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침묵과 가녀린 응시 (황혜란 시집)

짙은 침묵과 가녀린 응시 (황혜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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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황혜란 시인의 시들은 우선 낯설게 하기 기법을 통해, 시를 보다 싱그럽게 해놓고 있다. 사물을 진부하게 바라보기 하지 않고, 기시감이 들게 내버려 두지 않고, 매번 새로운 각도로 사물과 현상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어, 참신하다. 또한 성급히 주제를 내세우지 않고, 에둘러 표현하기와 이미지 구현을 통해, 변죽만 울리게 하고, 서서히 좁혀 들어가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는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의 특질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되도록 절제된 시어 배치를 통해, 깔끔한 미적 가치의 그릇을 만나게 해주고 있다. 시의 세계는 이 미적 가치의 그릇에 담겨졌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황혜란 시인의 시 전체가 하나의 미적 그릇을 이루고 있고, 거기에 담겨진 인생관과 세계관이 절망적이지 않고 새순 돋듯 희망적이고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런 감성들을 만난 독자들은 시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거기에 시의 리듬과 다채로운 표현기법 활용, 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시어 배치, 길지 않고도 짤막한 시 속에서도 묵직한 세계관을 펼칠 수 있었던 점 등도 주목할 만하다.
-박덕은(시인, 문학평론가)
저자

황혜란

한국방송통신대학교국어국문학과졸업
《문학공간》신인문학상시부문당선
독서지도사
한문지도사
박용철문학상수상
전주기령당충효문학상수상
커피문학상수상
시집『짙은침묵과가녀린응시』

목차

짙은침묵과가녀린응시차례

시인의말
축시

제1부서투른어법하나

호숫가에서
백일홍
고사리
관매도
꽃무릇
봄을맞다
봄비·1
봄비·2
구두닦이소년
봄이한창입니다
오월
하늘다리
시지포스
풍경을읽다
필리핀
을지로연가
자취생
회개
약속집어올리는날
향수
편지·1
편지·2
빨래를하다
커피

제2부남자가있는바다

고백
그리움·1
그리움·2
그리움·3
그리움·4
남자가있는바다
보이지않는너
사랑가
세레나데
아내
앵두
애련
양파까기
어떡하면좋아요
연가
점멸에들다
영산도
젊은날의초상
창공
창문을달다
짝사랑

제3부서성이는그리움

고기잡이
고향·1
동행
매실담그다
복숭아·1
복숭아·2
민들레
섬집아기
선착장
섬마을분홍빛가방은혼자서간다
수선화
엄마의섬
청춘의덫
여름단상
운동회
철선
청산도
하굣길

제4부팔목에걸린하루

단상
낙서
막차
산책
시창작
시애詩愛
이사
전철
전화
기도
5·18
선생님
백의민족
정약용
가을소곡小曲
가을길목
겨울,그길목에서
어느날·1
어느날·2
우산쓴카페
겨울단상
낙엽

해설
황혜란시인의시집출간을축하하며/박덕은

출판사 서평

황혜란시인의
시집출간을축하하며


박덕은
(문학평론가)


