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위빠사나 (박지선 시집)

어느 날의 위빠사나 (박지선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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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박지선의 시집 『어느 날의 위빠사나』에 수록된 예순 아홉 시편은 그녀가 지나온 길의 흔적을 낱낱이 보여준다. 길이란 선점하거나 선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시인은 주어진 삶의 노정을 묵묵히 밟아 여기까지 왔다. 낯선 풍경을 바라볼 때면 낯익은 풍경을 겹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나직이 나직이 노래하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인의 말’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흐르는 동안 저절로 깨끗해지”는 물의 이력을 살아온 그녀는 ‘자정自淨’ 작용의 순리를 안다. 은색 파이프 같은 두 다리를 번갈아 내디디며 앙금이 섞인 물을 거르고 또 걸러낸다.
시인 박지선은 시를 통해 삶과 진실과 생명에 대해 말한다. 끝끝내 놓치지 않아야 하는 ‘마침표’의 궤적에 대해 말한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며 진실은 외면되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말이 낯설게 들리는 것은 박지선의 시어가 시의 본질에 닿아 있어서다. 일상의 언어가 시가 되기까지 시인의 입술은 얼마나 발화를 위해 노력했을까. 이 시의 편수인 예순 아홉은 ‘일흔’이라는 수에서 한 숟가락 덜어낸 만큼의 숫자다. 완전하지 않기에 시가 되어지는 숫자다. - 〈작품론〉 중에서
저자

박지선

ㆍ1954년여천출생
ㆍ2003년〈광주매일〉신춘문예시부문당선
ㆍ2004년동서문학맥심상수상
ㆍ2008년〈불교신문〉신춘문예시부문당선
ㆍ2010년《수필계》신인상
ㆍ2019년시집『그흰빛』,『어느날의위빠사나』
ㆍ2020년~2021년한국문인협회지부장역임
ㆍ그림동화『엄마찾은구렁이』,『섬진강또랑이뚜랑이』,『옹기마을옹기장』

목차

어느날의위빠사나/차례


시인의말


제1부붉은부끄러움


붉은부끄러움
향어를읽다
몽유
소쇄원의달
네게로가는길
바람부는날
내게로오시는
어둡던목소리
지독한농담
당신이피워놓은꽃
공갈빵
어느날의위빠사나
서툰사랑
그냥그래
vip의신드롬


제2부숲에는소리가산다

사랑아
붉은말의갈기
인터넷비번
산다화
목련1
목련2
능소화
복수초
장다리꽃
숲에는소리가산다
바람든무처럼
내일이오는게무서웠던날들
그믐밤
풍경소리
무명초를위하여
고독
연못
봄은새를맞는다


제3부지금은통화중

봄날의뒷면
건축학개론
나이테
종이그림자
포기
꽃꽂이
가로수의수사
하늘연못
소금
가야에서
녹물薄娑
에틸렌가스
양파梁派
아내
옐로우피쉬
보성여관
지금은통화중
백련사동백꽃


제4부모서리에무늬가있었다

모서리에무늬가있었다
현충원에서
가면극
빈집1
빈집2
난장판
뒷모습
반상회
어디쯤인지가늠할수없는
꼰대는붉다
생보리도받습니까?
부재또는존재
어느닭장속의이야기
정전과충전사이
팔등신
설익은서리태여자
숟가락성자

작품론
고래의붉은젖을빠는세이렌의노래/최세라

출판사 서평

고래의붉은젖을빠는세이렌의노래


최세라
(시인)


