지만한바탕울고난다음의기분을표현하고싶었습니다.저는기쁠때도울고슬플때도우는울보거든요.다울었다는생각이들면깨끗이세수를하는데,그때물에씻기는건아무래도비누거품만이아닌것같습니다.뒤섞인여러감정,지나치게무거워진마음,잡념,나자신.그런것들이조금이라도걷히고나면한결가뿐해져요.그가뿐함은반드시울고나서야온다는점에서이시집과닮았습니다.무엇보다샤워젤과소다수,이두가지오브제는지극히일상적이면서도일상을환기시키는것들입니다.제가좋아하는감각을지니고있고또유발하지요.

Q3.시편들에서지나간시절에대한향수가진하게느껴집니다.학창시절시인님은어떤학생이었나요?그리고그시절의어떤경험들이시에영감을주었는지도궁금합니다.

제가초등학교6학년이었을때담임선생님은부모님께저를과격한아이라고표현했다더군요.중학교생활기록부에는‘눈빛이도전적임.’이라고적혀있고요.한마디로저는거칠고반항적인학생이었습니다.단체생활과교칙에얽매이는것을싫어하면서도소속감을느끼고싶어안달을내곤했어요.그런저를친구들은버거워했습니다.친구들과함께있을때면자주소격감을느꼈지요.그래서저는멀리있는것들을사랑했습니다.소설과영화,음악처럼제가침투할수도닿을수도없는세계를요.특히중학생때는하굣길에서점들르기를좋아했는데요.돈이없던저는아르바이트생얼굴이익숙해졌을때쯤,용기를내책을사지않고도읽을수있는지물었습니다.무조건괜찮다면서무슨책을좋아하냐고물어오더군요.아르바이트생언니와는그때부터친해졌어요.우리는카운터안쪽에무릎담요를덮고앉아코코아를마셨고영업시간이끝날때까지책과음악이야기를나누었습니다.언니는제게라디오와다이어리를선물하기도했어요.언니의다이어리이름은‘알도’라고하더군요.동화제목에서따왔다는데,동화속외로운한아이의친구,토끼인형이름이기도합니다.
그런데언제부터인가서점에가도언니는볼수없었습니다.일을관둔것이었겠지요.생각해보니저는언니가서른살이라는것말고는아는정보가없었습니다.제게는말할수없는상실감과라디오,어설프게언니를따라이름붙인다이어리만남았을뿐이었지요.가끔그일이진짜있었던일인가생각합니다.진짜있었던일이라면언니는왜제게미리말하지도,두번다시저를찾아오지도않은걸까요?길을걸으며우연히만나는상상을하다가그래,그냥상상이었겠거니……하는데언니가알려준가수의음악을들으면알수없는쓸쓸함이엄습하고마는것입니다.물론이제는언니의얼굴이기억나지않고언니가그립지도않지만요.제시에스며있는향수는그런경험들,시절들에기인한것같습니다.

Q4.이번시집에서빼놓을수없는것이'사랑'을표현하는아름답고상상력넘치는문장들입니다.내사랑이너에게는초능력처럼느껴졌으면해”(「외계인이초능력을쓸거라는생각은누가처음했을까?」)와같은사랑스러운문장들이마음에남는데요.시인님이이번시집을준비하면서떠올렸던사랑의형태가무엇인지궁금해집니다.

사랑은징그러운데가있다고생각합니다.「별사탕과연금술사」에서는“잘익은알밤을쪼개면”기대와달리“열매의안쪽에서꿈틀대는벌레가/사랑의형상에가깝다”고표현했는데요.제게는너무아름다운것이때때로혐오스럽듯어떤혐오의대상혹은혐오스러운이미지는아름답게느껴집니다.그러나아름다움도혐오스러움도영원하지않습니다.모든것이영원하지않기때문에,사랑하는존재는무력감을느끼지요.그리고같은이유로초월적인힘을발휘하게됩니다.얼마나초월적이냐면도저히극복할수없는영원의불가능성마저감당할수있습니다.그런데역시……사랑하는대상이영원하기를바라는마음은징그럽지않은가요?아름답습니다.가까스로.

Q5.마지막으로,『샤워젤과소다수』를읽을독자분들께인사를건네주세요.

이렇게한권의시집으로인사드리게되어매우반갑고영광입니다.첫시집출간이후의시간은저에게도미지입니다만,그렇기때문에감히여러분을초대하고싶습니다.부디즐겁고자유로운독서가되기를바라요.읽어주시는모든분께마음깊이감사드립니다.처음이라서너무경직된채로인터뷰에참여한것같은데,다음에는더잘할게요.잘할수있습니다!

시인의말

너에게향기로운헛것을보여주고싶다.

2023년10월
고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