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는 높은 곳에 올라서기를 좋아한다 (박성희 시집)

라마는 높은 곳에 올라서기를 좋아한다 (박성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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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시집을 열면 어디선가 느닷없는 불현실한 세계가 커튼을 젖히는 아침마냥 살뜰하게 현현한다. 그곳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각축이거나 욕망의 공간이 아니었다. “풀잎에서 새벽냄새”가 나는 이상한 영역. 풀잎은 잠깐 사이에 ‘풀 입’으로 화하여선 길거나 푸르러 보이는 물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 소리를 따라 흘러가다보면, 그렇구나. 거기에는 “하얀 발을 씻고 있는 백설 공주가 살고” 있었다.
도대체 이곳의 주소지는 어디일까. “키 작은 토끼”들을 지나쳐오고, 날아다니는 물고기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가, 노래하는 새들의 곁에서 “엘리스”처럼 작아지는 계획을 수렴하는 바지런한 공화국 안의 작은 방이거나 불빛이 아니었을까.
박성희 시인은 그렇게 자신의 궁륭에 들어앉아 어떤 재료의 부품들을 혼자서 조립하는가. “너의 성에 들어가 하늘 언덕에 싹트는 별을 세다가” 너의 얼굴, 사실은 자신의 시(詩)의 면상 위로 날아가 앉고 싶은 ‘나비의 꿈’을 새기며 있다. 하여 이 주소지는 “문득, 이라는 이름의 방”으로 은유된 “별”의 탐색지와 같아 보였다.
표제시인 「라마는 높은 곳에 올라서기를 좋아한다」 역시 시인의 내면 방점인 별이 출몰하곤 한다. “산소를 마시듯 별빛을 삼킨다” 등등. 그의 별들은 대부분 “슬픈 눈”이다. 박성희 시의 ‘여성성’과 더불어 ‘동화적 상상력이 호응하며 내는 시의 물소리. 그렇게 시들의 궁극을 향한 자세는 왠지 숙명적이다. 운명은 이 여린 시인에게 “기린과의 동거”를 종용하거나 꿈을 꾸도록 권하기도 한다.
향후 시인의 시에선 발돋음을 다하여 따 모은 그의 별들이, 그가 줄곧 경원하곤 하였던 닫힘의 세상을 푸는 열쇠로 반짝여 주기를 바라기로 한다. - 정윤천 (시인. 시와사람 편집주간)

모든 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래인 동시에 수많은 다른 존재들에 대한 노래들이다. 자신의 거처에서 어떻게 존재했는가? 혹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묘사이자 기록임에 틀림이 없다. 그 존재양식은 그 처소가 어디든 원초적인 제 모습 그대로 편재하지만, 그 보편성 속에 박성희 시인의 자아와 개성이 무한히 열려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렇게 시인의 시들을 즐겁게 감상하였다. 열려있음은 대상과의 새로운 호응으로 인해 언제든지 변화무쌍하게 바뀌어 질 수 있는 변모의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다.
‘어디에나 있는 당신’에게로 열려 있지만 ‘닫힘’의 경계 역시 같은 질량의 연민과 고뇌로 대응하는 시인의 자세가, 다음의 그의 시 세계로의 이행에 기대를 갖게 한다. - 나금숙(시인)
저자

박성희

ㆍ광주출생
ㆍ2008년《불교문예》등단
ㆍ시집『풍뎅이날개로지구를돌다』
ㆍ그림동화책『난장이와물방울』,『꾀꼬리아의여행』
ㆍ2023년전남문화예술재단기금수혜

목차

라마는높은곳에올라서기를좋아한다/차례



시인의말


제1부문득,이라는이름의방

문득,이라는이름의방
괴테의부활
지구를줍다
유언
5월,그날
가을들녘에서
옐로우피쉬
보이지않는다고사라지는것은아니야
광양제철벚꽃나무
하늘수박
입석立席의시간
라마는높은곳에올라서기를좋아한다
적립한다고로존재한다
연꽃차
가두리양식장


제2부들판에섬이있다

들판에섬이있다
기린과함께동거를
분재
아버지의시詩
불혹
말의성찬
밥은먹고사냐?
새의꿈을꾸었다
오래된피아노
네개의귀를갖은식탁
나는리모콘이다
기도
샤또샤스스플린와인을마시는밤
내마음의호수
호롱불


