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없는 그림책 - 문학동네 시인선 207

그림 없는 그림책 - 문학동네 시인선 207

$12.00
Description
“그림을 망친 아이처럼 당신이 운다면
다시 잠들 때까지 조금 더 자랄 때까지
세상 모든 그림책을 읽어줄게”
한 권의 동화책을 읽는 평온함과 첫 걸음마를 떼는 불안함
그 모든 순간을 보살피는 돌봄의 손길

동시대 시를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한국시의 목록을 새로이 쌓아가고 있는 문학동네시인선이 올해를 여는 첫 시집으로 남지은 시인의 『그림 없는 그림책』을 선보인다.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격렬함을 고요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재능”(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있으며 “언어를 절제한 만큼 의미-이야기가 증폭된다는 시의 ‘황금률’이 모범적으로 적용된 시”(시인 이문재)를 쓰고 있다는 찬사와 함께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12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긴 시간 섬세하게 퇴고를 거듭한 끝에 50편을 추린 이번 시집에는 한 권의 그림책을 읽듯 따뜻하고 평온한 시들과 첫 걸음마를 뗄 때의 위태로움을 담은 시가 함께 담겨 있다. 간결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세계의 면면을 포착해냄으로써 눈에 띄지 않는 존재에게까지 손을 내미는 남지은 시의 처음을 기쁜 마음으로 소개한다.
저자

남지은

저자:남지은

2012년문학동네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어린독일가문비나무는크리스마스트리에쓰인다
귀신의집/비상계단/모래상자/표정카드/오르간/모조/흉/탄력성/도마뱀/혼자하는실뜨기/일치/호각/오르간/고양이보호자

유리그리기
유리그리기/잼잼/하우스피규어/넝쿨장미/화단/양손/헤드뱅잉/목마/말하기에대한강박/가정과학습/침습하는목소리/도움닫기/재생/이미지게임/글자가족/양분/코스튬/커터

그럼에도흰눈이그리는곡선
성호를그으며/헹가래,헹가래/전염/젖은발/캄파눌라/유수지에서/수평의세계/기척/복기/그림없는그림책/크로키/새벽탈출/잊었던용기/장마도깨비여울건너는소리/테라스/참새변주곡/혼자가는먼집/마트료시카

해설_시가기르는작은시
김지은(동화작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시집의제목인‘그림없는그림책’은안데르센의동명의동화집에서가져온것이다.이동화집에는어떤그림도없다.우리가읽을수있는것은오직글자뿐이다.하지만그렇기에오히려우리는그림이보여주는것이상을상상할수있으며,스스로더욱풍부한이야기를만들어낼수있다.남지은의시집역시이와닮아있다.시집의각부를숫자로표기하는일반적인방식에서벗어나소제목만으로구분하는형식은각부를한시집의구성요소라기보다는각각의개성을지닌단권의그림책처럼느껴지게한다.그리고무엇보다남지은의시는그림없이도우리에게다른세계를상상하게하고그세계로훌쩍건너가게하는안데르센의동화집처럼,절제된언어로더많은것을보여준다.다시말해“적게말하고작게접어서/비우고나면”(「마트료시카」)비로소마주하게되는가벼움의미학이담겨있는것이다.

식탁엔꽃병을두었다꽃도말도정성으로
고르고묶으면화사한자리가되어서
곁이란말이볕이란말처럼따뜻한데라서
홀로는희미한것들도함께이면선명했다
모두들어디로간걸까왜나만남았을까
그런심정은적게말하고작게접어서
비우고나면친구들이와
새롭게채워지는것들이있다식탁엔
커피잔을들면남는동그란자국
반드시오고야말행복
_「마트료시카」부분

남지은의시에서가벼움은시적화자가마음을다해돌보는“어린사람”(「귀신의집」)과긴밀히연결된다.어린사람은“작은영혼”을지닌사람이자물리적으로도“무척이나가벼”(「기척」)운사람이다.모든것이처음인어린사람을화자는정성껏돌보며머리를“다정히묶어”(「성호를그으며」)주고“너는나를이런식으로닮아선안된다”(「잼잼」)고스스로에게되뇌듯속삭인다.
또한가벼움은시인으로서남지은이시를대하는태도와도관련되어있다.시인은양육자가아이의얼굴에묻은침이나콧물을부드럽게닦아주듯감정적서술과긴수식어들을덜어내말끔하게다듬는다.고요한공간에서아기의“이마를짚”(「호각」)고“울고싶은사람을울게하는약”(「말하기에대한강박」)을입에넣어주는이의애틋한손길을통해아기를향한그의사랑을짐작해볼수있는것처럼,시인역시자신의진심을절제된방식으로드러내며“더큰사랑을이룩”(「잊었던용기」)한다.때문에시인이공들여정리한이시들이우리앞에놓일때,우리는돌봄을받는어린사람처럼시들을손으로쥐기도하고냄새를맡기도하면서시와가까워진다.우리는남지은의시를읽으며점점가벼워지고시인의사려깊은돌봄에의해시와함께길러지는것이다.“어린독일가문비나무”(「표정카드」)처럼,어린사람처럼가볍고연약했던우리는시인의품에서‘그림없는그림책’을통과하며“지붕이없어서”“키가웃자”(「이미지게임」)라는커다란나무가된다.

