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쓴 작은 글씨 (Mikrogramme | 희미해져가는 사람, 발저의 마지막 나날 | 양장본 Hardcover)

연필로 쓴 작은 글씨 (Mikrogramme | 희미해져가는 사람, 발저의 마지막 나날 | 양장본 Hardcover)

$18.50
Description
“손글씨에서 스스로를 비춰보고 연필로 쓴 것을 베껴 쓰는 동안
나는 어린아이처럼 글 쓰는 것을 다시 배웠다.”
_로베르트 발저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이 읽었다면 세상은 보다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_헤르만 헤세

발저의 작품에 나타나는 윤리의 핵심은 권력과 지배에 대한 저항이다. 발저의 힘은 고도로 세련된 예술의 힘이다. 그는 진실로 놀라움과 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작가이다._수전 손태그

로베르트 발저가 살면서 남긴 흔적은 너무나 희미해서 바람이라도 한 자락 불면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발저는 여전히 유일무이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가능한 한 숨겼다._W. G. 제발트

카프카와 헤세가 사랑한 작가 로베르트 발저가
발다우 요양원에서 쓴 스스로도 읽을 수 없는 작은 글씨들
1956년 12월 25일, 눈이 내리던 크리스마스에 한 노인이 눈 속에서 산책을 하다가 쓰러졌다. 헤리자우의 요양원에 거주하며 산책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평범한 노인. 위대한 작가 로베르트 발저다. 그는 평생을 글을 써왔지만 세상에 이해받지 못했다.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집 한 채, 가구 한 점, 아주 적은 재산 한 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 세상의 고립된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고립된 작가. 그저 변변찮은 양복 한 벌 입고, 조끼 주머니에 몽당연필 한 개와 잘라낸 메모지들을 가지고 다니며 이런저런 것들을 적어넣을 뿐이었다.
장편소설 『벤야멘타 하인학교』와 『타너가의 남매들』 등의 작품으로 이제는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로베르트 발저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고독한 산책자’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로 유명하다. 하지만 잘 알려진 초기 작품들에 비해, 발저 문학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후기 작품들은 국내에서는 여전히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연필로 쓴 작은 글씨』는 프란츠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 W. G. 제발트, 수전 손택 등 무수한 대가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은 발저가 직접 쓴 작은 글씨의 유고인 ‘마이크로그램’을 해독하고 선별해 펴낸 책이다. 총 33편의 글과 함께 그 글에 해당하는 육필 원고를 찍은 사진 68장을 실제 크기로 함께 배치했다. 맨눈으로는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이 글씨들은 그 존재와 조형성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오롯이 빛난다.

암호문인가 그림글자인가
『연필로 쓴 작은 글씨』에 담긴 마이크로그램은 발저가 살아 있는 내내 공개하지 않았던 비밀 원고다. 이 원고들은 고독과 불안, 망상으로 고통받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글쓰기를 이어가고자 한 발저의 의지를 보여준다. 마이크로그램 뭉치가 발견된 당시에는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의미 있는 텍스트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1980년부터 2000년 사이에 베른하르트 에히테와 베르너 모어랑이 총 526장으로 이루어진 메모들을 모두 정리해 6권의 『연필 영역』으로 펴냈고, 이 개척적인 편집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발저 후기 작품의 중심적인 텍스트이자 문학예술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자리잡았다.
1920년대 이후 손의 움직임에 이상 증세를 느낀 발저는 펜으로 쓰기를 중단하고 연필로 작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 위에 다시 펜으로 정서하는 작업 방식, 다시 말해 그가 ‘연필 체계’라 부른 작업 방식을 취한다. 이처럼 연필과 펜으로 이중으로 쓰인 각종 원고 뭉치들 중에는 1929년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정신분열증’으로 베른 근처의 발다우 정신요양원에 보내진 이후에 쓰인 것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출판되지 않았던 원고의 특성상 이 텍스트들은 종종 이해하기 힘들고 거친 부분들이 많은데, 극도로 작은 글씨로 쓰인 원고는 그 자체로 시각적인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해서 초기 연구자들은 여기서 정신분열, 자폐, 거부증 등 정신적 질환을 읽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발저에게서 정신적 친밀성을 발견했던 W. G. 제발트는 이 원고를 병리적 증후로 읽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정신이 해체 직전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을 때 오히려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관찰력과 예리함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제발트는 오히려 그 속에서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글쓰기에 대한 치열한 욕구를 발견했다.
『연필로 쓴 작은 글씨』에 실린 육필 원고의 사진들은 손으로 쓴 글씨체, 텍스트의 전달체인 용지, 용지 위에 텍스트의 배치 등에서 발저가 구사한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달력이나 포장지, 엽서, 영수증이나 계산서 같은 각종 문서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었던 일상적인 종이의 뒷면이나 여백에 써내려가면서, 텍스트를 배열하거나 여백을 사용하는 방식은 시각적, 신체적, 물질적 요소들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암호문’ ‘그림글자’ 등으로 불린 이 텍스트는 종류도 일반적인 산문에서부터 시, 소설, 희곡과 비슷한 형식의 글 등 여러 가지로 다채롭다.

