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어지는 것들 (정관웅 시집)

붉어지는 것들 (정관웅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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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정관웅 시인의 시집 『붉어지는 것들』은 시인의 인식체계, 즉 시적 프리즘을 통해 내뿜는 다양한 시의 색채를 보여준다.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고, 여성과 노인이라는 우리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거나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편들을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 한켠에는 역사적 위인을 등장시켜 영웅화시키지 않고 세계를 잇는, 변환을 이끈 인물로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그의 시에서 주목할 점은 침묵이 겸손이 아니라 발화를 통해 소통하고 응답하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정관웅 시인의 시는 비교적 사물과 세계의 미세한 부분에 관한 새로운 인식태도를 발견하는 데 능숙하다. 그리고 도시적 모더니티보다 자연을 통해 시적 발화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커피숍」 같은 경우에서는 빛과 향기, 손놀림, 정적, 시간의 길이만으로 인물들의 관계를 그려내는, 정관웅 시인에게는 매우 낯선 도시적 감각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해 밝히는 견해를 통해 시론적 자기성찰, 그리고 시인에 대한 냉정한 인식 태도를 잘 형상화한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 강경호(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저자

정관웅

시인 정관웅은 전남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5년 《교육자료》 천료를 시작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후에 계간 《시선》 시, 계간 《문학춘추》 문학평론 등단했다. 2021년 시집 『비의 가지에 꽃눈으로』 현구문학상, 전영택문학상, 이동주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라남도문인협회 회장이며 그 밖의 시집은 『강물이 되고 싶다』, 『희망, 너는 어느 별이 되어 숨어 있을까』, 『잔꽃풀도 흔들리고』, 『바다색이 넘실거리는 길을 따라가면』, 『그대 내 속에서 피어 밤이슬로 반짝인다』 등이 있다. 저서로는 『삶을 가꾸는 요가 산책』, 공저 『스마트폰 활용 지도사 2급』 외 2권이 있다. 강진고을신문 논설주간, 시 창작교실, 디카시 창작교실, 인문학 강사, 국전작가, 연극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초승달

초승달
야생화
꽃의 발견
그늘
붉어지는 것들
비의 맛
손가락 접시꽃
꽃의 내면
어둠이 밀려오며 더 빛나는 바다
붉은 꽃
하얀 민들레
새우란
산문산 진달래
여운
동백꽃
노을이 주는 주소는 깊다
덜어냄으로
가만히 머무는 것들
오늘


제2부 숲의 요정

숲의 요정
접시꽃 유월
담쟁이
쏟아지는 잠
중심
시인의 자리
마침내
기억 속 미소
시인
날씨의 그리움
섬의 길
남겨둔 온도
사진 한 장
그 여름
눈 위의 시선
풀잎의 소리
빛, 한 조각
가을의 이름 속에서
가슴
입술
꽃살문


제3부 풍경

풍경
연
몽돌해변
가우도
신호등에 그리고 신호등에
새만금 수평선
몸이 깊어진 시간
같이 서 있던 언어
생명체
노란 그리움
정전기
흔적
커피숍
바다의 빛 장보고
참치 통조림
조립
덜어냄으로
일 년에 한 번
쌓아 올린 시작점


제4부 여행자의 성

여행자의 성
뱃길
나뭇가지 끝의 잎 하나
새의 소리
밤의 소리
소리를 본다
판소리
끝나지 않는 색
겨울의 그림
차창 밖의 그림
속삭이는 그림
먹을 갈다
여운
그려내는 비
흔적
하루 목적지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발자국
손끝의 표현
곁에