제3부유리병속의오후3시

새에게길을묻다
사라진탑
유리병속의오후3시
갈망
배알도
한쪽귀가없는시간속에서
장미가피는계절
해송
비밀의화원
11월의장미
하늘호수와바위구절초관계
시를훔치다
기억의밀서
백두산천지
춘설


제4부가을에는채무자가된다

사막1
사막2
사막3
가방을맨할머니
가을에는채무자가된다
인동초
방房
사람들
화살나무
고해
점박이강아지를따라간시간
가을엽서
뜨거운것은상처를남긴다
물속의집
아가야

작품론
열림에대한예찬과닫힘에관한고뇌의세계/나금숙

출판사 서평

▣작품론

열림에대한예찬닫힘에관한고뇌의세계
-시집『라마는높은곳에올라서기를좋아한다』를중심으로

나금숙
(시인)

1.여성신화의현대성을찾아서
이시집에는시인이마주친꽃들,산과들,동물들과도시들,사람들이지나가고있다.아니살고있다고표현하는게더유의미하게들릴것같다.
기록하는자가최후에이기는자라는문장을벽에새긴도서관에서사람들의저작물에대하여생각해보았던적이있었다.그것은필자에게도자유롭지않았던‘쓰고싶음’의무의식에대한희미한해답같기도하였다.무릇인간의문명이야말로기록에서출발하지않았을까.
한사람의자연인으로서박성희의기록역시자신이상관한문자의세계를낳고있는셈이다.시집『라마는높은곳에올라서기를좋아한다』는결국시인이기록이라는줄타기와도같은생체험으로이루어낸마음의세계이다.그렇게한시인의시집한권의내용과시편들은각자의지점에서출발하여사방을향해확장되기시작한것이다.때로는대기를벗어난우주적상상력의지경을넘나들고있음을바라볼수있다.
특히이시집의시들은한사물이나사태에대한양가적인감정을빠뜨리지않고면밀히기록하는일에바쳐져있음을느낄수있다.
팔림세스트를통해기록한다는의미를재차한번들여다보면,양피지위에기록된것을지우고다시쓰는작업인팔림세스트는,밑에놓여진원형적인것과최초의것을찾아의미를부여하는수리공같은작업으로그치는게아니었다.주변의모든것속에숨어있는이질적인시간의층위를새겨내고,현재의것이든과거의것이든그어느것하나에만절대적의미를부여하려하지않은자세.팔림세스트에주목하는것은결코원형복원으로이해되어서는안되는점을부기해본다.오히려이질적인것들과의중첩을통해원형의신화를재건하거나해체하는작업으로이해하는것이다.
박성희시인의시쓰기역시앞서간이들이다룬다양한오브제들과그에대한조명들을완전히지워내고없애는방식뒤에서,새로쓰기와같은시작태도이기보다는무수한의미론의층위와바탕곁에서자신의이미지터치와입력에노력을거듭하는모습을보이고있다.

비내리는오후
엄마와아가가제비꽃같은
웃음을흘리며지나간다

물소리바람소리발자국소리모아
정원을만들고

마른땅에뿌려진씨앗

흙이제살을열어
씨앗을안을때
지구의회전이잠시뒤틀린다

돌부리에채인물소리가
물고기비늘처럼반짝이는시간

씨앗을심는일은
황홀한고백을기다리는일

절망이희망에게자리를내주길
바라는자리

아가의눈동자가
햇살을머금은씨앗처럼
환하다
-「비밀의화원」전문

이시를읽으면무엇엔지젊고아름다운모자간의외출이떠오른다.제비꽃같은웃음이라니,그렇게떠오르는얼굴들이누구에게나있다.이생에서아가만큼예쁜꽃이있으랴.신(神)도기꺼워서기웃이들여다볼비밀의화원에핀꽃들은바로이아가들이다.

“마른땅에뿌려진씨앗/흙이제살을열어씨앗을안을때”“지구의회전이잠시뒤틀린다”.“씨앗을심는일은/황홀한고백을기다리는일/절망이희망에게자리를내주길/바라는자리”.

생명의탄생에바치는요긴한헌사의자리가여기에있다.박성희시인의‘열림’의세계에대한천착의풍경중의하나이다.어디에서나아가의눈동자는햇살을머금은씨앗처럼환하다.영아유기,살해,학대등어두운뉴스와세계최대인구절벽국가라는작금의현실앞에서,이시는우리로하여금희망의미소를짓게만든다.시인의시가지향하는‘열림’의말들이현실의시간과세계에서도구현어지는날들을시인과시인과더불어기대해보고싶은마음이다.

