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서울의 초기백제(한성백제) 유적이 분포돼있는 한강 남쪽 구(舊) 경기도 광주군 북부지역이 1963년 1월 1일을 기해 풍납동을 포함해서 강동구 일원이 서울특별시(천호출장소)에 편입되고, 같은 해 1월 21일 풍납토성이 ‘광주풍납리토성(廣州風納里土城)’이란 이름으로 국가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강남지역이 1975년 9월 3일에 서울특별시의 자치구청이 신설되고 나서 급속도로 도시화 되면서 강남지역에 분포되고 있던 초기백제 유적들이 많이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편자와 동양고고학연구소는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석촌동 백제 적석총과 방이동 고분군 등 한성백제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왔으며, 특히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의 수도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란 사실을 학술조사와 연구 활동을 통하여 밝혀내려고 노력해 왔다.
그 첫 학술회의가 1983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개최된 「한강유역 백제전기 수도유적 보존문제」이고, 그 후 편자와 동양고고학연구소가 풍납토성과 한성백제유적을 조사연구하고 이를 보존하기 위한 학술세미나를 다섯 번을 주최하였는데, 2번은 국내 세미나이고 3번은 국제 세미나이다. 1983년 학술회의를 비롯하여 6차의 학술세미나에 선학(先學)ㆍ선배ㆍ동료, 동학 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격려로 학술회의가 가능하였고 풍납토성를 비롯하여 석촌동 백제 적석총과 방이동 고분군 등 한성백제유적이 오늘날 이만큼이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올해가 풍납토성 사적지정 60주년이 되는 해이고 겸해서 1983년 첫 학술회의인 한강유역 백제전기 수도 유적 보존문제 제기 40주년이 되는 해라서 이를 기념하고 원로 선학ㆍ선배ㆍ동료, 동학 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6차례의 학술회의 논문집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염원(念願)해 왔다. 그러나 그사이 많은 선학ㆍ선배들께서 유명을 달리하셨고,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있었고 편자 역시 건강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정식 출판해야겠다는 각오로 여기에 이르렀다.
불과 40년 전의 학술회의 발표 자료들이 갱지(更紙)에 프린트되어 많이 빛바랜 인쇄물을 현행방식으로 재생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재생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서울 구의동의 한 작업실에서 OCR(문자인식) 기법으로 전환하는 곳을 찾아내 원상대로 재생 청서(淸書)하여 원고화(原稿化)한 경험이 감개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뿐만 아니라 30년 전의 발표논문도 같은 방법으로 재생 청서하여 컴퓨터에 입력하는 한편, 매회 학술회의 시에 토론 내용을 녹취한 테이프를 채록(採錄)하여 원고화하는 작업에 동양고고학연구소 성원들의 수고로 이만큼 성책(成冊)할 수 있었음을 밝혀둔다.
지금의 강남지역이 1975년 9월 3일에 서울특별시의 자치구청이 신설되고 나서 급속도로 도시화 되면서 강남지역에 분포되고 있던 초기백제 유적들이 많이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편자와 동양고고학연구소는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석촌동 백제 적석총과 방이동 고분군 등 한성백제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왔으며, 특히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의 수도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란 사실을 학술조사와 연구 활동을 통하여 밝혀내려고 노력해 왔다.
그 첫 학술회의가 1983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개최된 「한강유역 백제전기 수도유적 보존문제」이고, 그 후 편자와 동양고고학연구소가 풍납토성과 한성백제유적을 조사연구하고 이를 보존하기 위한 학술세미나를 다섯 번을 주최하였는데, 2번은 국내 세미나이고 3번은 국제 세미나이다. 1983년 학술회의를 비롯하여 6차의 학술세미나에 선학(先學)ㆍ선배ㆍ동료, 동학 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격려로 학술회의가 가능하였고 풍납토성를 비롯하여 석촌동 백제 적석총과 방이동 고분군 등 한성백제유적이 오늘날 이만큼이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올해가 풍납토성 사적지정 60주년이 되는 해이고 겸해서 1983년 첫 학술회의인 한강유역 백제전기 수도 유적 보존문제 제기 40주년이 되는 해라서 이를 기념하고 원로 선학ㆍ선배ㆍ동료, 동학 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6차례의 학술회의 논문집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염원(念願)해 왔다. 그러나 그사이 많은 선학ㆍ선배들께서 유명을 달리하셨고,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있었고 편자 역시 건강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정식 출판해야겠다는 각오로 여기에 이르렀다.
불과 40년 전의 학술회의 발표 자료들이 갱지(更紙)에 프린트되어 많이 빛바랜 인쇄물을 현행방식으로 재생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재생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서울 구의동의 한 작업실에서 OCR(문자인식) 기법으로 전환하는 곳을 찾아내 원상대로 재생 청서(淸書)하여 원고화(原稿化)한 경험이 감개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뿐만 아니라 30년 전의 발표논문도 같은 방법으로 재생 청서하여 컴퓨터에 입력하는 한편, 매회 학술회의 시에 토론 내용을 녹취한 테이프를 채록(採錄)하여 원고화하는 작업에 동양고고학연구소 성원들의 수고로 이만큼 성책(成冊)할 수 있었음을 밝혀둔다.
한성백제 왕궁유적 발견과 보존 학술회의 논문집 : 6차례의 학술회의 발표논문 논평 토론 합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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