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 문학동네 시인선 201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 문학동네 시인선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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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

고요하고 둥글게 모든 것을 감싸안는
부드럽고 단단한 순백의 힘
문학동네시인선 201번으로 한여진 시인의 첫번째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를 펴낸다. 2019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앞 연에서 예고한 바 없이 다음 연에서 펼쳐내는 세상이 크고도 희고도 맑”으며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시인 김민정), “미움이나 슬픔 따위가 사라진 ‘텅 빈 구멍’을 끈기 있게 들여다”보는 “이 시인에게 무척 믿음이” 가고 “벌써 우정을 느낀다”(시인 진은영), “다양하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를 가진 시인의 탄생을 예감할 수 있었다”(시인 황인찬)라는 평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의 시 48편을 골라 엮었다. 그간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박준)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고명재) 등 신선하고 개성 있는 목소리를 지닌 새로운 시인을 소개하는 데 집중해온 문학동네시인선의 200번대를 여는 시집이기에 더욱 뜻깊다.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고”(「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 다짐한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둥글”(「검은 절 하얀 꿈」)어 일견 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편편의 시들은 그 유연함이야말로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힘임을 확인케 한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낸 두부처럼, 부드럽게 내려와 모든 것을 감싸안는 순백의 눈처럼 희고 고요한 힘을 지닌 시가 여기 도착했다.
저자

한여진

2019년문학동네신인상으로등단했다.

목차


1부이상한하루에대해쓰고있다
솥/테니스/미선언니/어떤공동체/거기여름/추자도에서/팔레스타인에서/캐넌/순무는순무로서만/소설처럼/화염/밤친구

2부열두장의흰종이
하지/미선의반죽/초기화/기호와소음/영동고속도로끝에는미래가/인터뷰/본업/생활과소음/혁명과소음/조사/미선의생활/초기화

3부조용하고둥글게
가을과경/내일날씨/검은절하얀꿈/기다렸다는듯나타나는밤은없고/신(scene)/박태기나무아래서벌어진일/목적지를입력하세요/다른나라에서/사과의모습/이브나파커/제목없는나의노래와시와그림과소설/관객되기

4부여름의초원과겨울의초원을지나
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소설가/BeautyandTerror/나이트사파리/없는사람/공터의왕/기차는울산을지나쳤다/눈속밤/겨울소설/다정한옷장에걸려있는/미선씨,소식없음/초기화

해설|미선언니와나
조대한(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

읽던소설속에서
인물들이서로를미워하고있었고

그것이이책의유일한결말은아니니까

(…)

아무도말을꺼내지않는찰나에도
두부는아주평화롭게구워진다

이것은소설일까아닐까

고개를들면온통하얀창밖과
하얗게뒤덮인사람들이오고가는풍경

모든것이끝나도
어떤마음은계속깊어진다
_「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에서

‘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라는제목과새하얀표지가건네는첫느낌대로한여진의시에서는유독흰색이도드라진다.표제작을포함해여러시의배경이하얀눈으로가득한겨울날인데다양(「어떤공동체」)과흰고래(「기다렸다는듯나타나는밤은없고」)부터순무(「순무는순무로서만」),밀가루반죽(「미선의반죽」),그리고“하얀문”(「검은절하얀꿈」)까지주요이미지가온통하얀까닭이다.이넉넉한흰빛은시집전체를눈덮인세상과도같은고요한아름다움속에자리하게만든다.그런데이처럼시집의고즈넉한정경에힘을실어주는흰색은한여진의화자와만나또다른사유를가능케한다.그것은바로흰색이무언가를써내려갈수있는하얀종이의모습으로드러나면서다.

검은솥을들여다보면아무리채워도넘치지않는검은물이있다그속엔대체무엇이있길래솥은한없이검은가나는알수없는것에대해선쓰지않는다솥이없는하루에대해쓴다솥에서유래하지않은것들에대해쓴다마당을둘러싼담장밖에대해쓴다큰할머니와할머니와엄마와이모와언니가아닌것들에대해쓴다
_「솥」에서