돌탑에돌멩이를올리며모래언덕을오른다돌멩이하나에소원하나씩을올린다소원은이루기위해서가아니라버리기위해있음을사막에오면알게된다

소원들이빠져나간몸은가볍다
더이상의바램이없어지면나타나는사원,
멀리보이는돌탑들이모래알처럼작다

사원안에는눈이세개달린여성수호신이두발로인간을밟고있다그의이빨은악마와싸우다가그악마와사랑에빠져낳은아기를힘껏물고있다악마의씨를뿌릴까봐땅에내려놓지못한채

입안에번지는핏빛저녁노을
-「사막3」전문

박성희시인은몇편의‘사막’을시집안에선보이고있다.시인이쓴많은가작들이거나사유의시편들을건너뛰어서굳이이시를서두에거론하려는데는필자나름의이유가있을것같다.이시에서박성희시인이자신의시를통해주목하는‘열림’과의대척점에자리한‘닫힘과고뇌’의모습을그리고있어서일것같다.탄생자체가불행이거나비극이라는,꽤나긴요하고급박해보이는서사를굳히며‘사막’은독자에게로다가서고있다.

이돌탑과저주받은사원이있는곳은어디일까?지도위의어느좌표에이런곳이있어서듣기만해도고통스러운설화를낳고있는것이다.“괴물들과싸우는그는그가괴물이되지않도록조심함을드러낸다.그심연을깊이들여다본다면,그심연도당신을깊이들여다볼것만같다.”라는말을떠오르게하는,이시의메타포는신중하다.앞의시에서‘햇살머금은씨앗’으로묘사된아가는이시에서는저주의씨가되어나타나고있다.어쩌다자기가제거하려던악마와사랑에빠져버렸는가?그러나이것은우문에불과할지모른다.사랑이란상황과조건을넘어서서불붙는,엎질러진석유같은존재이어서,이불합리한결합은결국어미의이빨로자식을물고놓지못하는비극으로치달아있다.살면서불합리한사랑에빠져본이들은이장면에서눈을떼지못할것같다.어쩌다저질러졌지만피할수없었던죄의열매를감추기에급급한시간을지나와본이들은시속의여신이갖는죄책감을이해할수있을것이다.이잔혹한운명을자신의것으로삼아‘아모르파티’라고외칠수있는뻔뻔한양심은말그대로악마외에는없을것이다.하지만어쩌랴,그런악마의성품이이미나약한우리들속에내재해있는것을.이시에등장한악마는어쩌면밖의존재라기보다는우리들모두의속에내재해있는자신의또다른잠재태로읽어도무방할것같다.그렇게박성희의시집은이질적인두세계의충돌을갈파하며있다.
악한본성을내쫓으려다결국안이한타협의길을스스로택했다면,벗어나기위해몸부림치던자아는,또다른몹쓸자아와하나되어기이한결합체로나타나고야만다.이런연속적인상황들이바로현대의‘사막’이기도한셈이다.다행인점은눈3개달린여성수호신이불행한악마의씨를땅에뿌리지않기위해그씨앗을자신의이빨로물고있다.현대의운명에적극적으로저항하고있다는점이다.이부분이또한박성희시인이그려내려는여성성의신성과그세계에기초하고있음을보여주고있다.
정신분석학자진시노다볼린에의하면,우리안에는여러여신의원형이존재한다고주장하였는데,이시의여성수호신의원형은비교적찾아보기가힘든경우로나타나고있다.
남편이나아버지나자식에게함몰되거나연루되어신세를망치는여신들과는달리시속의여신은오직자기자신에게충실해보인다.자신의부조리한사랑과신념에직면해있는괴물의모습이다.입안에피를머금고서라도자신의의지를포기하지않는새롭고신선한여성상의모습을낳고있다.어찌보면가장현대적인여성상의구현같기도하다.

