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희
저자:이춘희 부산에서출생하여 포항여고, 이화여대문리대독어독문학과졸업하고 최근에한국방송통신대학교문화교양학과졸업했다. <에세이문학>(1996년,수필공원)으로등단하였다. 산영수필문학회,에세이문학작가회 수필문우회회원으로활동중이다. 작품집으로《구름은좋겠다》(2015), 《우연,삶의여백》이있다
책을내며41부쉬엄쉬엄(8편)쉬엄쉬엄12꿈,나의해석17우울한장마22미안,지워지지않는부끄러움27삶,하루를담는그릇32마음이머무는자리37Areyouallright?43지구의기침소리48사유의능력(12편)허영심의다른얼굴56기억에대한예우61우연,삶의여백66시각적산문72사랑이비껴가는길에서77사유의능력82꿈속의사랑87잉카의눈물92회상에대한소고(小考)97장쾌한유린,소나기102저녁노을108나를사로잡는사람들1133부희망이라는이정표(10편)희망이라는이정표120보고싶은내강아지들125지워진1순위130그들의모정136웅진가는길141태몽,그긍정의씨앗146빗나간계획151아버지와사각모156어머니의겨울161오지않는내일1654부짓다만집(12편)짓다만집172시간의힘과사용논리177하얀가면182지구야미안해!187솔방울192라면냄비받침197자아의감옥202멍에,사랑의다른이름207후줄근한장갑212어깨동무216인생뭐있나요?221미소,그경이로운언어226
책속에서<우연,삶의여백>-파스칼메르시어『리스본행야간열차』영상이어릿해도흑백텔레비전을컬러텔레비전보다더좋아하는사람이있다.튼튼한횡목같은무거운안경을쓴,육십을눈앞에둔남자.무릎이나온바지에성글게짠스웨터와낡은재킷을입고도그것이텅빈우아함과맞선다고믿는느슨한사람이다.우연히만난그와함께나는리스본의골목을오르내리고폐허가되어이따금박쥐와들쥐가돌아다니는중등학교의적막속에서얼어붙은밤을지새웠고병원으로들어가는그를배웅했다.그와나사이에는파스칼메르시어의책『리스본행야간열차』가있다.비와함께세차게돌풍이불어온날,고전문헌학교사그레고리우스가다리난간에위태롭게선한여인이강에몸을던지려한다고생각해가방과우산을던지고급하게다가가는것으로시작하는책이다.‘절망에빠져분노와사랑사이’에있는듯보인여자가허공으로날려버린종이에있던전화번호를얼떨결에그의이마에적는어처구니없는상황이벌어지고,불현듯스며든낯선예감이그것을지우려던그의손을막는다.학문의세계속에서건조한삶을살아‘문두스’로,더러는‘파피루스’로불려온그레고리우스.동화속에서처럼속삭이는듯하던그녀의‘포르투게스’에끌려그의인생이고스란히담긴학교를뒤로한다.그녀를다시만날수는없었지만,우연히헌책방에서포르투갈어로된아마데우프라두의『언어의연금술사』를얻는다.사전을뒤적이고어학CD에귀기울이며몇페이지를읽고작가를찾아무작정리스본행야간열차에오르는그.책에실린‘우리가우리안에있는것들가운데아주작은부분만을경험할수있다면,나머지는어떻게되는것일까’라는생에대한깊은사유가그를사로잡았던것이다.이런문장을만난다면누군들무심히지나칠수있겠는가.나역시그를따라나서며운동화끈을조여매듯마음을다잡았다.책을들고작가의일생을쫓는그레고리우스는『언어의연금술사』를출간한프라두의동생을찾아간다.그녀는우상이었던오빠가숨진시각을그대로고정시킨채삼십여년을과거의수렁속에서붉은신호등이켜진것처럼머물러있다.박제된듯멈추어있는시간을현재의시각으로맞추는일은그에게도어지럼증을일으킬만큼상당한용기가필요했지만마침내돌처럼굳어있던그녀의마음이흔들리는‘조용한지진’이일어난다.다른하나.그는아마데우와함께독재저항운동을하다가체포되었던동지를찾아간다.석방후자신을요양원에유폐시킨팔순노인이다.피아노를치던그의손은고문으로손톱두개는아예없고,온통담뱃불로지져져파킨슨병에걸린것처럼떨며살아왔다.노인에게다가가기위해처음으로담배를피우고목구멍이델것같은뜨거운차를주저없이마시는,학대받은노인에대한예우.노인은‘기억에깊숙이파고드는눈빛’으로오랫동안그를바라본다.그레고리우스의깊은시선과따뜻한심성이드러나는장면이다.인품의향기랄까.감동외에는달리표현할말을찾을수가없다.“뚜렷하지않은심연,인간행위의표면아래에우리가알지못하는어떤비밀이있을까?”라묻던프라두의끝없는사색과치열했던일생,그의삶을관통한철학서적을방불케한생각의더미들은나같이단순한사람까지끌어당기는힘이있다.그러나풍성한사유의세계는때로칼끝같이예리해그를위태롭고힘든생의여정으로이끌지않던가.나이탓일까.나는명철한지성보다마음을감싸는따뜻함에더뭉클해진다.놓쳐버린꿈을찾는그의독특한행적에서는그레고리우스에설레는것이오히려자연스럽게느껴질정도다.어린시절페르시아를그리며동양학자가되려했으나뜨거운사막의모래가안경에부딪히는꿈이반복되어희망을접어야했던그레고리우스다.프라두가고뇌와혼란에빠질때면찾곤했던허물어져가는중등학교의교장실벽에이스파한의사진을붙여놓고프라두의글을읽으며캠핑을하는것으로비켜가야했던날들을만회한다.‘상상력은우리의마지막성소다’라한프라두를쫓아,폐허가된학교를사막으로만드는상상력은그의안에있던또하나의삶을살아볼수있게하지않았겠는가.따뜻하고사려깊은그라면내면의벽에갇힌프라두의영혼이라도그곳으로초대하지않았을까싶다.맑고깊은우물같았던그레고리우스.파피루스로불리던그에게우연은두레박으로왔을까.타성적일상에서빠져나와타인의삶에봄날이슬비처럼스며들어,돌처럼굳어있던마음을풀어놓으며자신도변해가지않던가.리스본으로향하며그레고리우스가떠올린‘자기영혼의떨림에따르지않는사람은불행할수밖에없다.’는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말.나는떨림을낯선예감과설렘으로읽는다.우리는종종아무런징후없이삶에불쑥끼어들곤하는우연과마주한다.그파장은예사롭지않아오랜여운을남기기도하고때론예상치않던길로들어서게도만든다.그우연이언제나영혼의떨림을동반했던가.그레고리우스에게다가온우연이웅숭깊은그의내면이만들었을공간,그여백에담기는순간낯선예감이일지않았던가.그것을감지하는것역시예비된사람만의몫일터.낯선예감으로제안에있는다른삶을경험하면서자신에게한걸음더다가설수있었으리라.책을읽으며내삶에다가오고떠난사람들을,성급하게내디딘걸음들을돌아보곤했다.어느날우연히눈에띈수필강좌안내.시를향하던어린날의꿈이문득떠올랐던일.나에게도우연이두레박으로왔을까,글은내속에든나를들여다보게하지않던가.삼십년도더지난이야기를다시꺼내보았다.내삶에도영혼에떨림을줄여백이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