침묵을 위한 글쓰기
글쓰기에 관한 여전히 꺾이지 않는 갈망에도 불구하고, 그의 많은 마이크로그램들이 어느 시점부터는 독자들을 상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글쓰기 자체를 위해 쓰였다는 의미에서 『연필로 쓴 작은 글씨』는 가장 은밀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저의 글씨들은 점점 더 작아졌으며, 나중에는 발저 자신도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헤리자우 정신요양원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마침내 글쓰기를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이른바 금치산자로 만듦으로써만 비로소 글쓰기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 글 쓰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마치 나쁜 짓이나 심지어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언제나 부리나케 메모장을 주머니에 감췄던 사람. “아무래도 작가들에게 글쓰기라는 것은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답이 없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관둘 수는 없는 것 같다”고 제발트는 이야기한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연필로 글을 쓰는 것은 숨쉬며 생존해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에 다름아니었다. 삶이 그러하듯, 그의 글은 우리에게 그 무엇도 확정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문학의 의미와 무의미가 동시에 존재한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로 낯설게 남아 있는 이 텍스트들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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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베르트발저

1878년스위스빌에서태어났다.1898년처음으로시를발표했고,1906년부터『타너가의남매들』『조수』『벤야멘타하인학교:야콥폰군텐이야기』등을출간했다.1913년모국스위스로돌아와산문집『작은문학』『물의나라』,장편소설『토볼트』『테오도르』등다수의작품을집필했고,1925년2월마지막산문집『장미』를출간했다.1929년베른에있는발다우정신요양원에입원했다.1933년헤리자우에있는요양원으로이송된후에는절필한채여생을보내다1956년12월25일산책을하던중눈속에서심장마비로사망했다.

목차

프롤로그

저기있다
한때좋은사람들이나를보았던그곳
우리는알지못하는손에
약이십만년전에
이도시에얼마나많은주민이사는지잘모르겠으나
평소에나는항상제일먼저산문작업복,말하자면일종의작가재킷을입는다
아가씨/구원자
그래,나는고백해
모든특출한사람은언젠가한번은취리히에머물렀다
이제또다시짧은산문
나는춤추는것을스스로금한다
내가쓰는것은,아마도한편의동화일거야
여행바구니안혹은빨래바구니안
미모사
부고
하얀남자들
잔인한관습,윤리,습관등
아마도우리시대를가장잘특징짓는것
오,어제그녀는우리도시의가장유명한카페에서(……)얼마나웃어야했는지
내가극장상황에관한이글을전혀서두르지않는것은
이날밤나는아무런꿈도꾸지않았다
오래생각할것없이나는그를올리비오라고부른다
모든임의의주머니들이믿는다면
강력한부드러움으로
오늘의글을쓰는수고로당신에게알려주려한다
대도시에사는것을더높이평가하지말것
벽들이검게빛을내는방안에서
그녀는자신의분노에화가나서새파래졌다
이이야기는아름답다기보다는차라리우스꽝스럽다
룬트리히부인은태도가화려하고
거기서식하며그지역에이름을붙인녀석들은덥수룩한털을가지고
여기는조심스럽게번역된다
나는이눈내리는풍경이아름답기를소망한다


후기루카스마르코기지,페터슈토커,레토조르크
해설안미현:로베르트발저의『마이크로그램』에관하여
옮긴이의말

출판사 서평

도대체왜이글들을읽고,심지어번역까지하려했는가?그것은발저의글을옮기는내내스스로에게던진질문이기도하다.의미있고심오한글을번역해서우리학계와문단에뭔가를기여하리라는나의자부심과욕망은아랑곳없이,그는낮은목소리로,밑도끝도없이,자신만의생각을늘어놓는다.매순간머릿속을잠시스쳐갔던생각들,눈앞에잠시머물렀던인상들을주저리주저리늘어놓는것이다.도대체그는과묵하고수줍은사람인가?수다스럽고말많은사람인가?그는스위스특유의애국주의자인가,모든규범에저항하는반사회적인물인가?그의작은글들은목적성과성과의식으로가득찬내가끝끝내답을찾지못할것임을미리말해주는듯하다._‘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