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끝의 살갗이 따끔거린다. 그러다가 괜찮아지려니 했건만 며칠 내내 신경이 쓰이는 거였다. 병원에 가볼까 망설이다가 돋보기를 쓰고 들여다보아도 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물건을 만질 때면 여전히 따갑기에 조심하는 날이 지속되던 참이었다. 차츰 통증이 무뎌질 무렵 조금 이상했다. 그 부분이 단단하고 볼록해지고 있었다. 이왕 병원에 갈 기회를 놓쳤으니 한번 해보자는 심정이 든다. 아주 작은 바늘을 소독하고는 굳은살 부분에 조심스레 들이대었다. 아프지도 않다. 드디어 미세한 점 하나가 드러났다. 가시 조각이었다. 살갗 속에서 단단한 집을 짓고는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야 그 원인을 발견해 제거하니 속이 후련했을뿐더러 손끝이 어디에 닿든 두렵지가 않다. 신기하게도 가시는 그렇게 사라졌다. 티끌처럼 작은 가시가 제 몸을 숨기느라 보호막을 키웠나 보다. 묘한 생각이 든다. 사람이건 동식물이건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에 대해서다. 가시도 마찬가지였다. 살 속을 파고들어 굳은살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내 마음속에도 그런 일들이 없는지 돌아본다. 좋은 기억에는 여유로움이 있지만 아프고 불편했던 기억은 상처로 남아 두터운 살처럼 된다는 사실이다. 가시도 나름 합당한 방어 태세였을까. 그것을 보며 그동안 여러 가지로 겪어왔던 감정의 골들이 떠오른다. 지나온 날들 속에서 내 생각만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고집했던 갈등들이 피곤한 앙금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살갗을 키우며 가시를 감추고는 헤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웅크린 모습이 자꾸만 보인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기에 느끼는 고통도 차이가 있으리라. 훌훌 털어버리는 이도 있고 오랫동안 끌어안은 채 무거워하는 사람도 있다. 들여다보니 나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지만 작은 일에도 상처받는 마음이 항상 문제다. 겹겹의 세월을 살다 보니 이제는 유연해지고 있다. 아니, 마모된 몸과 마음을 둥글게 다듬으며 상처받지 않으려 조심스레 살아간다. 몇 해 전, 친구 사이에 어떤 오해로 인해 얼굴을 보기가 불편했다. 그 문제를 들추어서 옳고 그름을 따져볼 기회도 없이 지나버린 그 일은, 가시가 되어 내 안에서 굳은살을 키워갔다. 성격 탓인지 가끔 만나게 되어도 무심한 채 통증에서 멀어지려 애를 썼다. 그렇지만 잠재의식 속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닿았다. 수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노라며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웬걸, 친구는 전혀 다른 기억으로 지니고 있었다. 오해를 푸는 과정을 거치고 나니 정말 손톱 끝의 가시가 빠져나간 기분을 맛보았다. 그동안 나 혼자 감정의 골에 잡혀 있었던 점이 부끄러웠다. 친구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저마다의 주장이 있겠지만 그로 인해 가시처럼 불편한 사이가 된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손톱 끝의 가시처럼 불편함과 굳은 마음을 지니며 살 것이 뻔하다. 거기에다가 나름 자기만의 방어기제로 합당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이런들 저런들 이제는 그러지 않고 싶다. 나이가 많건 적건 기본적으로 자기 삶의 반경이 평화롭기를 원한다면 낮은 곳에 자리 잡은들 어떠하랴. 하늘 아래에 피는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크고 아름다운 꽃에서부터 땅에 밀착되어 피는 잡초까지 제 생명의 환희를 맘껏 표현하는 모습들이다. 한 생을 살아가는 거룩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시간이 길든 짧든 최선을 다하고들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자리한 감성의 함량이 아주 작은 것이라 해도 소홀히 여기며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해결할 것과 묻어둘 것들에 대한 의미마저 알게 된 기회였다. 살갗 속에 웅크린 가시가 또 있는지 살펴본다.
