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박승열 시집)

감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박승열 시집)

$10.00
Description
“두나는 두나를 벗어나 또다른 에고로-
그런 방향의 결말은 아닐 것이다.”

정향과 우회를 거듭하는 ‘나’라는 아이러니를
동력으로 상연되는 시의 극장

문학동네시인선 175번으로 박승열 시인의 첫 시집을 펴낸다. “운율이 살아 있”는 “패기만만한” 시를 통해 “생성과 탈주의 놀이”(『현대시』 2018년 하반기 신인추천 심사평)를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으며 데뷔한 시인은 이 시집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한 인간이 되는”(「파도」) 존재 증명의 과정을 때로는 날카로운 직설화법으로, 때로는 매력적인 알레고리로 선보인다. 어떠한 “오류도/기원”(「직물들」)에도 구애받지 않고 내면의 “날아오르려 하는 파도”(「파도」)의 흐름을 따라 무한히 피어나고 부서지는 에너지를 시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내는 이번 시집은 ‘첫’ 시집다운 치열한 활기가 넘실거려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 시집은 시의 성격에 따라 부를 나누는 통상적인 구성과 달리 총 세 개의 막(幕)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편의 시들이 이야기성을 띤 상황극이라는 점, 독특한 운율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형식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1막과 2막, 2막과 3막에는 ‘사이’라는 휴지부를 두어 시를 읽어나가는 이의 호흡까지 고려한바, 시집 전체가 한 편의 완결성을 지닌 ‘3막극’이라 할 수 있다.
저자

박승열

2018년『현대시』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1막무엇이든피어나는내부
감자독백/오렌지의꿈/코끼리의생각/푸른돌멩이/셔츠/술래잡기/활자기피증/오이와나/아파트/미싱/물고기풍경/꿈속의돌/프레스/물장구/파도

[사이]김구용과의대화록

2막두날의꿈은완전히달랐다
배두나/천재는죽지않는다/나의공산당친구들/변신하지못하는변신마법사/레몽끄노의것/마작치는사내/필립모리스유통회사/전집들/강남한카페에서/레몬과소금/궁전/하얀쥐들내나이가어때서/7월일기장

[사이]우주적사고

3막오류도기원도모르고
빛나지도,빛을반사하지도않는것/직물들/생각하는계란/당신의언어는안전합니까/장난감쥐와내친구들/경제학/서점에서훔치지말아야할것/꽃한송이/중력/돌/똥이자란다/탁자에대한사랑/모든요일이지나기전에/스타벅스모카커피/말복더위/정월대보름/실제모델

해설_낭만적아이러니3막극
조강석(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내가시선을돌리고있을때
감자가나를보고있었다.

뼈처럼.감자.빛처럼.감자.
한무더기감자가일제히나를보고있었다.

아버지김이와서감자한알을가져갔다.
아버지이,박,최가
내뒤에서자꾸만감자를가져가고있었다.
아버지김,이,박,최의품속을
감자는자꾸만파고들고있었다.
품속의옅은빛에의존해
감자는자꾸만내뒤통수를쳐다보고있었다.
_「감자독백」부분

첫시「감자독백」은“아버지김,이,박,최”가화자‘나’의뒤에서자꾸만감자를가져가더니종래에는아버지도감자도사라지고“나혼자”남게되는상황을보여준다.시가자아내는모종의존재론적불안은어쩐지우스꽝스러우면서도일면슬프고도섬뜩한정조를형성하는데,이것은‘무엇이든피어나는내부’라는제목을단1막을관통하는분위기이다.동네를거니는개‘릴리’가죽고나서그“개의이름을아무도기억하지못”하는현실을마주하는「술래잡기」,“풀밭위에서”혼자“탈탈탈탈”돌아가는미싱의소리에귀기울이다가미싱의꿈속으로들어가는「미싱」,“유령을볼수있다는아이들에게조차모습을드러내지”못할만큼키가작은“난쟁이유령”의속삭임을들려주는「물장구」등은이정조를여실히드러내는작품들이다.누구나성장과정에서한번쯤느낄법한,자신과타자,그리고세상사이의간극과그로인한‘낯설어짐’이박승열특유의스타일로표현된다.

