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막의 인생
내 인생의 큰 산을 세 가지로 정의해 본다. 산으로 오를 준비를 하는 과정을 나는 인생의 1막으로 본다. 인생의 그 1막은 자신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나의 재능과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야 꿈과 비전이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것이 가능하던가? 그렇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내 인생의 1막은 ‘갈등의 시기’라고 붙여본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는,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님에 관하여 너무도 자연스럽게 믿는 믿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거리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태어나면서부터 내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여전히 결핍과 공허 그리고 혼돈의 시기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다. 열정적으로 교회 일을 하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내적 갈등의 시기는 길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갈등의 시기에 내가 놓지 않았던 막연한 꿈과 비전, 그것들이 나를 곁길로 가지 않게 하였고, 힘들고 지쳐 쓰러지고 순간순간 좌절은 했지만 한 번도 목표나 비전이 포기되지는 않았다. 환경에 흔들린 적이 있었다 해도, 내 인생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선물로 분별력을 주셨기 때문인 듯하다. 갈등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좌절 속에서 예수님을 찾고, 낙심 속에서 성령님의 찾아오심은 나를 늘 더 좋은 길로, 회복의 길로, 소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셨다. 이것이 나의 큰 행복이었고 은혜였다.
나만의 인생의 그림을 그리며 기도로, 외로움도 공허도 무질서도 채우고, 해결하고 바로 잡아간 것이다. 외로움은 고독으로, 공허는 기도를 통해 하늘의 위로로, 무질서는 내 안에 상처를 직면해 가면서 상흔을 성흔으로 치유하시는 은혜로 힘겹게 나의 내면과의 싸움을 했다. 육이 영보다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여차 없이 금식으로 육을 지배하고, 굶기는 기도를 했다. 물론, 지금은 금식에서 자유해졌다. 내적인 질서가 잡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기도는 내 인생의 완전 정복”이었다.
제2막으로의 인생
인생 제2막은 진짜 산에 오르는 시기였다. 1막에서 산을 오르기 위하여 워밍업을 했다면, 나는 결혼과 함께 나름 꿈을 안고 사모라는 사명의 짐을 지고 산에 오르게 된다. “기도하는 사모, 설교하는 사모” 이것이 나의 꿈이자 비전이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 물론 무슨 의미의 말씀인지를 충분히 안다. 무거운 짐은 이미 예수님께서 지고 골고다 산으로 오르시면서 죄 짐을 벗어 내셨기 때문이다. 내가 지고 가는 짐은 예수님의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신 나무 십자가는 인류의 죄의 무게였다면, 내가 지고 오르는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 라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섬 목회를 40년 가까이 하면서 교회를 두 번 옮기고, 세 번째 교회에서 은퇴를 맞이했다. 뒤를 돌아보면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합작이었다. 내가 한일은 다 성령님의 코치를 받아 순종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위하여 맡겨진 성도들을 위하여 사역한다고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이 다 나의 꿈과 비전을 위한 성취였다. 나의 목회를 정의한다면, 나다운 나를 찾게 하셨고, 하나님 사랑은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아니어도 하나님이시다. 그 사실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법이었다는 것을...” 나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진심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은혜는 첫째, 둘째로 순서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도, 부르심도, 깨달음도 모두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은혜였고 사랑이었다.
사모로서의 나의 캐릭터는 ‘에제르 케네그도’였다. 나의 첫 번째 책,『깨진 옥합』은 나를 깨는 훈련이었고, 두 번째 책인『선비목사와 머슴사모』는 남편 목사님의 영적 머슴으로 섬기겠다는 의도를 담았다. 세 번째 책,『흙과 씨앗의 만남』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의 중요성을 사역에 접목했던 책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서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였기에『기도는 내 인생의 완전 정복이다』라는 책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영성 훈련을 통해서 내면 정화를 통하여 초콜릿 같은 신앙이 된장 맛처럼 깊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어『초콜릿 신앙에서 된장 맛 신앙으로』라는 책으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나의 내면이 에덴으로 정화되면서 이론이 아닌 실제적으로 예수님이 나의 첫사랑이고, 나는 예수님의 첫사랑이라고 하는 이 고백을 시집으로 고백하면서『내 영혼의 애인』이라고 하는 영성 시집을 집필했다.