박지선의시집『어느날의위빠사나』에수록된예순아홉시편은그녀가지나온길의흔적을낱낱이보여준다.길이란선점하거나선정할수없는것이어서시인은주어진삶의노정을묵묵히밟아여기까지왔다.낯선풍경을바라볼때면낯익은풍경을겹쳐서그리고,사람들사이에있으면아름다움을발견하고,나직이나직이노래하면서걸음을멈추지않았다.‘시인의말’에서고백한바와같이“흐르는동안저절로깨끗해지”는물의이력을살아온그녀는‘자정自淨’작용의순리를안다.은색파이프같은두다리를번갈아내디디며앙금이섞인물을거르고또걸러낸다.
그러나그녀의길이묵묵함으로만일관하는여정은아니다.단하나라고믿었던길이수많은갈림길로무화되는곳에이르면와락,‘붉음’을발화한다.붉음은색色이공空을만나는눈꺼풀안쪽의빛깔이고,몸속의갈림길을끝없이도는피톨의빛이며,오장육부에서치밀어오르는웅얼거림을선별해언어로빚어내는혀의색이다.박지선은언어의속성이붉다는것을직관적으로파악한다.핏기없는언어는시어가되지못하고사멸한다는걸누구보다잘안다.깊이를헤아릴수없는검은물,크기를측량할수없는무채색의고래,창백하게이어지는끝없는길을몸으로겪으며살지만,그녀가발화하는언어는핏기를띤다.여기,물위에“당신이피워놓은”꽃잎이떠있다.시인이발화하는붉음은매혹적이다.다시,매혹적인것은스스로정화되어지는붉음이다.

꽃,이라고부르면꽃의시선으로
박지선은시인이언어에대해어떤태도를지녀야하는지잘보여준다.그녀의시편을따라가다보면지휘봉을들고언어를부린적이단한번도없음을알수있다.마치연인을대하듯극진한마음과사랑으로언어와동행해왔음을,그러한현장을발견할뿐이다.시인의그런태도에힘입은언어는생기를얻어저절로흐르고제경계를넓혀시적세계를형성한다.붉은꽃들의세계다.꽃이피는,꽃이지는.충만하고결핍되었고울었고웃어야하는.

쫑포*부두에서부터
차는밀리기시작했다
무작정길을나선싸락눈처럼
고향
이잃은여자는아니다

배고픈손에말아쥔,
지전한닢의무게에떨던여자

꽃이어서다행이다
꺾일수있는꽃은한조각의빵

회색벽에걸린편견의틀에서빠져나온여자

거미줄에매달린이슬방울을
관통하는아침햇살

바다를건너가는일몰의손이
여자의어깨를넘어가고있다.
-「산다화」전문

‘산다화’가애기동백이라는설명은이시를읽는데중요하지않다.그저‘붉음’이좋을뿐이다.‘붉음’이느껴질뿐이다.엉거주춤합장한것같은꽃잎의생김새가떠올라눈가장자리에일몰의색을띤다면그뿐이다.여기‘여자’가있다.아마도사창가에서“지전한닢의무게에떨”었을‘여자’는겨울의빈한함에서벗어나지못한다.봄이와도여름과가을이와도‘여자’의계절은그대로다.마침눈이내린다.‘싸락눈’은눈의결정들이풍성하게엉겨붙은함박눈과달리환영받지못한다.내리는품도보잘것없고어디부딪히기라도하면금세바스라진다.뭉쳐서눈사람을만들용도도못되고마음을새하얗게만들어주는심미적유용성도갖지못한다.‘무작정’내린다.무목적적으로그것은내린다.‘여자’가‘싸락눈’을맞으며서있는장소는차가밀리는살풍경한도로다.자동차안의사람들은열선이설치된의자에앉아히터바람을쐬며차창밖‘여자’를본다.운전석과조수석사이에커피가있을것이다.송풍기에설치된방향제가인간의육신에서풍기기마련인체취를감미로운향기로바꾸고있을것이다.길이막혀서차들은천천히움직이고,볼만한풍경은‘싸락눈’에가려져있다.썬팅된차량안의사람들은모습을드러내지않고밖을본다.창밖의‘여자’는그들에게오래오래노출된다.‘다행’한것은‘여자’가‘꽃’이라는점이다.그사실을발견한사람은이시의화자다.꽃의시선으로보는화자가있어서‘여자’는‘산다화’가된다.싸락눈을머리에이고도얼거나시들지않는꽃이된다.화자는‘편견’없이분별심없이‘여자’를바라본다.그시선은꽃의시선이다.‘사량思量’은‘생각하여헤아린’다는일차적뜻이있지만오염된마음으로타인을잰다는이차적뜻으로도쓰인다.사량하는마음은“회색벽에걸린편견의틀”만큼딱딱하고거칠고고집이세다.꽃을뭉개버릴수있을만큼주저함이없다.그러나꽃의관점으로꽃의시선으로사람을본다면일체의‘회색벽’은그리고‘편견의틀’은무력해지고만다.‘아침햇살’의위력이발휘되는순간이다.“거미줄에매달린이슬방울”은우주적인드라망의장엄함을내비친다.관계망속의존재들이서로를의지하고끌어안는모습.그러한자리에‘여자’는서있다.한송이산다화로,붉은심장을가진인격으로.

