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노트

시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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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김선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걸 대번에 알아보았다.
척력이 깃든 세계의 아름다움, 그걸 이미 이해해버린 시인.”
_김소연(시인)

두 단어 사이를 오가거나
그것을 발판삼아 더 멀리 가는 글쓰기
시인 김선오의 두번째 산문집 『시차 노트』를 펴낸다. “사랑이 끝났다고 집요하게 말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의 불가능을 파괴하려는 것 같다”(시인 황인찬)는 추천사와 함께 첫 시집 『나이트 사커』(아침달, 2020)를 펴낸 뒤, 두번째 시집 『세트장』(문학과지성사, 2022), 첫 산문집 『미지를 위한 루바토』(아침달, 2022) 등을 통해 언어로써 가능해지는 새로운 세계를 담담하고 성실하게 탐색해온 그가, 이번에는 두 개의 단어 사이를 오가거나 그것을 발판삼아 더 멀리 가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봄과 터널, 피아노와 비유, 집과 픽션, 도서관과 꿈 등 얼핏 성분도 다르고 연결점도 없어 보이는 두 단어 사이의 영향 관계를 가늠하거나 혹은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쓰인 산문이다.

보이고 들리는 것을,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을 믿으려고 했다. 그리고 연결하려 했다. 연결 지점은 공간이라기보다 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이동 그 자체에 가까웠다. 어지럽고 자유롭다, 그런 느낌이었다.
_서문에서
저자

김선오

1992년서울에서태어났다.시집『나이트사커』『세트장』,산문집『미지를위한루바토』가있다.

목차


서문|연결하기

비―소리
피아노―비유
봄―터널
바다―리듬
집―픽션
돌―글
기억―(기억)
잠―이동
개―얼음
도서관―꿈
유령―얼굴
시―향
눈―손

출판사 서평

첫번째꼭지는‘비─소리’로,“비가온다”는문장으로시작한다.화자가있는곳에실제로비가내리지않지만이처럼작가는“씀으로써발생시키”는사람이다.“단지비가온다는문장때문에(…)빗소리가들”리고,“비가온다는말을흔들때내가조금흔들린다는사실”과“내가흔들릴때마다말이나를붙잡는다는사실”,그러는와중에도“비는그저오고있다는사실”을글이진행됨에따라작가와독자는점차느낄수있다.“어디로?여기로.”‘여기’라고쓰인두음절의활자에,‘여기’라는단어가박힌지면에,‘여기’라는단어가불러일으키는저마다의공간에비가온다.
한편‘비’라는글자를읽는소리와빗소리를흉내내보는소리로‘비’와‘소리’는이어진다.전자는수많은동음이의어들과함께쏟아지는비를넘어선의미를품으며,후자는빗소리를딴언어를가진사람과그렇지않은사람의전혀다른세계로확장된다.이처럼“비가온다”라는얼핏심상한문장을쓰고그안에들어앉아골몰한시인은“하나의언어가탄생하고서서히소멸하는시간을상상”하기에이른다.

내리는비를위해비,라고발음할때우리의상상은물기와빗소리와어두운하늘같은비의요소들을불러오지만상상의이면에서,음성의역사적차원에서우리가발음했던모든비,아닐비나슬플비나꿀벌비등이비라는말속에잠재되어있고,그렇기에비는아닌것,슬픈것,꿀벌과뒤섞이며내리는비를넘어서게될수도있다.
_「비─소리」20~21쪽

나는문장으로비를해체하고싶지도않고비로문장을해체하고싶지도않다.비를대체할만한어떤문장을쓰고싶지도않다.비와는그저사이좋게지내고싶다.그래서비가나에게오고,비가나로부터가고.앞으로도영원히비가내리는시를쓰고.그런시들이꿈이되고.그런것들을내내반복하고싶다.
_「비─소리」18쪽

주체와객체의위계를지울때새로이누릴수있는감각은김선오시인이특별히잘감지하는것중하나다.이번산문에서도그는섬세하게‘나/너’‘주체/타자’‘안/밖’의위치를뒤바꾸어독자로하여금전과다른눈으로세계를인식하게한다.“봄볕은개나리와우리에게공평하게쏟아진다.개나리와우리는공평하게서로마주본다.우리의눈동자가노랗게차오른다.개나리에게눈동자가있다면그속에우리가차오를것”(「봄―터널」)이라거나“터널의안쪽을세계의바깥쪽이라불러도될까.세계를주체의자리에놓아보아도될까.터널의안이세계의밖이라면이곳은아주작은밖,드물게안보다작은밖이다.안과밖이뒤바뀔때출구는입구가입구는출구가될것”(「봄―터널」)이라는대목,“글의입장에서나의삶은글의숱한직업중하나일지도모르겠다.글은평생에걸쳐나를하고있는것이다.(…)만약그렇다면,글에게그런입장이있다면,어쩐지조금좋다.내가글을장악하는것이아니라는사실이”(「비―소리」)와같은대목은단단하게굳은인식론에구멍을내고,그안으로상쾌한바람이불어든다.
이렇듯‘시차노트’라는제목의‘시차’란이책에서다양한층위의차이를아울러쓰인다.물론사전적의미에가까운‘시차’또한아름답게수놓여있는데,가령이런대목.행위이후에는그이전의시간이기록처럼,기억처럼새겨져있다는.

접혀있던종이를손이펼칠때종이학,종이꽃,종이상자는사라지고투명한직선들만이형상의흔적이자기호로서종이위에남는다.종이라는불투명을가르는투명,불투명과불투명을구분하는투명이다.종이옆에놓여있는손의이미지를통해우리는종이안에잠재되어있는형상들을본다.손의움직임이라는과정속에놓일때복원과파괴의개념은같은얼굴의다른표정처럼쉽게뒤척인다.
_「눈─손」196~197쪽

오늘은선물받은양말을신자.발목부분에손바느질로돌고래무늬를수놓은네이비양말.그러니까선물한이의손이앞뒤로움직이는모습이이양말에새겨져있는셈이다.손의진자운동을상상하며양말을신으면두발이커진것처럼밟고있는땅이좀더안전하게느껴진다.(…)도에서레를끄집어내며연습을시작한다.나의몸에반복이새겨진다.시간이새겨지고울림이새겨지고근육이새겨진다.바느질하는손놀림이양말에새겨져돌고래모양이되듯반복은내몸의무늬가된다.
_「피아노─비유」25쪽,34쪽

이처럼단어와단어사이는규정하거나가늠할수있는것들로메워져있지않고,시인은그안에서자유롭다.한정된시공간에잠시머무르다가는유한한존재에게언어란단순히도구에그칠수없음을,그것은우리를아주멀리까지데려가고,흔들고,우리가우리아닌것이되도록하는신비로운무언가임을시인은즐거이탐색한다.“단어와단어사이,무엇과무엇사이의‘인력’이아니라‘척력’에집중하는것만으로도넘쳐흐르는아름다움들.(…)척력이깃든세계의아름다움,그걸이미이해해버린시인”(김소연시인,추천사에서)김선오의‘시차노트’는이제독자에게건네어졌다.우리두손에쥐인‘시차노트’에어떤멀고도가까운두단어가가장먼저쓰일지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