한편,2막(‘두날의꿈은완전히달랐다’)과3막(‘오류도기원도모르고’)은다양한시적주인공들의사연을본격적으로펼치는박승열만의활달한무대이자시의놀이마당이다.“충격적이지않으면그건영화가아니에요”라고말하는“배우이자화가”이면서여러‘에고(ego)’로분열하는가상인물배두나를그린「배두나」,“세상에살아남은마지막마법사중한사람인조셉”(「변신하지못하는변신마법사」),“자신이레몽끄노임을모두가알고있어서너무불안”한레몽끄노(「레몽끄노의것」),무엇을고쳐야하는지모른채“고쳐야겠어”라고중얼거리는필립모리스유통회사의회장필립모리스(「필립모리스유통회사」)등이이무대의주인공이다.저마다처한문제나내면의분열에서벗어나려는이들의모습은흔히‘카프카적’이라고일컬어지는미로같은상황속에서때로는농담처럼,때로는악몽처럼이어진다.

두나는자신이원래두나에고중하나였다고했다.그것도가장최신형의.16종의두나에고를만든송강호씨는,뱅글뱅글돌아가는여러개의두나에고를가진,에고상품계의혁명이라불릴만한,열일곱번째두나에고를만들어냈다고.
성공한두나가아니라혁명적두나에고였군요.
아니요.
_「배두나」부분

이시집에서또한가지주목할점은저자인‘박승열’과동명의화자가등장한다는것이다.“시인이자대학강사였던박승열씨”(「내나이가어때서」)는삼십대에꿈의한장면을옮겨적은시가수록된시집을펴냈지만곧절판되었고,칠십대가된지금또한번꿈을옮겨적은새로운시를완성하기에이른다.하지만과거의꿈과현재의꿈은“완전히”다르다는걸그는“분명하게”구분한다.마찬가지로시인과동명의화자가등장하는3막의「정월대보름」「실제모델」까지살펴보았을때시인의의도는한층선명해진다.

정월대보름에는문득그런생각이들었다내가여태쓴시를다합쳐도오늘꿈에서쓴시한줄만못하지않은가그러나그한줄은도저히기억나지않고

(……)

‘싶다’는말은이제그만,시에대한시도이제그만,박승열씨가등장하는시도이제도저히,아또3이다관습적언어를폐기하려고써왔는데습관성리듬에갇혀버리다니박승열씨도이제늙어버린건가싶고

아마꿈에서쓴시는영영기억나지않을것이다
정월대보름날에는
환하게뜬보름달이나
보면그만이지
싶다,
_「정월대보름」부분

누군가를실제모델로한내인생이또다른누군가의실제모델이라면
또다른누군가의실제모델은나인가,아니면내실제모델인누군가인가
_「실제모델」부분

이러한시들에는시인자신을모델로삼는예술적자의식과메타시적의도가담겨있다고도볼수있지만,한편으로일종의자기예언이담겨있다고도볼수있을것이다.시를쓰는내부의자아와그러한자신을관찰하는바깥의또다른자아를오가며오직시를쓰는‘현재’만을살아가고싶은욕망,그것이박승열시의세계관을구성하는핵심요소이기때문이다.그는“이름을넣을새”없이“시를쓰고나면곧장창을닫아”(「활자기피증」)버리는시인이자,어떤상황에서도“웃는얼굴”(「마작치는사내」)을고수하고자하는시인이다.앞으로이시인이시라는장르의외연을넓혀가며어떠한도발적인모험을펼칠지기대하지않을수없다.

“정향과우회를거듭하는것이야말로아이러니의핵심이다.도달할수없기때문이아니라손에잡힐듯가까운데다가갈수록멀어지는,거리의역설이아이러니의정수이다.아하,이3막극은낭만적아이러니극장에서상연되는것이겠다.(……)한계속의되풀이와우회하면서다가가기,그리고다가가면서우회하기가아이러니의운동궤적이다.박승열은바로이운동속에서시를감행하고있던것이다.다음상연에서도우회와정향의되풀이가지속될것인가,아니면새로운극장이열릴것인가……”
_조강석,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