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인의 수필 세계는 참 아름답다. 수필은 예술이며 예술의 본질은 아름다움이고 그것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 언어예술로서의 미학적 성과와 의미론적 성과다. 문학은 어느 장르나 모두 언어예술이지만 수필은 수사법의 특성을 의도적으로 개발해 나간 장르가 아니다.
수필은 붓 나가는 대로 써지는 글이다? 흔히 말하는 이런 명제는 수필이 언어의 기교적 발달을 운명적으로 거부해 왔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학의 국문과 교과과정 속에서는 70년대 전까지도 수필이 거의 독립적인 문학 장르로 대접받지 못했다. 기교적 연구로 자기만의 특성을 갖추지 못한 탓이다. 그것은 분도 바르지 않고 천연의 얼굴만으로 예뻐야 함을 숙제로 지녀왔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겸허한 몸짓으로 더 아름다워야 하므로 수필은 창작 기법상 어려운 장르이고 그 겸허한 몸짓만으로도 매력적인 것이 김자인 수필의 아름다움 하나다. 이런 특성은 연지 찍고 곤지 찍고 성형외과에 다녀온 미모와 달리 원래 주어진 아름다움을 과욕 없이 순수하게 가꾼 미모로서 차별화된다. 아름다움을 위한 세련된 언어 구사의 매력도 좋지만, 지나친 분장을 노출하지 않는 겸허한 품위도 매력이다. 또 하나의 미적 성과는 주제의 아름다움이다. 윤동주가 언덕에 올라 밤하늘의 별을 향해서 사랑하는 생명들의 이름을 부르는 별 보기(〈별 헤는 밤〉에서)와 그 많은 별이 금은방의 보석이 되어 명품백 속에 꽉 채워지기를 바라는 탐욕의 별 보기는 감동적인 미적 성과와 다르다. 윤동주의 그것은 문학이 되지만 후자는 잡문이 된다. 김자인은 지구 저편까지 많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수필을 썼다. 그런데 그 기행 수필에 탐욕은 없다. 오직 사랑의 눈으로 보고 돌아온 것이 이 수필집이다. 이것은 그 사물들을 사랑스러운 보석으로 만들고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작자가 그곳에 다녀옴으로써 그곳은 아름다움이 되고 있다. 〈초원을 가르며〉와 〈별은 그 자리에 있다〉는 몽골 기행 수필이다. 작자는 몽골 초원에서 별을 보고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 별을 보며 감탄한다. 수많은 별을 보며 감탄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몽골 기행 중에 작자가 보고 이를 그의 작품 속에 담을 때 이것은 새로운 별이 된다. 문학적 표현 효과로써 작자의 가슴속에 담긴 김자인이 사랑하는 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시인이 꽃을 보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말한 〈꽃〉처럼 김자인의 수필 속에 담기고, 이 작가의 가슴속에서 사랑받는 별이 됨으로써 새로운 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작품 속에서만 일어나는 별의 탄생이 아니고, 또 별들만의 탄생이 아니다. 작자는 이 세상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이들을 사랑하며 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써 새로 태어나며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김자인의 기행 수필은 이처럼 사랑하기 위해 찾아가서 만나주는 기행 수필이기 때문에 새 세계의 탄생을 의미한다. 세상을 사랑의 언어 속에 담아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 곧 이 작가의 기행 수필이며 작자는 여기에 더 많은 소중한 의미를 담는다. 〈별은 그 자리에 있다〉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런 별을 몽골 초원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작자의 고향에도 있으며 우리는 어떤 것이든 사랑함으로써 어디서나 나의 별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철학적 의미의 은유다. 그러니까 북극성도 은하수도 별은 항상 그 자리에 있듯이 사랑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 모든 사물은 우리 사랑의 동반자로 곁에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런 기행은 새로운 세상의 발견이다. 온 세상을 답사하며 보는 대상은 길을 떠난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 새로운 세상의 발견이고 또 그것이 언어의 옷을 입을 때 저마다 다른 언어미학을 연출한다. 언어에 의해서 대상이 더욱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날 수 있다는 것은 구리나 쇳덩이를 금으로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말하게 된다. 2. 사랑의 시선과 순수성
김자인의 〈알프스의 하루〉는 스위스 기행이다. 스위스는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관광지라고도 알려져 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도 세계적으로 뽑히는 아름다운 야경이고 〈센 강에 별빛은 흐르고〉의 파리 에펠탑 야경도 그렇다. 이들은 그것 자체가 아름답기에 언어 표현으로 더 아름답게 만들기는 어렵다. 또 베네치아에서 반달 모양의 흔들리는 곤돌라를 타고 수상택시를 타고 운하로 된 골목 수로를 돌면서 다 함께 〈오 솔레미오〉를 합창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흥미 백배가 되는 소재이기에 수필가가 상상력으로 더 이야기를 전개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바라보는 대상이 이렇게 되면 수필가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예술은 아름다움의 창조인데 이미 그것이 완성품이면 수필가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카메라처럼 복사만 해도 감동적인 영상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창의성이 개입할 여지를 잃게 되고 그만큼 문학성이 보태지기 어렵고 그 기행 수필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소재의 작품화가 힘든 숙제를 지닌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강도 높은 문학성을 지니려면 작자의 창의성과 함께 언어의 레토릭이 연금술사처럼 구사되어야 하고 사물을 보는 마음의 눈이 순수해야 한다. 김자인의 수필은 기법도 우수하지만, 사물을 보는 시선의 순수성이 매력이 된다. 모든 대상을 놀라운 눈으로 보고 반기며 기뻐하는 것이 시선의 순수성이다. 이는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의 시선이라 해도 되고 그 문학을 탈속의 미라 해도 되겠다.
