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 문학동네 시인선 183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 문학동네 시인선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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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무엇이 두려운가
장미꽃이 활짝 피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뒤돌아보는 시선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두려움 없는, 지지 않는 내일의 시

문학동네시인선 183번으로 김상미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을 펴낸다. 1990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한 이래 박인환문학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공적인 차원으로 전환하여 생의 진실과 비밀에 마주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자유로우면서도 절제된 시인의 화법, 유사한 시어의 반복을 통해 리듬과 변화를 창조하는 그의 매혹적인 표현법은 이제 어떤 경지에 이른 듯하다”(전봉건문학상 심사평에서)는 평을 받은 시인은 삼십여 년의 시력 동안 한시도 시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시세계를 공고히해왔다. 그런 시인이 이번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에 이르러 “설사 시가 아니라 해도/ 삐뚤삐뚤, 비틀비틀,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나는 계속 시를 써왔다”(‘시인의 말’에서)는 말을 증명하듯, 메마른 어제의 생에서 기어코 건져올린 시어들로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순정하게 시쓰기와 ‘시인 됨’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입히고 먹여줄 게 시밖에 없어
뜬구름 잡듯 또다시 펜을 집어든다

(……)

허기지고 굶주린 시 속으로
미치고 미치다 꺼꾸러진 희디흰 뼛가루
그 위에 던져진 한 떨기 백합처럼
결코 나를 놓아주지 않을 시 속으로……
_「시인 앨범 7」 부분

시인이 지나온 어제는 그리 녹록지 않다. 그곳은 아이들이 “굶주려 죽어가”거나 “매맞고 버림받”은 채 “현실에 등돌”(「보이지 않는 아이들」)리고, “싸구려 환상들이 푸른 나무들을 좀먹고 분노한 바다들이 다정한 배들을 삼키고 있”(「거기, 누가 있나요?」)는 곳이다. 고단하고 거친 어제를 겪어낸 시인에게 세상은 “절대 영혼에 기대지 말고 내면의 모든 불협화음을 잠재”운 채 “그저 살아 있는 시체처럼”(「살아 있는 시체들의 나라」) 살 것을 종용한다.
그러나 “온몸과 온 마음에 비통과 회한뿐일 때”(「문학이라는 팔자」) 시인이 택하는 것은 영혼에 기대어 내면의 모든 불협화음을 다시금 일으키는 일, 다시 말해 문학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점심값을 아끼고 처음 받은 용돈을 털어가며 사 읽었던 책들(「그리운 아버지」)과 지옥에 살고 있는 것만 같은 순간에 마주하게 된 시집들(「동네 서점에서」), “문학이라는 팔자”(「문학이라는 팔자」)를 타고난 이들이 남기고 간 작품들은 시인에게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일깨워준다. “문학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더럽게 불운하고, 더럽게 치열하고, 더럽게 품격 있고, 더럽게 자존이 강했던” 어제의 문인들은 하나같이 불우한 삶을 겪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에게 “그 지독한 불운과 죽음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문학을 건네준다. 그 바통을 넘겨받은 시인은 “내 팔자 또한 더럽게 춥고, 어둡고, 외롭고, 고달파도” “계속 문학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뜨거운 피가 솟구친다”(「문학이라는 팔자」)고 말한다. 시인에게 “시를 모른다는 건 존재의 가장 큰 비극”(「내일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내일로 가는 기차
나도 그 기차에 올라탔다
어제의 모든 나를 버리고
오로지 내일로만 향해 간다는 기차

(……)

이제 내게는 오로지 내일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끊임없이 뒤에 두고 온 집과 사람들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한 라일락나무 위의 휘파람새
읽다 만 책, 쓰다 만 글들이 가슴속을 아프게 맴돌았다
_「내일로 가는 기차」 부분

끊임없이 내일을 그리는 시인은 그러므로 어제를 등지지 않는다. ‘문학이라는 팔자’를 지닌 한 어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오늘은 여태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시인은 그저 “쓰고 또 쓴다”(「시인 앨범 6」). 남루하고 비정한 현실을 외면하고 내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직시하고 고발하는 시쓰기를 이어나가며 내일로 나아갈 채비를 한다. “무엇이 두려운가/ 장미꽃이 활짝 피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밖에는 비가 내리고」)고 말하며. 그렇게 내일을 기다리는 동안 시인은 저 스스로 자연이 되어가고, 그 땅 위로 꽃은 피어날 것이다.