2.스스로갇힌감옥의아름다움

마른기침소리들려온다

시든장미한송이녹이스는가보다

성당담벼락그늘진곳,
때아닌장미꽃이피었다

끝이어딘지도모르면서담을넘고싶은가보다

봉쇄수녀원의기도문같은살을파고드는가시

잦아들어가는제안의숨소리에놀라

몸을말아웅크린다

더는견디지못해땅위로부서져내린다

오늘은아녜스수녀님의장례식날

장미꽃속에서종소리울린다
-「11월의장미」전문

시인의긍휼한시선이가닿은소멸의자리가있다.일생을성당의담벼락그늘진곳에서조용히피었던장미한송이가녹이슬듯이쇠하여지고있다.담밖의세상끝을그도그리워했을것이라고화자는체감한다.여기는봉쇄수도원,기도문외는소리외에는담을넘을수없는곳,숨소리도잦아들어가야하는고요한거처다.자유를그리는영혼은더는견디지못해땅으로부서져내린다.그스러지는장미꽃,아녜스수녀님은마지막가시는길에종소리로울리고있다.그러나밖에서보는자들에겐봉쇄수도원이지만아녜스수녀에게는보금자리이고안식처였을수도있다.그봉쇄가스스로걸어잠근것일테니까.아가서에보면“나의누이나의신부는잠근동산이요덮은우물이요봉한샘이로구나”라고연인을칭찬하는아름다운구절이있다.여기서봉하고잠근것은타인이아니다.오직전체가아름다운당신에게몰두하기위해,걸맞기위해여인스스로순결을지향하여자신을가둔것이다.그경지와행복은절대자의연인,아녜스수녀본인만알것이다.그러나밖에서몸이자유로운화자가봉쇄된그녀를체휼하는것은시인본연의자비로운심성이어서읽는이를흐뭇하게한다.창조자로서시인은스러지는장미같은그녀를종소리로부활시킨다.시인으로서의지복을누리는각별한장면이다.시인의손끝에서빚어지는죽음을거친재생과부활은창세기의아담의명명식이상으로의미있는일이라고생각한다.

풀잎에서새벽냄새가난다풀잎의가슴에귀를대고물소리를따라가보면하얀발을씻고있는백설공주가있다

마법을즐기는숲속요정들이서랍안에서잠을잔다풀잎들이피리소리에맞춰춤을추고울타리를지키고있는키작은토끼들의털빛은하얗게부풀어오른다

물고기가방안을날아다니고새들은지붕위에서노래를한다나는이상한나라의엘리스처럼작아져너의성에들어가하늘언덕에싹트는별을세다가

나비가되어문득,네얼굴위에앉는다
-「문득,이라는이름의방」전문

문득,지나쳐온시한편이생각나서이자리쯤에서다시그작품을소환해보기로한다.
인용시는시집의첫자리에놓여있는,한편으로는유별난위치에자리한작품이다.문득이라는의미를사전적으로풀이해보면,갑자기생각이나서일으키게되는모종의상태이거나심리를가르키는말이다.문득은그러니까의도하지않았다가이루어진의외의결과물인셈이다.
시인은“풀잎에서새벽냄새가”난다면서,자신이직면한시간대를역설적으로은유하며있다.한편의동화는그렇게시작되었다.새벽의물소리를따라가다보면,거기하얀발을씻고있는“백설공주”의영역이있다.그영역안에서전개되는상황일까?“마법을즐기는숲속요정들이서랍안에서잠을잔다”문득,피리를부는풀잎들,새벽을맞이한새들.이들은당연히피리소리에맞추어춤을추기시작한다.여기까지따라온시상의전개는일견깔끔하면서도경쾌한주위를선보이며있다.“키작은토끼들의털빛”이“하얗게부풀어”오르고있다는섬세한묘사는왠지화룡점정의가경으로읽혔다.연이어나타나는“방안”을날아다니는물고기,지붕위에서노래하는새들,그들로인하여시의화자는문득,“이상한나라의엘리스”로화하는마법의장면을연출하기에이른다.문득,이상하고아름다운상상의세계가눈을한번깜짝거린사이에정면으로건설되었다.문득,시인은어디에까지가서이르려는가.“하늘언덕에싹트는별을세는”신화속의존재는아니었을까.
박성희시인의시에출몰하는예의‘여성성’과더불어이시의말미에드러난“나비가되어문득,네얼굴위에”앉고싶은화자의열망은,우리가이미까마득한지점에서잃어버린원형의세계,그동화의나라에대한천착은아니었는지.그렇게그는“스스로갇힌감옥의아름다움”에대하여노래하는,어느실낙원의“키작은토끼”는아니었는지.

3.침묵하는존재들이시인을만나다

요양원복도를서성거리는할머니
누굴기다리는가

기다림없이복도끝에안착한
해피트리는행복하다

두꺼운책과돋보기가들어있는가방을
온종일끌고다니며
배우지못한한을풀고있는

가방없이는한발자국도떼지못하는
할머니의어깨가비좁다

흐트러져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