황혜란시인은전남고흥군금산면신촌리171번지금진마을에서인정많고명철한아버지황의상씨와종부인어머니박옥심씨사이에서3남4녀중둘째딸로1965년7월12일에태어났다.
시인의고향마당에는계절따라꽃이피어나는아름다운꽃밭이있었다.우물옆에는채송화와나팔꽃이흐드러지게피었고,담벼락감고오르는나팔꽃을보면시인은마음이설렜다.
어린시절,푸른바닷물이밀려나가면,친척언니의손에이끌려바닷가에서바지락캐고소라잡으며신비를만났다.감꽃흐드러지게떨어지면친구들과어깨를겯고서감꽃먹으며감꽃목걸이를만들어목에걸고행복해했다.이런단맛나는추억을뒤로하고,시인은도시로이사와살면서,외로움에휩싸이곤했다.그럴때마다비포장도로를덜컹거리며달리는버스에올라고향으로향했고,유년의산과들,바다,친구들을만나잠시나마행복을되찾곤했다.
시를쓰고,글을쓰면서아이들을가르치며,아이들과함께하는국어교사가되고싶은시인은,줄곧고등학교운동장에있는목련나무아래에서서성이며자신의미래를궁리했다.사회생활을하면서도불가항력적인힘에저만치밀려가버린시인과교사의꿈은그녀의몸깊은곳,작은우물이되어출렁거렸다.1989년에결혼하여,슬하에1남3녀를둔이후에도여전히.
초등학교5학년때여름방학과제물로시를써서제출했는데,뜻밖에‘우수상’을받은기억은시인이되게하는데한몫을했다.마침내그녀는한국방송통신대학교국어국문학과의문을두드렸고,졸업후독서지도사,한문지도사로활약하면서,시쓰기에도전했다.
한실문예창작문학교실에나오면서부터본격적으로시창작에정진했다.그열정의열매로,《문학공간》신인문학상시부문당선,박용철문학상수상,전주기령당충효문학상,커피문학상등을수상했다.
자,그러면지금부터황혜란시인의시세계로들어가여행을떠나보기로하자.

무성한신록몸짓
바람의빗금으로
떨어진다

새부리물고
날아가는
숭숭한추억들

이비그치면

흰눈내릴텐데

푸르게차오르던청춘
아지매붉은노랫가락
발밑에서바스락밟힌다

소녀들이뛰놀고
꿈꾸는이의노래
흐르는거리

그물에걸린계절,
아직은
끝나지않았다고

담장밑으로
서걱서걱
집짓는다.
-「낙엽」전문
이시에서의시적화자는낙엽을의인화해놓고있다.헤르만헤세는시「낙엽」에서“잎이여,바람이너를유혹하거든/가만히참고견디어라//너의유희를계속하라그리고거역하지말고조용히내버려두거라”고말했다.자연의순리에순응하는것이당연하지만마음은아쉽고아프고쓰리다.낙엽은밤새도록뛰어내린어떤발자국처럼길마다찍혀있다.나무의중심을환한초록으로달아오르게하며뜨거운포옹처럼땡볕을껴안고여름을건너온낙엽이자신의삶을내려놓기가쉽지만은않았을것이다.한때싱싱하고발랄했던초록의배경을이제는지우고떠나야한다.나무의문이쾅닫히는소리를들으며머나먼저바닥으로떨어져야한다.허공을건너는그발자국소리가쓸쓸하기만하다.낙엽은비록바람의빗금으로떨어진신세지만,비그치면곧눈이내리겠지만,새부리물고날아가는숭숭한추억들이지만,푸르게차오르던청춘과아지매붉은노랫가락이그발밑에서밟히지만,낙엽은담장밑에서걱서걱집지으며외친다.그물에걸린계절,아직은끝나지않았다고.소녀들이뛰놀고꿈꾸는이의노래가흐르는거리가있는한,결코절망은없다고소리친다.힘겨운내일을‘그물에걸린계절’이라고표현하고있다.멋지다.인격체로다가온낙엽을통해,소망안고살아가는삶을노래하고있어서더욱멋지다.