3. 순수의 서정
넓은 초원을 보는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광활한 초원에 압도당하는 느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자연에 흠뻑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걷고 또 걷는다. 인디언들이 나무와 바람, 햇살을 신성시하듯, 그곳의 모든 자연은 신이 내린 선물 같았다. -〈초원을 가르며〉 중에서
작자는 몽골 초원을 바라보며 ‘신이 내린 선물 같다’라고 말한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 ‘압도당하는 느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상에 몰입하는 모습은 어린 소녀의 순수성이다. 워즈워스가 〈내 마음 뛰노라〉에서 자연을 보며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 것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며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슴이 뛰는 어린이의 감각을 말한다. 때묻지 않은 어린이가 아니면 그런 반응이 가능하지 않다는 찬미론이다. 작자가 몽골 초원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어린 소녀처럼 아름다움에 감동하며 ‘신의 선물’이라고 한다. 선물이라 함은 감사의 표현이며 이런 감사의 정은 작자의 마음이 어린이처럼 맑고 깨끗하기에 가능하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말하는 순수 의식도 이것이다. 어른들은 온갖 편견에 사로잡히고 때가 묻어서 사물을 제대로 못 본다는 것. 생텍쥐페리가 야간 비행을 하다가 사라져 버릴 것을 예언이나 하듯이 그런 조종사를 만난 어린 왕자에게 그가 그려준 그림은 네모 상자였다. 양을 그려 달라는데 그렇게 그렸다. 그리고 상자 속에 양이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른들의 시선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처럼 순수해야만 상자 속에 있는 양 그림을 볼 수 있듯이 김자인은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초원을 가르며〉에서 작자가 보는 아름다움이 그런 순수 의식을 나타낸다. 어린이처럼 맑고 순수한 눈으로 보니까 몽골의 푸른 초원이 신의 선물이 되고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 묻지 않은 맑은 시선으로 봄으로써 더욱 아름다워지는 풍경은 작자가 상원사 월정사 같은 곳을 찾아간 〈오월 숲〉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산사의 고요함을 느끼며 일주문을 나오니 길게 뻗은 전나무 풍광이 시원하다. 텅텅 빈 아침 숲길을 호젓하게 걷는 두 사람은 부부인 듯 사색에 잠긴 듯하다. 쭉쭉 뻗은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길의 한적함이 평화롭다. 멀리서 보니 한 장의 그림으로 머무는 듯 스쳐 지나가는 오월 속 풍경화다. 푸른 윤기로 계절의 생기를 만끽한 조화로움에 저절로 동화된다. 차분해지는 시간, 자연 앞에 여유를 배운다. 일상에 지친 마음을 살포시 내려놓고, 늘 종종거리며 사는 내 모습을 돌아보니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랄까, 힐링이 된다. -〈오월 숲〉 중에서
이 글은 오랜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사찰 경내에 들어가서 숲길을 걷는 장면이다. 에밀레종보다 먼저 725년에 만들어졌다는 한국 최고(最古)의 종소리가 상원사에서 들려오고,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에서 맑은 향기가 코로 스며드는 듯한 환각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이런 현상은 수필 문장이 거의 서정적 감각만으로 숲과 고찰을 그리면서 특수한 아우라를 형성하며 독자를 그 속에 귀신처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텅 비어있는 공간 개념, 호젓함, 한적함, 평화로움, 조화로움, 차분함, 터널 속을 빠져나온 느낌, 힐링, 감각 등이 모두 서정적 감각의 표현이다. 지적 논리적 사고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는 정서를 읊는 특성이 짙다. 섬세한 서정적 감각은 타고나야 하고 길러져야 하고 정갈한 보자기에 싸서 보존해야 유지된다. 즉 세속에 때 묻지 말아야 살아나는 감각기능이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물론 눈으로 들어오는 대상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런 외형적 사물보다 그것이 전하는 분위기가 핵심이기에 읽기보다는 눈 감고 느끼는 수필이라 해야 옳다. 이것은 소설의 맛과 차이점을 비교해도 좋다. 소설은 사람이 등장해서 사건이 전개되니까 표현이 미숙해도 이야기는 성립되지만 곰과 늑대와 호랑이가 나오지 않는 숲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어렵기에 이런 소재에서는 수필가가 자칫 소설작법을 탐내며 탈선하기 쉽다. 미안하지만 피천득의 수필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피천득의 수필은 대체로 우수하지만, 작자와 연애한 사실이 없는 아사코를 주인공으로 해서 연애소설로 만들고 이를 수필이라 해놓은 수필 아닌 수필이 〈인연〉이다. 그와 가장 가깝던 수필가 윤오영이 그의 수필은 너무 작위적이라 말한 것도 그것이다. 피천득이 가장 아낀 제자 석경징 교수가 몇 차례 수정
짧은 여행, 긴 여운 (사랑의 눈으로 엮어낸 보석같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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