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

$22.10
Description
광개토태왕비 변조 논쟁을 종결지을 완결판!
시청자 반응이 폭발했던 JTBC「차이나는 클라스」제43회 내용과 초판을 증보한
이 책 한 권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운다!!!
광개토태왕비문, 문맥, 문법, 글씨체를 다시 보자
- 새로운 연구방법으로 변조를 증명한 광개토태왕비문의 변조 논란의 종결판 -

광개토태왕비문의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와 동일 민족관계에 있는 ‘속민(屬民)’으로 보고 기록한 문장이므로 백제와 신라를 다시 동일 민족 관계가 아닌 신민‘(臣民)’으로 칭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신묘년 기사의 ‘신민’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왜(일본)를 칭한 말이며, 이 기사의 원래 문장은 당연히 ‘고구려가 왜를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이다. 서예학자 김병기 교수가 증보하여 펴낸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의 핵심 내용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속민’과 ‘신민’의 확연한 의미 차이를 밝혀 이런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이어, 김 교수는 일본이 변조한 ‘도해파(渡海破: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깨부쉈다)’ 세 글자의 변조 전 원래 글자는 ‘입공우(入貢于: 왜가 백제, 가야, 신라에 조공했다)’였음을 글씨체를 분석하는 서예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였다. 광개토대왕비의 필획과 결구의 특징을 서예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김 교수가 선택한 획기적 방법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글씨 자체가 빼어난 서예 작품이므로 서예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그동안 우리 학계는 이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김 교수는 또 일제가 제시한 ‘래도해파(來渡海破)’구에 대해 한 중ㆍ 일 어디에서도 고대에나 지금이나 ‘도래(渡來)’라는 단어만 사용해왔을 뿐 ‘래도(來渡)’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는 전무함을 확인함으로써 이런 구절을 제시한 자체가 변조의 증거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김 교수는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에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왜가 깨부숴 그들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치욕적인 내용을 왜 새겨 넣었겠느냐?”면서, 일부 학자가 제시한 “백제와 신라를 깨부술 정도로 매우 강력했던 왜를 후에 고구려가 제압했음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광개토태왕의 무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근거 없는 개인적 ‘상상’일 뿐이라며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아울러, 일제가 가져간 최초의 탁본인 ‘사코본’ 이전의 탁본이 발견되었다는 중국학자 서건신(徐建新)의 논문에 대해서도 ‘신발견 탁본’의 모순과 허구성을 들어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이어, 김병기 교수는 현재의 광개토태왕비 연구는 대부분 각종 탁본의 글자를 대조한 후, ‘내 눈에는 이 글자로 보인다’면서 ‘주관적인’ 판독을 제시하고, 그런 판독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한, 중, 일의 고대사 자료를 자신의 판독에 유리한 방향으로 인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다 보니 비문의 원래 문장에 충실한 해독을 하지 않고 오히려 후대의 역사서, 심지어는 『일본서기』의 내용에 맞춰 비문을 왜곡 해석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염려하면서 이제는 일제가 쳐놓은 왜곡된 ‘실증주의’ 역사연구법의 덫에서 벗어나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시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광개토태왕비 변조의 한 예: 변조되지 않은 곳의 破(좌)/ 변조된 곳의 破(우)
김병기 교수는 서예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의 건립 당시
같은 사람이 쓰고 새긴 글씨가 이토록 다를 수는 없다며 변조를 주장한다.
저자

김병기

1954년전북부안에서태어나초등학교입학전부터엄친영재김형운선생에게한문과서예를배웠다.1980년에대만에유학하여6년동안중국시학과서예학을연구하는한편대만의저명한서예가들과교유하며서예에대한실기능력과감상안목을높였다.1984년에국립공주사범대학에부임하였으며1988년에『황정견(黃庭堅)의시와서예에대한연구』로대만의중국문화대학에서박사학위를취득하였다.1999년부터전북대학교중어중문학과에재직하고있다.강암송성용선생의제자로왕성한작품활동을펼치고있는서예가이자우리서단이주목하는서예이론가이기도하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총감독,문화재청문화재전문위원,한국서예학회회장,한국중국문화학회회장을역임했다.중국,일본,미국,이탈리아,러시아,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스페인등에서특강과서예전을개최하고무대공연으로서예를시연하여호평을받았다.2019년에는북경대학100주년기념관에서초대전을가졌다.『북경인가,베이징인가』외21종의저서가있으며60여편의논문과200여편의서예평론을세상에내놨다.제1회원곡서예학술상을수상하였다.