신촌골목길을걸으며네가해준이야기
누군가그얘기를듣고한참을울더니소설로쓰겠다고했다

너는희미하게웃었고
사실은말야,나도뭔가를쓰는중이라고말하고싶었는데
그때기차가굉장한소음을내며지나갔다
_「소설처럼」에서

앞서인용한시편들에서알수있듯한여진시의화자는많은경우‘쓰는’사람으로존재한다.그런데그의쓰기는어째서인지계속해서실패하는것처럼보인다.같은이야기를공유한누군가가그것을“소설로쓰겠다고”선언하는동안‘나’는“나도뭔가를쓰는중이라고”말하지못한다(「소설처럼」).방금전까지선명했던꿈은“글로옮기는순간아무것도기억나지않”게되고(「초기화」),완성한줄알았던글은어느순간‘초기화’되어‘나’는“눈을뜨면다시빈노트앞”에있다(「초기화」).
서사를지닌한편의이야기처럼읽히기도하는한여진의시들을따라가다보면우리는몇몇힌트를통해그이유를짐작해볼수있다.이를테면솥뚜껑에맞아죽은‘나’의이모와솥아래서불타죽은‘나’의언니(「솥」),그리고영동고속도로에서트럭전복사고로죽은‘나’의삼촌(「영동고속도로끝에는미래가」)을통해,더정확하게는그들이맞이한‘결말’을통해서다.
한여진의화자에게있어기록은일어난일을고정시켜버리는행위인듯하다.문장의마침표를찍는순간,돌이킬수없는“유일한결말”(「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이되어버리는것이다.이렇게미래를고정시키지않기위해화자가택하는것이바로‘다시쓰기’이다.그는하얀종이위를가득채우고있는검은글씨를다시금하얗게덮어버리고,그렇게만들어낸흰색위에또다시새롭게쓴다.

“해피엔딩은믿을수가없”(「미선의생활」)다던미선언니는아마도다시는돌아오지않을것이다.‘우리’에게실로두려운것은끝도없이펼쳐진막막한현실이아니라,모든가능성이다사라진채로너절하게모습을드러낸미래가아닐까.그렇기에시인은과거의기억들을붙잡고닫힌엔딩을거부한채초기화된첫문장으로자꾸만되돌아가려는것같다._조대한(문학평론가),해설에서

그러니‘미선언니’가‘해피엔딩’을믿지못하는건당연한것일테다.문학평론가조대한이짚어보였듯그것은미래의가능성을닫으려는시도이기때문이다.따라서한여진의화자는이미쓴종이위에계속해서흰색을덧입히고또덧입히며끊임없이미래를다시써낸다.“계속아무것도아닌상태”로남은하얀반죽만이우주가될수도있고이불보가될수도있으며천사가될수도있는가능성을얻으므로(「미선의반죽」).

내가숨쉴수없는공간인줄도모르고공허와폐허인줄도모르고
다른건배운적없는나는그런세계를만들겠다고했다

(…)

눈을뜬다숲속에앉아있다고요하지만살아있는것들로가득한숲안경원숭이비단고사리하늘말나리소사나무코럴블루양떼구름새털구름이런이름말고도그들에겐다른이름들이있을것이다진짜이름들기록되지못한것들

나에게도나만의노래와시와그림과소설이있다고하면보지않을래?

숲의경계선에서서
마을로이어지는길을
바라본다오래된길
하지만오랫동안인적이없던길
손에불씨를들고

그리고생각한다말랑한것들,역사가아닌것들,기록되지못한것들,내가나일수없던것들,그것들에게이름붙여주는일을하겠다고그리고오래살았다는남자를찾아가그에게손을내밀고나만의방식으로그의이름을지어주게될나의미래를
_「제목없는나의노래와시와그림과소설」에서

그렇게한여진의화자가다시쓰고자하는미래는그자신만의것이아니다.화자는“오래살았다는남자”가만들어놓은“내가숨쉴수없”는세계위에“남자아닌여자/아닌여자/아닌여자”들도숨쉴수있는세계를세우겠다고(같은시),오늘현장에서죽은동료의이름을기억하고(「기호와소음」)끝없이총성이울리는곳에서스러져간이들을자신만의방식으로다시써내려가겠다고말한다.

잊혀진기억의실마리를끈질기게붙들고미처기록되지못한자들에게이름을붙여주려는한여진시인이야말로무명의위세대들이남긴유산의정당한계승자일것이다.그미래와과거가충돌하는틈바구니속에서,아직도착하지못한존재들과실패한기억의흔적위에서,“내가잊어버린것”과“네가잊어버린것//사이의간격”(「초기화」)너머에서,“지나간기록에대한기록”과“앞으로일어날이야기들”(「제목없는나의노래와시와그림과소설」)이겹쳐지는바로그곳에서시인의시는시작되는것같다._조대한(문학평론가),해설에서

그러므로조용하고둥근,아름다운흰빛을연상케하는「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검은절하얀꿈」「밤친구」「나이트사파리」같은시편들에서부터시작해여성주의적목소리가또렷하게들려오는「솥」「캐넌」「제목없는나의노래와시와그림과소설」과‘미선언니’연작,시사적인메시지를강렬하게전달하는「팔레스타인에서」「화염」「BeautyandTerror」「혁명과소음」등의작품들까지경유하고나면우리는비로소『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가지닌흰색이마냥무구하고투명한빛깔이아니라다양한색과“공허와폐허”마저모두감싸안은,부드럽고도강인한눈과같은빛깔임을알수있다.창밖으로하얀눈이내리고두부는평화롭게구워지고있는가운데다시마주한빈노트앞에서(「초기화」),이야기는아직끝나지않았다.