<토렴하다>
찬물에 씻어낸 면발이 탱글탱글하다. 그릇에 담고는 어릴 때 엄마가 하시던 대로 뜨거운 육수를 부었다가 따르기를 두어 번 한다. 국수의 맛을 내는 과정이 조금은 번거롭기는 해도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이 이리 용하게 쓰일 줄 미처 몰랐다. 토렴을 거치지 않은 국수는 맛이 없다. 먹다 보면 뜨뜻미지근한 맛이 미각을 떨어뜨려서다. 따뜻하게 먹기 위해서는 그만큼 한 번이라도 더 손을 써야만 제맛이 난다. 그 과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삶이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토렴을 해내듯 고난과 슬픔도 극복해야만 단단한 의식 세계에 머물게 되지 않을까. 문득 지나온 날들이 떠오른다. 음식이 맛을 제대로 내지 못했던 것처럼 미숙한 내 모든 부분에 대해서다. 떠밀려온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발견한 나를 되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고 분개하며 골몰했던 때가 많았다. 이제는 남은 인생이 조금이나마 성숙하게 변화되기를 노력하며 살고 있다.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온 세월이 마흔다섯 해를 넘어섰다. 연습이 없는 삶은 무척이나 곤한 지경에 이르도록 했다. 물질 때문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생각과 표현 방식이 부딪히며 날 선 언쟁으로 치닫는 일이 빈번했다. 그 와중에도 계절을 닮듯 꽃피우고 열매 맺는 일은 나에게 순서대로 다가왔다. 어느덧 손주들이 늘어나고 함박웃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여긴다. 지나간 날들에 비해 지금의 처지가 모두 안온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가끔 일어나는 내 안의 반란을 잠재우는 일에 애써야만 한다. 천직 삼아 지켜온 자영업에서 손을 떼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집안에 급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소일삼아 꾸려가는 방법도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중이다. 인건비 부담에 종업원을 두지 않았다. 아직은 견딜만한 나이인지라 한껏 긍정의 힘을 일으키며 살아간다. 그런데 지독할 만큼 어이 상실에 빠질 때가 있다. 전부터 그랬듯이 일하는 과정에서 남편은 여전히 나를 주종관계처럼 대하곤 한다. 긴 세월 지나면서 좁히려 들지 않는 그의 습관이 굳어져 버린 상태라고 해야 하나. 언짢아도 되도록 참는다. 여전히 나는 토렴의 과정을 치르는 중이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가족이지만 하고 싶은 말 다 못하며 산다. 백발이 성성해지기까지 깨닫게 된 것은 서로가 하나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일만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와 나, 늙고 약한 몸으로 변하는 것을 비껴갈 수 없는 처지에 닿아 있다고 해야 하나. 표정만 보아도 무엇 때문인지 가늠할 만큼 서로를 확인하는 사이가 부부이다. 세상 끝을 누가 앞서갈지도 모른다. 아옹다옹 살았을지언정 그것은 토렴을 거친 지난날로 인한 자기성찰의 시간에 가까이 다다라서인 것 같다. 이제는 마주하며 나누는 이야기, 마주 앉은 밥상, 함께 걸어가는 길목이 예삿일이 아니기만 한 것을 깊게 알아간다. 부부간의 사랑만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종교와도 같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곰삭아진 맛을 내듯 나를 꽉 붙들어 놓고 있었다. 살아간다는 것도 한편 여러 분야의 토렴을 거치는 일이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삶의 진짜 맛과 인내를 모른다. 돌아보니 모두 무겁고 힘들게 여기는 날들을 잘도 견디며 살고들 있다. 혈기 왕성한 시간을 보내고 노을 진 강가에 앉은 기분이 이런 것인가 보다. 갑자기 내 손끝이 남편의 등을 토닥이고 있다. 오늘도 식욕을 당기는 국수를 삶는다. 익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다음 차례를 준비한다. 마지막 토렴을 하면서 새롭게 탄생 되는 국수의 맛으로 빠져든다. 어쩌면 지금 내가 사는 맛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럴진대 평범한 음식에서 알게 된 지혜를 내게서 남은 시간과 빗대어 새로운 다짐을 하고 또 한다. 세상을 향하는 발걸음에 두려움이 줄어들고 있다. 토렴이 거듭 동반될지언정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하기에.
<방법은 고난보다 많다>
잊히지 않는 다큐의 장면들이 있다. 두 남자의 얼굴과 함께 그들이 빚어내는 환한 이야기다. 어떤 신호탄이 되어 뇌리에서 지금껏 나를 흔들고 있으니 여전히 잊히지 않고 있다. 그들의 언어와 표정까지 세세히 기억할 정도로 내게 각인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다큐가 전해준 깊은 울림을 이렇게나마 글로 반추해 보려고 한다. 제목은 〈두 남자와 나무 이야기〉이다. 중국의 평범한 시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친구 사이로 한 사람은 양팔이 없고 또 한 사람은 두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장애인이다. 양팔을 잃은 사람은 세 살 때 감전 사고로 그리되었으며 장애인 예술단체에서 단장까지 하다가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시골로 왔다고 한다. 그 무렵 다른 한 사람은 채석장의 폭파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어버렸고 둘의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다큐는 장애를 극복해 가는 인간의 한계를 그려내고 있다. 양팔이 없는 남자가 발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하는 삶에서 그 단어는 필요치 않았다. 한계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발을 손처럼 사용하면서도 너무도 밝은 표정은 정상인 신체를 가진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동안 성찰하지 못했던 점을 돌아보는 기회였다. 두 눈을 잃은 남자 역시 팔 없는 이와의 거리가 항상 좁았다. 볼 수는 없으되 친구의 팔이 되어주며 동행하는 풍경은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따뜻한 관계로 비추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둘은 서로 신체가 없는 부분에 대해 역할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서 우정을 넘어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아가는 매 순간이 힘겨운 도전이었지만 보는 이에게는 진지함을 그치지 않도록 했다. 두 남자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울창한 숲을 만들기로 작정하며 매달리는 모습은 기이할 정도였다. 팔이 없는 이가 삽질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에 그랬다. 삽자루를 어깨와 고개 사이에 고이고 땅을 파는 광경은 초인을 넘어 한계란 없다며 설명하는 듯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 역시 감각으로 열심히 해 내는 과정들을 보며 장애란 무색한 호칭에 불과했다. 심한 신체적 장애에도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그들의 정신이 심금을 울렸다. 가장 잊히지 않는 대사 중에서 팔 없는 이가 “방법은 고난보다 많다. 방법은 늘 생긴다. 시간이 지나면 다 좋아질 것이다.”는 말 한마디는 이 다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벽하게 완성해 주었다는
바다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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