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잎으로 피어나다

시간의 잎으로 피어나다

$13.00
저자

정훈모

저자:정훈모

경남울산출생

이화여중.고,이화여자대학교국문과졸업

<자유문학>(2001)신인상으로등단

수필문우회사무국장,한국문인협회회원

국제pen한국본부회원,이대동창문인회이사

남태령문인회회원,수수회회원

작품집《시장에서영희를만나다》(2014)

《푸른빛깔은늘》(2022)

《시간의잎으로피어나다》(2024)

목차

책머리에

1부곱다랗게기다리다
4월의바람10
우리를견디게하는것들13
시간의잎으로피어나다17
고추장단지를보내니22
곱다랗게기다리다27
거울에게묻다30
크레이지하우스34
습지와늪지사이에서37
연꽃터지는소리40
인어공주45
기억의바다에서건져올린48

2부손끝에서가장먼곳까지
바람소리가들려주는이야기52
골목을걷는시간56
펴져라주름살60
날아라실버보드63
나는가끔도망치고싶다67
손끝에서가장먼곳까지70
누우떼가강을건널때73
마지막농담76
포옹82
슬쩍슬쩍가슴을때리다85
그러지뭐89

3부畵,푸른달을그리다
점이나를만나다95
오드리처럼99
나비의깊은잠103
도라지꽃이피었다109
적당한죄115
푸른달에닿다121
선(線)이달린다125
오타인생129
인체의신비131
수필을스케치하다135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시간의잎으로피어나다>

이미경작가는구멍가게를그리는작가다.작고소소한그곳에애정을담고소중한가치를불어넣는다.그림을보고있으면지나간시간의기억이스쳐지나간다.동전하나로행복을살수있었던어린날이생각나고,요즈음편의점과는다른이야기와사연들이신작로가게마다있을것같다.나는그녀의그림중에서‘신의상회’가좋아모사(模寫)를시작했다.그림을그리다가문득영희가떠올랐다.
늘아기를업고있던11살의영희,중학교입학시험에시달리던나.늘살림하느라바빠친구가없던영희에게나는왠지말을걸었고,친구가되었다.우리반아이들은학교가는길에있는영희네구멍가게를기웃거리곤했다.무슨맛있는과자나신기한상품이새로들어온것이있나궁금해서였다.초록색기와에양철차양이달린그곳에는마법상자처럼진기한물건들이많았다.동네에서유일하게빨간공중전화가있었고,가게앞에는평상이놓여있어아저씨들은막걸리를마셨다.우리는학교수업이끝나자마자가방을풀어놓고술래잡기와공기놀이,고무줄놀이를했다.
가게옆에는살림집이붙어있었다.거기에서영희가살았다.어머니가장사를하고,아버지는늘술에절어있었다.형제가5남매였는데자고나면동생이한명씩느는것같았다.그래서그집앞에는항상기저귀가펄럭거렸다.영희는언제나동생을돌봐줘야해서등에업고학교에오는날도잦았다.맏딸이라당연히어머니를도와야했고,동생들은고스란히영희차지였다.파란대문이달린그집은언제나문이열려있었다.아이들은쉴새없이들락거렸다.
영희어머니합천댁은고주망태인남편을온종일욕했다.나는그욕을들을때마다아줌마는어디서그런말을생각해내는지궁금했다.친구들과놀고있으면우리를향해욕을하기도했다.“어서집에싸게싸게돌아가라고××”
11살답지않게손끝이야무졌던영희는그조그만손으로밥을해서동생들을먹였고빨래를했다.그래도우리가놀고있으면틈틈이공기놀이를같이하고,술래잡기도하며놀았다.가게평상앞은우리들의놀이터였고동네사랑방이었다.
집뒤에는커다란은행나무가있어초가을이면집뒤에환한불이켜진듯눈부셨다.노란잎마다전등불이달린듯우리들의마음까지밝아졌다.고약한냄새가났지만우리는은행을매년주웠고,물에담가씻어서구워먹으면맛이있었다.
평상옆에는아저씨자전거가놓여있었는데배달용인그것은늘휴점상태였다.나는영희를보면속상했다.공부도못하고늘동생을봐야하는모습이딱해서과자를사서먹을때마다나눠주곤했다.
요즘편의점에는맥주와담배를사러오는젊은이들,음료수와커피를사는사람들로붐빈다.한집건너편의점이즐비한동네에는특히경쟁이심하다.택배는물론은행업무까지할수있고,도시락과라면등으로요기를할수있어젊은이들은자주이용한다.그들은아지트처럼모여서담배를피우기도하고,맥주를한캔씩마시며그들만의문화를만들어간다.몇십년이흐른후편의점도구멍가게처럼추억이있는장소가될수있을까.편의점에는무표정한알바생과바쁜사람들만이왔다갔다하는데….
이미경작가의그림을모사(模寫)하다가11살의나를만났다.중학교입시를위해과외공부를하고돌아오는길,친구들은다집에가고합천댁아줌마만남아가게를지키고있다.나는그곳을지나며영희를잠시생각한다.만일내가영희같이동생을봐야하고,집안일을해야했다면잘해낼수있을까.못할것같다.자식공부에열심이신내어머니는시험지하나만틀려도야단을치고나무라셨고,나는그런어머니가싫어서원망하곤했다.지나고보니그시대의어머니들은각자의생활형편대로치열하게삶을살아내신것같다.
나는‘신의상회’기와하나하나의선을그리고,나뭇잎하나를노란색과연둣빛으로색칠했다.시간이기억속에서잎으로피어난다.내안에서과거의일들이고개를들고나의손길로피워내주기를기다리는게느껴진다.
미술수업은정물을보고그대로그리거나,기존작가의작품을모방하며연습을한다.자꾸따라그리다보면각자그만의창작품이실현된다고한다.지금은보고따라그리고있는수준이지만,나중에는나만의구멍가게이야기를글과그림으로피워내고싶다.