목차

증보판서문-이게증거다.지금도변조를계속하고있지않은가!
서문-열쇠는서예학이다

1장광개토태왕비세번죽다
상처투성이비문과의첫만남
광개토태왕비세번죽다
일본제일의국보
수난의자취
베일에싸인사코본

2장비문변조의증거
변조의조짐을느끼던날
고구려글씨의매력
필획에살아있는힘
비문변조의새로운증거
사코본의허점들

3장사라진비문을찾아서
비문복원의결정적단서
속민과신민
신묘년기사의본래글자와본래의미

4장1600년만의침묵을깨다
비문변조현장검증
또다른역사변조의현장
일본의통설‘래도해파’구의문법적오류
신묘년기사의문단과문장분석
왜는백제·신라에대한조공국
미심쩍은『회여록』
기존해석의문제점
댓글에대한반론

5장되돌아본100년전쟁
광개토태왕비100년전쟁
석회를뒤집어쓴광개토태왕비
비문변조설에대한억지반박
비문연구신(新)삼국지
사코본이전의탁본이발견되다니…

초판에필로그-광개토태왕비부활을위해
증보판에필로그-모든역사는현재의역사이다

광개토태왕비연구와논쟁에관한연표
참고문헌
부록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2019년말중국정부는‘지린성퉁화시고구려유물ㆍ유적관광지’를관광지최고등급으로지정했다.이곳에414년에세워진광개토태왕비와광개토태왕릉,장수왕릉등고구려유적5곳이포함되어있다.이보다앞선2017년에는광개토태왕비앞에‘중화민족의비석’이라는내용으로문화재안내판을설치했다.이처럼중국은광개토대왕비를비롯한고구려사전체를통째로중국사로편입시키려는이른바‘동북공정’을계속기도하고있다.
한편일본은탁본을제작한다는명목으로석회칠을하여비를손상시켰을뿐만아니라치밀하게변조한광개토태왕비문을식민지지배를정당화하는논리로삼았다.그뿐만아니라역사교과서왜곡사태에서볼수있듯이임나일본부를통한한반도지배를기정사실화해학생들에게가르치고있다.
광개토태왕비에대한최초의국내연구서인『사라진비문을찾아서』는2005년초판출간후국내언론으로부터크게주목을받았다.역사서이면서도역사적사료에매몰되지않고‘서예학’이라는새로운시각으로비문변조를증명하고비문을복원했고,당시로서는광개토태왕비의실상과논쟁사를다룬책이전무했기때문이다.그런데2018년1월3일JTBC의교양프로그램「차이나는클라스」에저자가출연하자마자네이버,다음에서실시간검색어1위에오르며광개토태왕비문의변조사실과원래비문의뜻을널리알릴수있었다.
이번증보판에서는금석학적으로글자한자한자를꼼꼼히살피고문법적으로비문문맥의전후연결관계를따져일제의변조증거를한층더보강하였다.또초판출간후제기된일부중국학자와한국학자의잘못된주장에대한반론도준비하였다.초판이나온지15년이지났는데도여전히“일본과중국학자90퍼센트가글자변조가없다고믿고있으며,국내학자중에서도40퍼센트정도는이견해에동의”(『한국일보』2005년5월25일자)하는것이현실이다.역사는과거에대한기록임과동시에현재를비추는거울로서현재에도생생하게살아있다.어떠한사회적분위기에서어떤시각으로역사를보느냐에따라역사적사실은다르게해석될수있다.그런의미에서모든역사는현재의역사이다.역사왜곡을멈추는데이책이크게기여하기를바란다.