작품론 | 사람의 마음이 머물다 간 자리들 / 강경호

출판사 서평

작품론

사람의 마음이 머물다 간 자리들


강 경 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1.
정관웅 시인의 시집 『붉어지는 것들』은 시인의 인식체계, 즉 시적 프리즘을 통해 내뿜는 다양한 시의 색채를 보여준다.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고, 여성과 노인이라는 우리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거나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편들을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 한켠에는 역사적 위인을 등장시켜 영웅화시키지 않고 세계를 잇는, 변환을 이끈 인물로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그의 시에서 주목할 점은 침묵이 겸손이 아니라 발화를 통해 소통하고 응답하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정관웅 시인의 시는 비교적 사물과 세계의 미세한 부분에 관한 새로운 인식태도를 발견하는 데 능숙하다. 그리고 도시적 모더니티보다 자연을 통해 시적 발화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커피숍」 같은 경우에서는 빛과 향기, 손놀림, 정적, 시간의 길이만으로 인물들의 관계를 그려내는, 정관웅 시인에게는 매우 낯선 도시적 감각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해 밝히는 견해를 통해 시론적 자기성찰, 그리고 시인에 대한 냉정한 인식 태도를 잘 형상화한 시편들도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보듯 이 시집을 관통하는 시세계를 보여주는 시편들을 살펴본다.

2. 검은 바닥에서 피어내는 내면의 색

검은 바닥 위
점 하나 흔들림

흩어진 원(圓)
가벼운 그림자 밀려난다

낮게 깔린 공기 속에서
불꽃의 마지막 호흡이
얼음처럼 식어간다

그 잿빛 틈새에서
늦게 피어오르는 붉음은
아무에게도 기울지 않는
내면의 동백꽃 같다
- 「꽃의 내면」 전문

‘꽃의 내면’이라는 시제는 꽃 속의 심층이 아니라, 재 속에서 겨우 남은 색채를 향한 이름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짧은 작품이지만 검은 바닥-불꽃-잿빛-붉음-동백으로 이어지는 이미지가 밀도 있게 배치되어 있다. 설명보다는 명사 중심의 구문(“검은 바닥 위/ 점 하나 흔들림”, “잿빛 틈새”, “내면의 동백꽃”)으로 화면을 찍어내듯 제시해, 시가 ‘생각’보다 ‘장면’으로 먼저 다가오게 만드는 힘이 크다.
특히 이 작품은 등장하는 시적 대상이 인물, 또는 감정이 아니라 검은 면과 흔들리는 점(點)이다. 이 점은 “흩어진 원(圓)”으로 확장된다. 원은 본래 둥근 도형이지만, 여기에서는 흩어져 형태를 잃는다. 중심이 사라진 자리에서 “가벼운 그림자”가 밀려난다. 이 장면 위로 “낮게 깔린 공기”가 도입되고, 그 속에서 “불꽃의 마지막 호흡”이 “얼음처럼 식어간다”. 얼음처럼 식는 불꽃의 이미지는 열기의 정점보다 사라져가는 끝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준다.
이제 장면은 “잿빛 틈새”로 옮겨간다. 불꽃이 꺼져 남은 재의 틈에서 “늦게 피어오르는 붉음”이 드러난다. 붉음은 “아무에게도 기울지 않는/ 내면의 동백꽃 같다”. 동백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아니라, 재 속에서 피어오르는 붉음이다. “아무에게도 기울지 않는”이 함의하는 것은 타자의 시선이나 인정에 기대지 않은 상태이다. 불꽃의 마지막 호흡, 잿빛, 틈, 늦게 떠오르는 붉음, 내면의 동백꽃, 이러한 연쇄 속에서 한 개인의 감정은 선언이나 고백으로 나타나지 않고, 불꽃과 재와 꽃의 색채로만 제시된다.
이 작품은 검은 바닥과 잿빛 사이에서 겨우 떠오른 붉은색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며, 한 내면의 자기 색깔을 가지기까지 지나야 했던 소멸과 식음, 밀려남과 잔존의 과정을 압축한다.

3. 병과 시선, 그리고 관음의 손

앓고 있는 건 이름뿐만이 아니다
묻어온 시선도 있다

말이 되지 못한
한숨 같은 처녀 초승달 하나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지나간 흔적 속에
홍역의 상처로 붉은 연꽃 한 송이 피었다

정한수처럼 가느다랗게 떨며
달빛에 젖은 눈물로 몸을 녹이는 시간
한 손은 땅을 쓰다듬고
다른 손은 허공의 문을 어루만지는
관음의 손들이
아린 땅의 발자국 위로
새벽빛을 속삭이며 만지고 있다
- 「초승달」 전문