<고추장단지를보내니>

밥먹을때마다먹으면좋을게다
1776년정월에시작되어이듬해8월에끝난편지글로지금으로부터2백년전글이다.주로개인적인일상을담고있어가식과꾸밈이없고그의인간적체취를접할수있다.이책은『연암선생서간첩』을번역한것이다.
연암은호방하고활달한사람으로알려져있는데정사년(1797년4월18일)에쓴편지를보면대단히사려가깊고꼭닥스러운면이있음을알수있다.‘자물쇠잘잠그고문단속도잘하는게어떻겠니?’라는말에서자상한성품을엿볼수있다.
자식공부에대한걱정이글가득담겨있는<아이들에게>의편지는읽으면서현세의어머니들이자식들에게잔소리하는것같아슬며시웃음이났다.마지막에손수담근고추장단지를보내며‘밥먹을때마다먹으면좋을게다’라고쓰인문구는가슴을뭉클하게한다.연암은51세때부인을저세상으로보내고죽을때까지혼자살았다.이때문에자식들을더욱각별히챙기게된건지도모르겠다.
공무틈틈이글을짓기도하고혹법첩을갖다놓고글씨연습을하기도한다고적으면서“너희들은해가다가도록무슨일을하느냐”고나무란다.연로하여책을덮으면잊어버리는지라부득불작은초록(필요한부분만을가려뽑아적은것)을만들었다는이야기도한다.현대에서도문장연습할때쓰는방법이라흥미로웠다.

친정아버지는군인이었지만잔정이많으신분이다.자식을사랑하면서도표현하는법을배우지못해엄하게우리를다스렸지만,그당시의다른아버지와다르셨다.
학년이올라가면형제들을앞세워백화점에가서새옷을사입히곤자랑스러워했다.그리고맛있는음식을대접받고오시면다음에온식구들을데리고가서먹였다.
봄이되면꽃모종을사다마당에심었고,여름이면형제들을데리고해수욕장으로휴가를떠났다.그때는엄한아버지가싫어서결혼을빨리해떠나고싶었지만,지금은돌아가신아버지를생각하면가슴이먹먹해지고아련해진다.

뭇산이멀리아스라하여

“밤비가마치부견(符堅)이강물을채찍으로내리치는것처럼후드득후드득집을흔들어대는바람에밤새잠을이루지못했사외다.”“사방의들판이아득하고뭇산이멀리아스라하여비록서령(瑞寧)이어느쪽인지모르겠지만아무튼반백리안에있을테니저기구름이더있는바닷가물억새근처에서만나게되겠지.”