붉은장막안
성대한연극은잘끝났는지

생각이맑아져
한산한거리를
오랜만에가붓이걷는다

거친밑바닥만나도
느닷없이뒤통수치고
웃으며사라지는손

입술굳게다문하늘
불친절한눈매의길모퉁이

곧봄이오면
한움큼민들레꽃씨날려보내야지

산들산들바람부는아침에
쑥쑥싹내미는

맑고고운새한마리
살며시내려앉으면
톡톡푸른잎틔우는

마침내
쉭쉭꽃피우는나무나무들.
-「약속집어올리는날」전문

이시에서의시적화자는약속과얽힌감정을떠올리고있다.‘집다’의사전적인의미는‘아래에서주워올리다’이다.시적화자에게어떤약속이발아래에떨어져있었던것일까.그단서는“붉은장막안/성대한연극은잘끝났는지”에있다.연극배우는입술에한줄의대사를장전한후무대에서관객의심장을명중시키기위해,감정과표정을정확하게발사해야한다.커튼콜이이어질수있도록어젯밤이묻혀온생각은철저히삭제하고뜨겁고싸늘한안색을자유자재로숭배해야한다.이렇듯연극은인위적인연출이개입되기에일상에서는자연스럽지않다.또폐쇄된공간인붉은장막에서는어딘지모르게불안과긴장감이느껴진다.이를통해서우리는시적화자의불안한어제를읽어낼수있다.다행히그불안한어제가끝나서생각이맑아졌고거리를가붓이걷고있다.뭔가모를희망이다가오고있다.하지만고개를들어보면“입술굳게다문하늘/불친절한눈매의길모퉁이”가시적화자를둘러싸고있다.여전히현실은녹록치않지만힘든현실을감각적으로잘표현했다.약속을지키지못한마음은추운겨울과같아서즐겁게자신을마중나오는봄과같은감정은없다.오직설익은감정,자신을쥐어짜는찬바람같은부정적인감정만마주해야한다.그겨울끝자락같은불안한어제가끝났으니곧봄이올것이다.시적화자의설레는마음을“곧봄이오면/한움큼민들레꽃씨날려보내”려고한다고표현하고있다.‘봄’과‘민들레꽃씨’를통해약속집어올리는날의즐거움을말하고있다.마지막연에서약속이이행되었을때의마음을“쉭쉭꽃피우는나무나무들”이라고표현한다.여기서주목할것은‘쉭쉭’이라는부사다.‘쉭쉭’은공기나입김따위가좁은구멍으로자꾸새어나오는소리를뜻한다.동물에게적용되는말이다.‘쉭쉭’이라는동물의이미지와나무라는식물의이미지가조화를이루고있어멋지게시의끝맺음을하고있다.이시는심리소설을읽고있는듯한느낌이들어매력적이다.시적화자가다시소생하는삶으로전환할것같은예감이든다.

빨간,파란,초록의손잡이들
하나둘졸고있는밤

27번버스안
얇은팔목에걸린하루
춤사위가한창이다

창살기대고선
허옇게세어버린세월
잠시앉은의자위에서끄덕거린다

소리치는틈새를비집는
청춘의꿈은아주느리다

이제는
집으로돌아갈시간
팔없는날개가돋는다.
-「막차」전문

이시에서의시적화자는막차27번버스를타고귀가한다.「막차」라는제목에서어떤간절함과고단함이느껴진다.억압으로뭉쳐있는아침과오후를뚫고꿈을향해나아가는날갯짓이힘겨웠을것이다.피곤한초침소리를막차탈때까지방목하며꿈과열정을닦달하며달려가느라밤이깊어갔을것이다.눈꺼풀에붙은나른한졸음을손으로떼어내며늦은밤을떠받쳤던안간힘이눈에선하다.저막차를놓치면안된다는다급함에하던일을멈추고달려왔을조급한뒷모습이보이는듯하다.
버스안의손잡이들이졸고있다.얇은팔목에걸린하루의춤사위,창살에기대고선노인의모습,의자위에서끄덕거린다.소리치는세상의틈새,그속을비집고끼어드는청춘의꿈,아주느리게흘러가고있다.이제는귀가시간,어느새팔없는날개가돋는다.황혜란시인의시들속에는이렇게마지막반전을배치해놓고있다.세파를어둡게표현해놓고,그속에서희망의불빛이솟구치게하고있다.반전의미학이미적가치를추구하는시의특질을돋보이게해주고있다.