진정한 시인은 이 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에 다시 태어나 버섯 향기 물씬 풍기는 비에 젖은 숲에서 달빛을 만들어내는 사람 내일이면 그 달빛에 새로 태어날 시인들의 고백이 시작될 것이다 그 고백에 안장을 얹고 이 슬픈 시대를 가로질러 달려나가자
_「내일의 시인」 부분

시인은 어떠한 존재이고 어떠한 삶을 사는가? 김상미의 시편에는 유독 이러한 질문이 많다. 그는 시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시인됨을 끊임없이 되묻는다. (……)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에 대한 시인의 갈망은 불가능, 한계, 무기력, 허기의 정동에 사로잡히게 한다. 도달할 수 없는 힘으로 인하여 (……) 허무에 이르는 자가당착을 반복한다. 그러나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입히고 먹여줄 게 시밖에 없”는 존재의 조건이라면 할 수 없음이 오히려 잠재력이 되어 시작을 추동한다. 시에 들리고 시에 몰입한 시인의 삶은 “돈키호테”처럼 비대한 자아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시의 지평을 염두에 둔다면 시인은 돈키호테가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의 고행자에 가깝다. 식어버리거나 타버릴 열정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남을 열망을 지녔다고 하겠다. 그렇기에 모든 시편은 항상 “허기지고 굶주린 시”에 불과하다. “결코 나를 놓아주지 않을 시 속으로” 간단없이 투신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김상미는 시에 생애를 기투하는 시인의 초상을 그려놓고 있다. 이는 단지 그가 경험하는 시인의 얼굴을 말함이 아니며 오히려 자기의 진실한 표정에 가깝다. 그만큼 의도한 “고백”(「내일의 시인」)의 발화 형태이다.
_구모룡, 해설에서
저자

김상미

1990년『작가세계』를통해등단했다.시집『모자는인간을만든다』『검은,소나기떼』『잡히지않는나비』『우린아무관계도아니에요』『갈수록자연이되어가는여자』가있다.박인환문학상,지리산문학상,전봉건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1부신(神)이아픈날태어난
다중자화상/미스터리/밖에는비가내리고/단하나의방/거기,누가있나요?/포커치는개들/한겨울,버섯요리를하며/보이지않는아이들/엄마의통장/제발잡히지만말고/짝짓기의바벨탑/문학이라는팔자/우울증환자/동네서점에서/그리운아버지

2부그저살아있는시체처럼사시오
반성/짧고도긴이야기/바얀고비에서/살아있는시체들의나라/어제의창문/녹(綠)의미학/병속의편지/최승자시인/부상당한천사/별이빛나는밤/우유부단/파리에서/자작나무타는소년―L시인에게/분노하는지구

3부연포탕을닮은문어탕을먹는다
너에게만말할게―다시,취한배위에서/난파선/문어탕/7월의심장/까치밥/시인앨범6/딱새의매운고추/앨버트로스/내일의시인/페루/나무늘보/해파리/FC바르셀로나

4부세상같은건더러워버린그대와
시인앨범7/내일로가는기차/또다시바다,바닷가에서/불타는도서관/작은배/휘파람새/가짜뉴스아웃!/지독한게임/밥값/장미의끝/아이스바사랑/당신의진짜얼굴/꿈같이,꿈만같이/세상에서가장친절한사람/나비들의귀환

해설_무위의기쁨,시인의삶
구모룡(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그러나……그럼에도
머리에서발끝까지제대로입히고먹여줄게시밖에없어
뜬구름잡듯또다시펜을집어든다

(……)