당신과나의조상은한덩어리흙
당신의작은방,
약속된향기의질량이말라가요

밖은
오월의눈부신햇살
아침마다내가뿌리는레드향이지천으로피었어요.

가위를든당신이가여워요
난아직살아있거든요

금속성가위가
당신을겨냥하게될지도몰라요

심장의박동소리가들리지않는밤
당신이자르지못한향기가환하지않나요
-「꽃꽂이」전문

사람의몸이‘흙’에서나왔다는진술로부터이시는시작된다.흙은일반적으로모성과풍요를상징하지만사실그것은순수한물질이아니다.어떤흙은지난늦가을의낙엽을품은채자신이피워낼충만한생명들에미리감동한다.어떤흙은두더지의시체를조금씩자신의품으로되돌리며애도하는중이고또어떤흙은돌탑을쌓기에맞춤한자갈들을잔뜩품고있다.흙은‘품’는다.그렇지만매번뭔가다른것들과섞여있다.그것이흙의본질이다.화산분화구에서떠온흙과고구마밭에서가져온흙은다르다.‘다름’은경계가되고퍼렇게벼려진날이되고모서리가되고‘극極’이된다.반대편자리에서‘당신’은눈을번뜩이고있을것이다.온몸이광물인것처럼,“아침마다내가뿌리는레드향”을무화시키겠다는것처럼.불화는관계에서비롯될때도있지만,사람이라는흙안에서단단히뭉쳐진금속성원소가적의로드러난결과일때도있다.‘당신’의적의를누그러뜨리려는‘나’의태도는진지하고반복적이다.고체중에서도가장단단한금속을기체에불과한‘향기’로무력화하려한다.‘나’가우려하는것은‘당신’으로부터공격받을수도있을자신의몸이아니다.“금속성가위”의방향을근심하는것이다.오행의‘상생상극설相生相剋設’에의하면흙은금속을생한다土生金.이에금속은자유자재로휘두를수있는도구가된다.그것을얻은자는빈손인자를압도하고모든부분에서우위를점할수있다.하지만맹렬한화나상념에사로잡혀안목을잃은사람이휘두른다면스스로가멸할따름이다.‘나’에게는현실에서유용하게사용할금金도금金을녹일화火도없다.다만명료한정신은“금속성가위가/당신을겨냥하게될지도몰”라안타까워한다.‘나’는이상황을두려워하지않는다.“아직살아있”기때문이다.‘레드향’의생명력으로‘당신’에게해줄수있는건곡진하고마음을다해행하는발화發話이며발화發花다.내게대적하는‘당신’을향한‘나’의언어는온화하고귤향이풍겨난다.화극금火剋金이아닌향극금香剋金의장면,나아가향생금香生金의장면을본다는것은박지선시에서만누릴수있는드물고귀중한경험이다.
박지선의시편에는색의삼원색중가장밝은색인‘노랑’꽃들도등장한다.노랑은빛의삼원광三元光중빨강과초록이겹칠때태어난다.주지하다시피빨강과초록은색상환에서반대편에놓이는색깔이다.극과극이섞일때태어나는색이라니!노랑의비밀은또있다.섞을수록밝아지는빛과는달리물감,크레파스등의색은섞을수록어두워지는데노랑은예외다.노랑은상대색을밝고화사하게만들어준다.어쩌면노랑은색보다는빛에가까운지도모른다.개나리와병아리와유치원의색깔이노랑인것은휘발되기쉬운유년기의빛이어서인지도모른다.이렇듯선천적으로미스터리한색상인노랑은박지선시중「복수초」에서찾아볼수있다.