심연속으로던져버린것들이
빠르게헤엄쳐나오는밤
너는
몹시도거친불면을견디고있다

곧바닥이보일것같은시간
보일듯보이지않는거리를자맥질하다
잡히지않는깊은고독을배회하다

문득시작점에선너의미소는
풀꽃도향기도없는세월의심지에
다시또어린바람한점
켜놓는다.
-「가을길목」전문

이시에서의시적화자는가을길목을유심히관찰하고있다.가을은마음의바깥을배회하는날이많아지는계절이다.자꾸만혼자이고싶은저녁에게마음을써야한다.사랑니빠진자리처럼허전한밤의시간을다독거리며비틀거리는자정을붙들어야한다.몸안가득여름으로찬란했던색을뱉어내고누렇게바래진빛깔로시드는,그가을은외롭다.후천적고아처럼마음둘곳이없다.낙엽이허공의등뒤로흘러내리듯붙잡을수없는감정들이휘몰아친다.심연속으로던져버린것들이빠르게헤엄쳐나오는,그밤앞에서시적화자는서있다.무엇을심연속으로던져버렸다는것일까.외로움과그리움그리고꿈과열정처럼현실에서그끈을이어가기에는버거운것들이었을것이다.버거워심연속으로던진후못본척외면했지만가을길목에서내발목을다시붙들고있다.어지러운아픔을안고내앞에다시나타난것이다.휘청거리는걸음으로다가와내길을막고있는것이다.이제시적화자는고독의옷을입고고독의숨을쉬며고독의신발을신고가을을배회해야한다.그때문득떠오르는건시작점이다.여름의끝자락이자가을의시작점,그때서야미소가지어진다.그순간풀꽃도향기도없는세월의심지에어린바람한점켜놓는다.가을길목에서서절망이아닌소생의순간을맞이한시적화자에게희망이보인다.의인화기법으로이끌어간시적형상화가세련되어보인다.

뚜벅뚜벅
걷는소리가가까워지면
아버지,눈을감으세요

곧나룻배가오고
곁불쬘수있는난로가있으니
아버지,고개숙이지마세요

쓰러진자작나무일으킨건
아버지잘못이아니에요
국어선생님이떠나고
단풍든이파리툭툭떨어지는가을엔
아버지,절대늙지마세요
세상을둥글고부드럽게감싸주는
흰눈펑펑내리는겨울이오면
아버지,젊디젊어지세요

푸른하늘아래마당에
대낮에도환한가로등나무처럼
아버지,활짝피어나세요.
-「편지·2」전문

이시에서의시적화자는편지를통해아버지에게속엣말을하고있다.편지만큼그리움의체온을전할수있는게또있을까.카톡이일회용커피라면편지는다기에담긴차와같다.아홉번덖은차에담긴깊은향처럼마음졸였던밤의자세가묻어있고내일의안색이담겨있다.손끝에묻은염려와안부가우표에붙어발송되기에편지를받기도전에절절함이느껴진다.그느낌의편지가시의분위기를따스하게하고있다.이시는뼈와살을내주며자식을키운아버지에대한애틋한정이느껴진다.뚜벅뚜벅걷는소리가가까워지면눈을감으세요라고말하고있다.봄이오는소리,자식이오는소리라면눈을크게떠야한다.무슨소리이기에눈을감으라고하는걸까.부정적인소리,아버지의삶을불편하게하는소리일것이다.다행인것은나룻배가오고있다.그리움앞세운계절싣고안부와긍정을건네주는나룻배가오고있으니고개를숙이지말라고한다.아버지를향한세심한배려가따스하다.아버지와의관계가무척이나좋아보인다.그런데아버지는한때쓰러진자작나무를일으켰다며후회하고있다.쓰러진자작나무란무엇을의미하는것일까.일으켜세우다가더힘들었던어떤상황,어떤시절이었을것이다.아버지의의도와는무관하게어쩔수없는상황에떠밀려힘들어졌던것이니,그것은아버지의잘못이아니라고말한다.아버지가여전히마음아파할까봐걱정하는시적화자의마음이느껴진다.이제걱정은뒤로하고아버지는환한가로등나무처럼활짝피어나면된다고말한다.아버지와시적화자는인격체동산에서만나사랑과신뢰의마음을주고받으며진정한하나가되고있다.각운의도움으로시전체의통일성을강화시키면서,아버지에대한그리움을시적형상화해놓는데성공하고있다.

찬바람이
귓전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