허기지고굶주린시속으로
미치고미치다꺼꾸러진희디흰뼛가루
그위에던져진한떨기백합처럼
결코나를놓아주지않을시속으로……
_「시인앨범7」부분

시인이지나온어제는그리녹록지않다.그곳은아이들이“굶주려죽어가”거나“매맞고버림받”은채“현실에등돌”(「보이지않는아이들」)리고,“싸구려환상들이푸른나무들을좀먹고분노한바다들이다정한배들을삼키고있”(「거기,누가있나요?」)는곳이다.고단하고거친어제를겪어낸시인에게세상은“절대영혼에기대지말고내면의모든불협화음을잠재”운채“그저살아있는시체처럼”(「살아있는시체들의나라」)살것을종용한다.
그러나“온몸과온마음에비통과회한뿐일때”(「문학이라는팔자」)시인이택하는것은영혼에기대어내면의모든불협화음을다시금일으키는일,다시말해문학을정면으로마주하는일이다.점심값을아끼고처음받은용돈을털어가며사읽었던책들(「그리운아버지」)과지옥에살고있는것만같은순간에마주하게된시집들(「동네서점에서」),“문학이라는팔자”(「문학이라는팔자」)를타고난이들이남기고간작품들은시인에게시인으로서의운명을일깨워준다.“문학에있어서나삶에있어서나더럽게불운하고,더럽게치열하고,더럽게품격있고,더럽게자존이강했던”어제의문인들은하나같이불우한삶을겪어냈음에도불구하고시인에게“그지독한불운과죽음을훌쩍뛰어넘어지금도반짝반짝빛이나는”문학을건네준다.그바통을넘겨받은시인은“내팔자또한더럽게춥고,어둡고,외롭고,고달파도”“계속문학속에서살아갈수있다는희망에뜨거운피가솟구친다”(「문학이라는팔자」)고말한다.시인에게“시를모른다는건존재의가장큰비극”(「내일의시인」)이기때문이다.

내일로가는기차
나도그기차에올라탔다
어제의모든나를버리고
오로지내일로만향해간다는기차

(……)

이제내게는오로지내일만이있을것이다

그런데,그럼에도……
끊임없이뒤에두고온집과사람들
이제막꽃피기시작한라일락나무위의휘파람새
읽다만책,쓰다만글들이가슴속을아프게맴돌았다
_「내일로가는기차」부분

끊임없이내일을그리는시인은그러므로어제를등지지않는다.‘문학이라는팔자’를지닌한어제는아직끝나지않았으며,오늘은여태도착하지않았으므로시인은그저“쓰고또쓴다”(「시인앨범6」).남루하고비정한현실을외면하고내일로도피하는것이아니라,이를직시하고고발하는시쓰기를이어나가며내일로나아갈채비를한다.“무엇이두려운가/장미꽃이활짝피려면한참을더기다려야한다”(「밖에는비가내리고」)고말하며.그렇게내일을기다리는동안시인은저스스로자연이되어가고,그땅위로꽃은피어날것이다.

진정한시인은이세상을버리기로한날밤에다시태어나버섯향기물씬풍기는비에젖은숲에서달빛을만들어내는사람내일이면그달빛에새로태어날시인들의고백이시작될것이다그고백에안장을얹고이슬픈시대를가로질러달려나가자
_「내일의시인」부분

시인은어떠한존재이고어떠한삶을사는가?김상미의시편에는유독이러한질문이많다.그는시인으로살아온자신의시인됨을끊임없이되묻는다.(……)삶과죽음의경계를넘어서는시에대한시인의갈망은불가능,한계,무기력,허기의정동에사로잡히게한다.도달할수없는힘으로인하여(……)허무에이르는자가당착을반복한다.그러나“머리에서발끝까지제대로입히고먹여줄게시밖에없”는존재의조건이라면할수없음이오히려잠재력이되어시작을추동한다.시에들리고시에몰입한시인의삶은“돈키호테”처럼비대한자아의모습으로비칠수있다.하지만결코닿을수없는시의지평을염두에둔다면시인은돈키호테가아니라끊임없는과정의고행자에가깝다.식어버리거나타버릴열정이아니라죽음이후에도남을열망을지녔다고하겠다.그렇기에모든시편은항상“허기지고굶주린시”에불과하다.“결코나를놓아주지않을시속으로”간단없이투신할수밖에없다.이처럼김상미는시에생애를기투하는시인의초상을그려놓고있다.이는단지그가경험하는시인의얼굴을말함이아니며오히려자기의진실한표정에가깝다.그만큼의도한“고백”(「내일의시인」)의발화형태이다.
_구모룡,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