광개토태왕비,고대사의비밀품은‘돌로만든역사책’
광개토태왕비.414년장수왕이2년전세상을떠난부왕의공적을기리기위해세운이우람한비석은고려와조선시대를거치며잊혔다가1880년경발견되었다.높이6.39미터에이르는거대한비석각면에는사잇줄이쳐져있고이사잇줄에맞춰1,775자가새겨져있으나141자는풍화되고훼손되어판독할수없다.
훈적비(勳籍碑)라는성격을넘어고대동아시아사의생생한현장을전해주는‘타임캡슐’로서그역사적의의가자못크다.또삼국시대정사인『삼국사기』보다700년이나앞서,그것도당대인의눈으로기록된‘돌로만든역사서’라는점에서도독보적인의의를지닌다.저자는“역사는아는자의것”이라말한다.광개토태왕비문의어디가어떻게조작되었으며,그증거는무엇인지,변조되기이전의글자는무엇인지,그렇다면원래비문은과연어떤의미였는지알아보자.

100년비문전쟁을촉발한최초의탁본
광개토태왕비에대한논란의중심에는『회여록』(1990년)에실린탁본이있다.지금까지제작연도가확인된것으로는최초의탁본(정확히말하면‘쌍구가묵본’)이다.어느일본군대위가1993년경일본으로처음들고간이탁본(‘사코본’)을가지고이후시게노야스쓰구(重野安繹)등일본의대표적인한학자와역사학자들이5년간비밀리에비문해독작업을했다.이과정에서서로다른15종의해독본이작성되었고최종적으로사코가게노부(酒?景信)라는일본군대위를불러확인하게했다.정체는물론이름조차없이그저‘아무개’란호칭으로문헌과학계를떠돌던사코가게노부가광개토대왕비의쌍구본을만드는데직접관여했음을의미한다.일제는어학생(語學生)이란명목으로10여명의참모본부군인을청나라에위장파견했고,조선에도군인을보내자료를수집하여『조선지지(朝鮮地誌)』를편찬하기도했다.어학생은한마디로스파이다.사코가게노부는청나라에파견된스파이였다.
‘사코본’은엄밀히말하면탁본이아니다.비면을직접탁본한‘원석정탁본’이아니라한쌍(雙)의갈고리같은선(鉤)을끌어베껴그린다음글자외의바탕면을먹으로칠한(加墨)쌍구가묵본이다.글자부분만그려뜨기때문에애당초잘못그릴수도있고,고의적으로어느글자를다르게그릴수도있고,빈칸으로두었다가나중에다른글자를그려넣을수도있다.실수든,고의든조작할수있다.이사코본은중국의동북공정이한창이던2004년‘중국의서(書)’라는표찰아래도쿄국립박물관에‘특별전시’되기도했다.

열쇠는서예학이다
오랫동안서예학을해온저자는광개토태왕비체의필획은별다른장식없이질박하다고표현한다.획은투박하게보이는직선과단조로운점으로이뤄져있다.가로획이두획이상중첩될경우는나란히수평을이루고,길이도가지런한편이다.체형(글자의윤곽)은기본적으로사각형이다.자형(글자의구조)은예서이지만전서로쓴글자도섞여있으며,간단히생략한초서형태의간체(簡體)문자도썼다.
저자는35년전유학시절광개토대왕비탁본을우연히접하고비문글씨의매력에빠져베껴쓰기(臨書)를하다가문제의신묘년기사부분에서“붓이멈칫하더니콱막히는”(88쪽)경험을한다.그리고얼마후,놀랍게도붓길이막혔던글자가바로재일사학자이진희가변조된글자로주장한글자와같다는사실을알게된다.이를계기로장장20년에걸쳐비문변조추적작업을한다.(참고로초판출간당시까지만해도한국학자들은비문의내용이역사적사실과다르므로당연히일제가비문을변조했다는‘짐작’에서더이상나아가지못하고,구체적인증거를탐구하는데는별성과를보여주지못했다.탁본만으로비교해서는새로운증거를찾기란불가능하기때문이다.)
저자는여러금석문과광개토대왕비탁본을서예학적눈으로분석하고,한ㆍ중ㆍ일3국학자들의주장을비교검토하며변조의증거를찾는다.이렇게신묘년기사에섞여있는‘판이한글씨체’를발견했다.