윗글은현대의문장처럼아름답고처연하다.면면히심정을토로하는문장들이아름답고섬세하다.이서간첩을읽다보면처음들어보는단어들도많다.“무람없다,찐덥잖다”등이다.‘연암체’라는문체가느껴진다.
그리고수필(手筆)을구한다는말이나오는데수필이란편지든서예작품이든원고든간에자필로된것을이르는말이다.연암은특히산문을잘썼는데그의산문은마치잘빚은항아리처럼완정미(完整美)를보여준다고한다.그의글은세상을바라보는놀라운반성력과자기응시가자리하고있다.책을읽으면서해박한그의지식과창조적인형식과자기성찰그리고만민에대한선비로서의경세적책임감을느낄수있었다.
이책은그의일상과살림살이가족애등을볼수있다.200여년전의조선사대부의사상과학식과그의문장등을보면서새삼나의공부의부족함에머리가숙연해졌다.
무더위속에서책을보고있자니잠시대나무숲에서산림욕을하는것처럼상쾌하고,‘쏴쏴’하는파도소리가들리는듯하다.
우리가알고있는연암의『열하일기』는중국을여행한기행문이자사회적보고서다.25권의글중에서제3책권3의,<일신수필(馹?隋筆)>에주목하여그글이시작된7월15일을‘수필의날’로정했다는말을들었다.기록을읽어보면중국의무엇을볼것인가?라는명제를던지고청나라의발전된문명의좋은점을보아그것을배워야하고힘을길러야한다는의지가담겨있다.교과서에서배운연암과는다른그의인간적인면모를볼수있어편지글이더좋았다.

<곱다랗게기다리다>
요즘은시집을많이읽는다.부족한어휘공부를위하여,사람들은각자언어보따리가있어그곳에서단어들을주워글을쓴다고한다.나이가드니자꾸알고있었던단어들도생각이나지않는다.책을읽거나시를읽어야감성이죽지않는다고한다.
라이너쿤체의『나와마주하는시간』을보며<은엉겅퀴>같은시를쓰는시인이라는말에귀를쫑긋한다.은엉겅퀴는키가작고메마른땅에자라며,딱한송이은색꽃을피우는귀한보호종식물이다.쿤체는세상의모든생명에게귀기울이고인간의불의와폭력에저항하는올곧은시인이다.짧은그의시에서나는생명의소중함과자아성찰을한다.
오은의『없음의대명사』라는시집은무수한그곳,그것들,그것,그들,그,우리,너,나로시들이쓰여있다.시인은‘그것’이라는텅빈대명사하나를던져놓고많은의미를찾게한다.누구보다도언어의물성및자기지시성에관심을가지고자신만의고유한시작법을만들고있다.그에게서많은어휘를줍는다.‘모닥모닥,올레줄레,이냥저냥’등등.
황인숙의『슬픔이나를깨운다』.그녀는80년대의대표적인시인중의하나다.
황막하고메마른세계를윤택하고탄력있는세계로전도시키는일종의긍정적방법에따라그녀의시적독자성을확보하고있다.그녀의자유분방한상상력을배우고싶다.언덕을오르내리며삶에대해생각했다는시인은해방촌출신이다,슬픔이나를깨우고소리없이지켜주고흔들고있지만,방안가득히웅크리고곱다랗게기다리고있음을아는시인이다.
복효근의『허수아비는허수아비다』.사소한일상에서시를발견하고사진에담아디카시집을만들었다.발견과깨달음의작은기쁨이함께있다는시집곳곳에는서정시인답게짧은시속에깊은의미를담고있다
<꽃아닌것없다>에서는가만히들여다보면슬픔아닌꽃이없다고하면서눈을닦고보라고한다.
김사인시인은시를제대로보려면겸허하고공경스럽게보라고말하지만,매직아이를볼때처럼언어를2차원의평면에서일으켜세워볼때시의아름다운세계를발견할수있다고한다.시를일으켜세운다는말을한참생각했다.
여름,숲으로가면나무들의아우성을들을수있고바다로가면파도들의함성을들을수있다.시집들속에서어휘들을낚고있는나는이무더위가덥지않다.가끔눈물도찔끔거리고슬며시웃기도하면서행복하다.오늘도책상위의곱다랗게기다리는책들속에서어휘를주워보따리에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