그여자
홀연히
귀띔도없이
끓는성질로와서흉터를헤집었다

나는간이역의자에앉아
기차를타고떠나가는그녀를바라보았다

돌아오는발걸음앞에노란꽃잎이피어올랐다
-「복수초」전문

눈속에서피어나는작은꽃,‘복수초’는오해받는식물이다.이름이‘앙갚음’을의미하는‘복수復讐’를연상하게해서인데,사실이꽃의한자어는‘복수福壽’이다.사전적의미는‘복이많고오래삶’이지만,‘복福’의뜻을동사로풀면‘오래도록잘살아가기를축복함’이다.본문속의정황으로들어가면두사람이나온다.‘그여자’는거침없다.상대의동의도구하지않은채등장하고,크나큰상처를주고,떠나버린다.‘그여자’가하는행동의바탕엔“끓는성질”이있다.그것은복수심復讐心일지도모른다.어쩌면시기심이나적개심일수도있다.그‘성질’의근본은지옥처럼잔혹하다.자신의성질에지배당한그녀는‘나’라는사람을보고있지않다.나의‘흉터’를보고있다.흉터에는눈도코도입도없고인격도없다.다만“헤집”을대상일뿐이다.그녀에비해‘나’의행동반경은작다.‘나’와연관된동사는‘앉다’와‘바라보다’와‘돌아오다’이다.‘나’는발길을멈추기위해앉는다.무엇을기어코보겠다는마음없이그저눈에맺힌상을감각한다.그리고는자신이원래있던자리로발걸음을옮긴다.‘나’가‘그여자’를만났던것은무슨뜻이나계획,약속이있어서가아니다.그저교통사고처럼이해할수없는사건이일어나서일방적으로피해를감당하게된것이다.‘나’는‘그여자’가떠나가는자리에멈춘다.그리고‘본’다.‘나’의‘바라봄’에는미움이나비판,격정,울분같은것이없다.이순간무아無我의상태이기때문이다.모든분별심과집착이‘그여자’와함께떠나간다.‘나’는그녀가탄기차에‘나我’를함께태워보냈기에무아의자리로“돌아올”수있었다.그리고그여정에복수초가핀다.“노란꽃잎”은나에게복수復讐하듯다가온‘그여자’가오래도록잘살아가기를축복한다.이러한‘나’의마음은지상에살되천상에적籍을둔다.

시가될때까지발화하는세이렌의언어
근원을찾는일은인간을비롯한모든생명의,힘겨운본능이다.생명의기원이바다에서시작됐다는설을따를때사람의상체를가진인어가뱃길에서노래한다는이야기는상상의소산만은아니다.거친바다에서노래하며뱃사람의정신을혼미하게만드는반인반어半人半魚의전설은전세계에걸쳐구전되는설화이다.박지선의시에서도바다와근원과사람에대한감각적사유가발견된다.

고래에게가고싶다.
고래의젖을물고싶다
고래의젖을물고고향바다를빨고싶다

고래는엄마의삶엄마의일생엄마의죽음
어느덧내젖꼭지가붉어져있다
-「붉은부끄러움」전문

‘부끄러움’은왜붉은가.‘젖꼭지’가붉기때문이고젖을먹는생명의행위가붉기때문이다.‘나’는고래를향해나아가려는욕구를가지고있다.고래는육지에서바다로이동해영영그곳에서살기로한거대생물이다.그것의이동방향은다른동물과반대다.바다에서탄생한생명들이죽을힘을다해육지로나아간것과달리고래는바다에몸을묻고물의질서에따라살아왔다.‘나’는고래처럼꼬리지느러미를위아래로저으며깊은물속,고향으로향한다.삶의근원을찾는여정이지만동시에죽음같은자맥질이다.‘고래’는“엄마의삶”“엄마의일생”“엄마의죽음”이다.파도에휩싸여있기에한눈에크기를가늠할수없는그바다생물은세이렌처럼노래를부른다.그것은‘나’에게자장가같은것이다.삶에의끝없는도전,심해에잠겨살아간일생,그리고심해로가라앉았을죽음까지모두가‘엄마’의노래같은것이다.대양에속한휘파람같은것이다.위험하고매혹적이고무엇보다삶의의지로충만했을‘엄마’의삶은‘나’가무시로지향하는근원의세계다.‘나’는“고래의젖을물”고“고향바다를빨”고싶다.고래의젖을물면비릿하고따스한바닷물을삼킬수있다는상상에이른다.무르익을대로무르익어“젖꼭지가붉”어진다.다른생명에게젖을물려살릴수있을만큼성숙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