기차,기차,기차,그리고기차들이
눈썹끝에모인다
이불아래주춤주춤모여드는구름
가슴위로코끼리가발하나를얹는다
장마가시작된다
하수구의쥐들이튀어오르고
지붕이없어서
나무들의키가웃자란다
_「호각」부분

하지만『그림없는그림책』이그저편안하고부드러운이미지로만구성되어있는것은아니다.시집에는어린시절깊은상처로남았을법한장면들이고스란히그려져있다.“말을하면혼이났”(「가정과학습」)고“말을안하면그래도혼났”(같은시)던일,“고모아빠가엄마때려요/이모엄마좀숨겨주세요”(「도움닫기」)라고말해야했던일,“취한손으로가족들발톱을/뽑아내는”(「넝쿨장미」)아버지를마주했던일이그렇다.크게상처를입었을만한상황들임에도화자는자신의감정을표출하지않은채절제된단어들로과거의기억을되짚는다.그뿐아니라자신을양육하느라“신발신어본지도여러날이지”(「재생」)난양육자의마음역시감정이크게개입되지않은담백한시선으로바라본다.시인은시적화자가어린시절에받았던상처를자세히들여다보고그상처가남긴오래된흉터위로조용히손을포갠다.잔인하고괴로웠던기억도,따뜻한보살핌의기억도모두시로승화시키며시인은돌봄을받는이에서돌봄을수행하는이로한뼘성장한다.
어린시절의상처와그로인한흉터가시곳곳에서보이는데도불구하고남지은의시집이한권의동화처럼다정하게독자들에게말을걸수있는이유는무엇일까.그것은시인과시적화자모두자신의상처와흉터를정확하게인식하면서도,자신이돌봄의대상이아닌주체가되었을때어린사람에게같은상처를주지않으려되뇌이기때문일것이다.“괜찮아?춥지않겠어?다정한물음이있고/어떤이야기를계속하기좋은순간”(「테라스」)이나“늦었네들어가자/그런말이당신을덜다치게하고/어딘지모를집으로되돌아가게한다”(「잊었던용기」)는말에는온기와애정이담겨있다.자신만의언어와방식으로상처를인식하고치유하며같은상처를대물림하지않으려는마음,그마음이담긴남지은의시를읽으며우리는다시어린사람이되었다가마침내시의다정한손길아래서“난간에기대어자라던식물들이난간을벗어나”(「테라스」)듯또한번성장하게될것이다.

늦었네들어가자
그런말이당신을덜다치게하고
어딘지모를집으로되돌아가게한다
(…)
그림을망친아이처럼당신이운다면
다시잠들때까지조금더자랄때까지
세상모든그림책을읽어줄게
미술관에도박물관에도수목원에도다데려갈게
좋은이모되고싶다
좋은말을고르고빚어서아기손에쥐여줄
우리가꿈꾸는가족
비어있는화면에의미를더하면서
더큰사랑을이룩하게될때까지
_「잊었던용기」부분

남지은의시를읽는시간이한권의동화집을읽는시간처럼평온했다거나불온했다면그것은그의시가우리를어린사람으로돌려놓는일에기여했다는뜻일것이다.양육당하겠다고자처하면서도내심으로는양육하겠다는자들이출몰하는시대에시의양육자는어떠한결로이작은등아래에손바닥을두고있는가.더많은어린사람들이남지은의시안에서길러지기를원한다.그시로부터걸어나와서나무로서기를원한다.『그림없는그림책』에그림이없는것처럼길러진자들도기른자들도이시집덕분에,시집보다크게자라서그밖에크리스마스트리처럼서있기를원한다.
_김지은,해설에서

남지은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2012년문학동네신인상을통해등단하신이후처음으로펴내는시집이에요.첫시집을출간하신감회가남다르실듯한데,소감한말씀부탁드려요.

할수있다면책을내고싶지않았어요.부끄럽고어느때는두렵기까지했어요.시간이흘렀고저는자랐어요.도움을구하고용기를냈어요.마음을충실하게따르면서시를모으고마침내책을완성했습니다.제게맞는호흡으로최선을다했어요.출판사와의오랜약속을지킬수있게되어기쁩니다.