한여진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안녕하세요시인님,2019년문학동네신인상을통해등단하신이후처음으로펴내는시집이에요.감회가남다르실듯한데,인사와더불어소감한말씀부탁드려요.

다들안녕하신가요.이렇게묻고나면답을들을길이없어안녕은어쩌면질문이아니라당신이그저안녕하기를바라는마음이아닐까생각합니다.
여기실린시들은약칠년에걸쳐써낸것들입니다.칠년치의제가이곳에있습니다.그렇게생각하니조금징그럽기도합니다.하지만징그러움도아름다움의하나라고믿는저는이것들을들고덜덜떨며서있습니다.이것들이가닿게될당신의시간은또얼마만큼의애씀과안간힘으로가득할까요.모든걸건너온당신에게도하얀두부처럼평온한마음이있기를바라봅니다.아주찰나의순간이라할지라도요.

Q2.새하얀표지와‘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라는제목에서느껴지는겨울의분위기가인상적이에요.실제로시집에도“고개를들면온통하얀창밖과/하얗게뒤덮인사람들이오고가는풍경”(「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검은지붕위쌓여가는/하얀눈/정지한세상/고요하고무궁하게”(「검은절하얀꿈」),“눈을떠보니하얀것들이펄펄내리고있었다”(「소설가」)등겨울을감각하게끔하는장면들이많고요.시인님께겨울은어떤의미를지니고있나요?

사실은추위를몹시타는편입니다.겨울출근길에서저는언제나동동거리며몸을움츠립니다.묵직하게내려앉은어둠과추위속에서코와귀는아리고어깨는긴장하여잔뜩굽어지고발목은걸을때마다차가운칼날이스치는듯합니다.살아있는몸은번거롭습니다.출근길에동사하게된다면산재일까아닐까,이런쓸데없는생각도잠시합니다.아무도없고내발소리만가득한골목길,내가내뱉는숨소리가그어느때보다정확하게들리고호흡이김이되어눈앞에펼쳐질때,사실나는여러차례죽고여러차례살고있는것같다는이상한감각이저를휘감고지나갑니다.그러고나면지금이야말로가장펄펄살아있구나깨닫습니다.

Q3.앞서언급한것처럼정갈하고서정적인시편들이있는가하면‘소음’연작이나「화염」「BeautyandTerror」등의시편은시사적인메시지를담고있는듯해요.특히「기호와소음」이나「조사」같은시를통해서는시인님의직업을떠올리게되기도했는데,현재하고계시는일을간단히소개해주실수있을까요?직업적특성이시쓰기에어떤영향을주는지도궁금합니다.

저는건축엔지니어로건설현장에서일하고있습니다.도심지의높은가설펜스밖으로쏟아져나오는사람들가운데서안전모와안전화와안전벨트를착용한저를언젠가마주치셨을수도있습니다.
시를쓰는일과건축일은너무도다르지만정말아주가끔비슷하다고느낄때가있습니다.바닥과벽이만나는지점의디테일을고민하거나나중에는보이지않을배관들을천장속에묻을때,근로자들이다떠나고남은현장에서홀로산더미처럼쌓여있는건축자재들을바라볼때아주작은것들의힘에대해생각해봅니다.그런작은생각들을그러모아시를쓰고있습니다.
「기호와소음」에그려진모습은제일상이기도한데(저는토목기사는아니고건축기사입니다만)점심때면현장을벗어나홀로식사를하며(요즘은만두대신김밥을먹습니다)제가속해있는곳을멀리서바라보고자,거리감을두고자노력합니다.하지만늘실패하고있어요.

Q4.‘미선언니’에관해서도이야기해보고싶어요.‘미선언니’연작과더불어「솥」「캐넌」「제목없는나의노래와시와그림과소설」등의작품들에서는여성인물의목소리가유독또렷하게느껴지는데요.미선언니는어떤인물이며,이목소리들과어떻게맞닿아있는지들려주세요.

저는미선언니를모릅니다.미선언니는옆집아이일수도있고,회사동료일수도있고,2호선열차의기관사나제빵사일수도있습니다.도서관에서찾은수많은대본을들고여러인물이되어보기를연습하는무명배우처럼모든것이될수도있었을그누군가라고막연히생각해보며,그동안목소리를가지지못한사람들,힘의논리바깥에있는사람들,이름을부여받지못한사람들의이야기를해보고싶었습니다.그조차도저의오만이거나능력밖의일인지도모른다는생각을자주하면서요.

Q5.마지막으로,『두부를구우면겨울이온다』를읽을독자분들께인사를건네주세요.

여러분들께이번겨울이잘도착하기를,그겨울속에서모두무탈하시기를바랍니다.

시인의말

이시들을엮는동안여러번의겨울이왔다갔고
살아있는사람들의이야기를듣다자주졸았는데
가끔은이대로계속잠들어도좋겠다싶은밤이있었다.

2023년10월
한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