신묘년기사의‘도해파(渡海破)’는변조된글자다
일본은역사서라할수없는『일본서기』를바탕으로신묘년기사에구두점을찍고이렇게해석한다.

백제와신라는예부터(고구려의)속민(屬民)이었다.그래서줄곧조공을해왔다.그런데일본이신묘년에바다를건너와백제와□□와신라를깨부수어(일본의)신민(臣民)으로삼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본문63쪽

‘도해파(渡海破)’는변조된글자다.광개토태왕비의모든필획이거의직선형태인데반해‘渡’의마지막두획,즉‘?(별획)’과‘?(날획)’은굽은형태이다.1880년무렵일본에근대식인쇄활자가도입되면서만들어진‘명조체’의형태이다.
‘海’자의母(어미모)부분은탁본다른곳의海자와달리정방형이아니라기울어져있다.또가운데의세로획또한두개의점이아닌세로획으로처리되어있다.
‘破’자의‘石’두번째획은다른곳의破자처럼직선이아니라활처럼굽어있다.또‘石’과‘皮’의상단의가로획이다른곳에서는전부나란한데신묘년기사에서만‘皮’가‘石’보다아래에있다.이는오늘날의명조체와비슷한형태로,매우중요한변조의흔적이다.

‘도해파(渡海破)’가아니라‘입공우(入貢于)’였다!
비문변조를서예학적으로확인한저자의관심은당연히변조되기이전의글자는무엇인가로향한다.저자는논리적인추론을통해이를하나하나파헤쳐들어간다.단서는‘신민(臣民)’과‘속민(屬民)’에있었다.
우연히‘속민(屬民)’과‘신민(臣民)’을서로다르게사용하고있다는점을깨달았다.그차이를가정하고『설문해자(說文解字)』를비롯한옛문헌을조사한결과,신민과속민은분전혀다른뜻을지닌다른용어임을발견해냈다.즉‘신민’이왕에대한복종의의사를표하거나예를갖춘사람이라면누구에게나사용할수있는일반적인뜻의단어라면,‘속민’은비록현재는다른나라로분리되어있지만근본적으로같은뿌리의민족관계에있는나라를지칭하는말이다.이렇게저자가찾아낸원래비문은다음과같다.

백제와신라는예부터(고구려의)속민이었다.그래서줄곧조공을해왔다.그런데왜(일본)가신묘년이래로백제와□□와신라에대해조공을들이기시작하였으므로,고구려는왜도고구려의신민으로삼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新羅以爲臣民
-본문162~163쪽

모든역사는현재의역사이다
지나간역사를다시쓸수는없지만,바로잡을수는있다.이제라도우리의역사를우리의눈으로바로보고제대로찾을수있도록해야한다.이미역사전쟁이시작된이시점에서정작실증이지도못한실증만을고집할일이아니다.크로체가“모든역사는현재의역사이다”라고했듯이이제는우리의역사를우리의입장과관점으로이해하고해석할필요가있다.일본이나중국이역사를왜곡하니까우리도왜곡하자는이야기가아니다.다만,일제가남긴식민사학적관점이나오랫동안중화주의의물들어있던사대주의적관점으로우리의역사를보지말고우리자신의역사관으로우리의역사를바라보자는뜻이다.이제는더이상우리의역사를외세에빌붙은역사로오도해서도안되고,앞으로도우리의역사를정략적빌붙음을통하여안정을유지하려는비굴한역사로이어갈생각도말아야한다.그리하여우리는역사앞에언제라도당당한민족으로서자랑스럽게살아가야한다(본문3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