Q2.‘그림없는그림책’이라는,모순을담고있는제목이인상적이에요.제목을어떻게결정하게되신건지궁금합니다.

말씀처럼,그림이없이는그림책이라고할수없겠지요.제목은<인어공주><미운오리새끼>로우리에게익숙한안데르센의동화집제목에서가져왔어요.‘그림없는그림책’을발음해보면단순하지만반복과운율이담겼고,제시들과잘어울리는것같습니다.무엇보다제가생각하는시쓰기를설명하기에좋은제목같아요.저는어떤마음이제안에들어서면오래들여다봐요.마음의형국과내력을따라가다보면떠오르는이미지가있어요.시쓴다는건자기안의이미지에질서를부여하는일같아요.시집엔글자뿐이지만,시는읽는사람에게가기어코새로운장면으로맺힙니다.

Q3.이번시집에는‘실뜨기’‘잼잼’‘하우스피규어’같은어린시절의놀이들이많이등장하기도하고,“이마를짚”(「호각」)거나“머리를감”(「성호를그으며」)겨주는등시적화자가어린사람을돌보는시들도눈에띄어요.저는이런시들을읽으면서‘무언가를책임지고돌보는마음’을느꼈습니다.이런시들을쓰실때어떤마음으로쓰시는지,시를쓰실때어떤것을중요하게생각하시는지궁금해요.

어린사람의모습과그를돌보는사람의지극함이제시에깃든건자연스러운데가있어요.저는어린이곁에서오래일해왔어요.어린이책편집자,어린이병원문화공간운영자등으로모양을바꾸어가면서지냈고,지금도글쓰기수업을열어어린이들을만나고있어요.계속눈을두고있기에,의식하든하지않든그시선이시에묻어난것같네요.작년봄,한인터뷰에서‘당신은왜어린이를사랑하는가’하는질문을받은적이있는데,충분히답하지못했다고느껴요.삶으로도시로도제게중요한화두임에는틀림없어요.시는제삶을인용하거나번역하면서생기는부산물이아닐까생각도해요.현실을있는그대로떠옮기는것과는다르죠.어린존재들이사는세계에단단히발디디고감각하고싶어요.계속해보겠습니다.

Q4.처음시집편집작업을시작할때이시집의각장이한권의그림책처럼읽히면좋겠다고말씀하신게오래기억에남는데요,일반적인시인선처럼숫자로부구분을나누지않은것도어떤독자들에게는낯설게느껴질수도있을것같습니다.시인님께그림책이란어떤의미인지,이시집이왜그림책처럼독자들에게다가가기를바라셨는지듣고싶어요.어떤기준으로부를구성하셨는지도궁금합니다.

시를쓰겠다고자리에앉으면금세주눅이들곤해요.제가가진말주머니가가난하게느껴지거든요.저는시와멀어진동안그림책을탐닉하고탐독했어요.그림책의아름다움에매혹되었다풀려났을때,제몸은달라져있었어요.한문장에서다음문장으로넘어갈때,한연에서다음연으로건너갈때마다그림책의페이지를넘긴다고생각했어요.그러면원래보다조금더가볍게,멀리가볼수있었습니다.그렇게쓴시를모아시들을배치할때에도그감각을유지하려고했어요.시와시가기대어있을때그간극에서비롯되는아름다움과넘김이주는긴장을염두에두었어요.시들이하나의이야기를하자고촘촘히모인것은아니지만요.
한편부에숫자를붙이지않은건,부의순서를꼭지켜읽지않아도된다는뜻을표하고싶었어요.총세개의부,‘어린독일가문비나무는크리스마스트리에쓰인다’‘유리그리기’‘그럼에도흰눈이그리는곡선’은각기다른분위기를풍깁니다.정답이없으니끌리는대로시집에진입하시면좋겠어요.

Q5.마지막으로『그림없는그림책』과함께봄을시작하는독자들에게인사를건네주세요.

시집뒷면에그려진그림이무엇처럼보이나요?펼쳐진책에서글자들이빠져나가고,비스듬히비행하는새의날갯짓이보입니다.오늘은타오르는입술,이제막타오르기시작한성냥개비처럼당신께말을붙이는입술입니다.책장을덮고나면그입술은당신만의것이됩니다.그환한입술로저에게도많은이야기를들려주시길,손모아기다릴게요.

시인의말

초인종이울린다.이름모를새가지저귄다.
손님이포기하고발길을돌릴때까지
나는잠자코기다린다.

“넌왜너희집에나를초대하지않니?”
윤주가물었다.
톡쏘는말투이지만못내섭섭하다는표정이었다.

열두살윤주에게뒤늦게이책으로편지한다.
너에게만은털어놓고싶던속비밀이여기있다고.

2024년3월
남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