나는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이루어가면서 나 자신과의 관계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특히 사랑하는 영적인 자녀들과의 관계를『행복한 동행』이라는 책으로 발간하여 함께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한계적인 육체 속에 무한대의 마음을 성전화 시키자라는 의미로 성막 교재를 성령의 감동으로 집필하면서 내면 성전화의 훈련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세포 하나하나가 형성되어 사람이 되듯이 목회라는 것이 세부적으로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면 스펙타클한 일들이 많았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걱정, 근심거리를 기도 거리로 삼았고, 예수님의 자랑거리로 전환하여 간증 거리가 되게 하였다. 그때마다 역사하신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고, 깊어지고, 세상은 간데없고 예수만 보이는 삶이 되었다. 공동체의 문제는 나를 목자다운 길로의 인도하심이었다. 누구의 문제라기보다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었다 나의 과거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은혜로 덮어 주시는 사역이었다. 큰 비전 안에서 찾아가는 작은 꿈들이 나를 행복으로 안내한 것이다. 나는 나의 목회를 한 줄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하심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힘들고 지쳐 어려울 때는 ‘하나님이시라면,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성령님께 매달리고 묻고 도움을 구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진심을 좀 더 깨닫게 하셨다. 섬에서 40년 한 교회에서 32년 섬이라는 특수 지역에서 장기 목회는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나는 내 인생의 산 정상에서 은퇴하기를 기도하며 준비했다. 대단히 높은 고지의 산은 아니었어도 의미 있는 인생, 젊음의 시간을 40년 투자한 산이었다. 가장 안전하다고 느낄 때,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 힘이 가해진다고 생각될 때로 시간을 정했다. 올라가는 과정보다 더 위험한 곳은 정상이다. 이것을 알기에 정상에서의 시간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정상은 짧게! 내려가는 인생의 기대(소망)를 가져본다. 은퇴 이후의 삶을 인생의 3막이라 여긴다.
제3막이 시작되다
우리 부부는 조기 은퇴를 꽤 오랫동안 준비했다. 가장 안정되고, 문제없이 행복하게 목회할 때를 산의 정상이라 여기고, 나이가 들면서 영혼에 대한 열정보다는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 되어 미래에 대한 걱정이 들어올 때, 교회나 성도들에게 큰 문제가 없이 평안할 때, 그때가 우리 부부에게는 목회의 정상이고, 곧 내려가야 하는 은퇴의 시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결단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교회를 핑계로, 조금만 더라는 생각이 들 때, 과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도 있었겠지만, 우리에게 목회는 참으로 큰 행복이었고, 보람이었으며 삶의 의미였다. 안정된 교회 속에서 선교에 대한 비전, 적은 숫자이지만 일당백의 사명을 감당하는 소수의 훈련된 사람들, 서로를 향한 풍성한 섬김, 가족 같은 성도들과의 관계는 내 인생의 사랑의 빛으로 남겨 둘 것이다.
교회는 큰 가정이었고, 가정은 작은 교회였다. 하지만 이때가 우리 인생의 산의 정상(클라이막스)이라면 우리는 인생의 산, 전체를 보고 다음 스텝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했다. “정상에서의 시간을 지체하지 말자. 정상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잠깐 누리고, 힘들게 올라온 시간을 치유 받고 돌아갈 시간을 놓치지 않는 곳이다.”라고 외치며 선포하였다. 40여 년 올라가는 과정이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눈물과 수고의 땀도 있었고, 올라가는 과정 가운데 고비 고비가 있었겠지만 정상에서 돌아보니, 오르는 순간순간 속에서 아름답고 행복했던 일들이 훨씬 많았으리라. 풀 하나에도 의미를 찾고 외관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을 산속에서만 느낄 수 있어서 기쁨과 감사로 이 사명의 산을 올랐던 것이다.
정상은 머무는 곳이 아니다. 정상에서의 시간은 자칫하면 중독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정신 차리고 짧지만 해지기 전에, 어두워지기 전에, 캄캄하여 길을 잃어버리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정상에서 해가 지기까지 누리고 머무르면, 다음 스텝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교회 사역의 은퇴는 우리에게 있어서 정상에서 내려옴이었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발걸음은 산을 오를 때와는 아주 다른 풍경들을 만나게 된다. 내려감은 일단은 전인적으로 가볍다. 하나하나 내려놓는 것을 배우고 있다. 내려놓는 것이 행복이고 자유함이라는 것을 맛보고 행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시간이다.올라갈 때 보다 훨씬 더 가벼운 차림으로 말이다. 물론 물리적 나이로 인해 육체의 다리가 풀리고 에너지가 소진되지만 그것까지도 감사하다. 작은 것에 소중함,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행복은 ‘소유’보다는 ‘감사’에 있음을 안다. 그리하여 하루 영성의 틀은 ‘감사’이다. 감사는 풍요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아도 감사한 것은 인생도 내일이 내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넉넉하여 풍성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채워짐이 은혜이기 때문이다. 세상 기준의 높은 산이 아니어도 나의 인생의 산은 아름다웠다. 사모로서의 삶에 만족한다. 그래서 더 감사하다. 나는 정상에서 두 깃발을 꽂고 내려간다. 은혜와 감사... 이 산을 내려가 시간이 주어지면 작은 천막, 영적인 주막집을 짓고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영적인 충전소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주막집은 성전이 되어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쉼터가 되어줄 것이다. 이것이 인생 3막의 작은 꿈이다.
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