이 작품은 아픔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상처에 솟은 꽃과 그 꽃을 감싸는 손의 움직임만을 보여주면서 고통을 둘러싼 관조와 돌봄의 자세를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 “앓고 있는 건 이름뿐만이 아니다/ 묻어온 시선도 있다”라는 진술에서 보듯 질병·상처에 대한 내적 서사를 곧장 ‘타자의 시선’으로 확장시킨다. 초승달-홍역 상처-붉은 연꽃-관음의 손으로 이어지는 종교·신화적 코드가 무리 없이 자연스러운 이미지 흐름에 흡수되며, 도식적 상징의 시가 되지 않는 점은 시를 이끌어가는 시인의 관점이 참신하기 때문이다.
초승달은 “말이 되지 못한/ 한숨 같은 처녀 초승달”이다. 말이 되지 못한 초승달은 고통과 연결되고, 이 초승달은 “가슴 깊은 곳으로 지나간 흔적 속에/ 홍역의 상처로 붉은 연꽃 한 송이” 피워 올린다. 몸이 앓아 겪은 상처와 그 상처에서 돋아난 감정이 붉음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하나의 장면으로 묶인다. 이어서 시선은 손으로 옮겨간다. “정한수처럼 가느다랗게 떨며/ 달빛에 젖은 눈물로 몸을 녹이는 시간” 위에 “한 손은 땅을 쓰다듬고/ 다른 한 손은 허공의 문을 어루만지는/ 관음의 손들”이 배치된다. 한 손이 땅을 어루만지고 다른 손이 허공의 문을 만지는 이 형상은, 고통과 위안을 동시에 향하는 몸의 자세를 보여준다. 손은 땅과 하늘, 육체와 초월, 현재와 다른 차원을 동시에 더듬는다.
이 손들의 아래에서 “아린 땅의 발자국”이 새벽빛의 속삭임을 받는다. 초승달, 홍역의 상처, 붉은 연꽃, 정한수, 관음의 손, 새벽빛, 이 연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병은 통증의 사건을 넘어 땅과 몸, 눈물과 기도가 만나는 지점이 된다.
이 작품은 정관웅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자주 보이는 ‘노인·고통·가난·노동’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 초승달과 관음의 손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미리 보여준다.

4. 여성의 생애와 꽃의 기억

맑은 바람결에 접시꽃이 흔들려
진홍빛 그 모습 그렸던 아침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리를 방아 찧어 밥솥에 삶아서
소쿠리에 퍼담아 걸어두었다. 일은 거기서 다시 시작되었다
김을 파래와 구별하여 놓아두는 일이 시작된다
손길은 얼음으로 동여맨 매서운 바람이다
아침이 오기도 전에 바다로, 들로 발길이 멈추는 일이 없다
때로는 수많은 수면이 필요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외동딸로 태어나 결혼을 하여
시할아버지, 시부모님, 시동생 칠 남매
그리고 이어지는 세월 속에 일곱이나 되는 아들과 딸을 키우는
장남 가족의 큰며느리의 역할이었다
언제나 시간이 똑똑 떨어져 밤이슬이 되어도
이랑 길에 어두운 그림자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날 침상에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고
앙상한 몸에는 잔주름으로 쌓여있다 가죽만 있는 모습은
어두운 그림자로 참새 깃털 같은 이불 하나 간신히 덥혀 있다
누군가의 옛 추억들을 읽어가는 모습에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산소 호흡기만 소리 내어 공기를 흔들고 빛은 떨어져 가고
젊었을 때 모습은 그곳에 없다. 분명 있었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성스러운 마음으로 피우던 접시꽃은 이제 그 접시꽃이 아니었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로제트 상태로 겨울을 견디어 내고
이듬해 무성하게 줄기를 곧게 뻗어 잎사귀 사이에서
꽃을 피웠던 꽃이 아니었다

코로 음식을 먹는, 뼈로만 그려진 어머니는 느린 손가락으로
시간을 놓으려 만지고 있다
손가락 접시꽃은
- 「손가락 접시꽃」 전문

서사구조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어머니의 지난한 생애를 접시꽃의 생태적 특성을 빌어 노래하였다. “맑은 바람결에 접시꽃이 흔들려/ 진홍빛 그 모습 그렸던 아침”이라는 기억으로 시작되는데 새벽 노동의 장면으로 어머니의 삶을 구체화한다. 보리를 방아에 찧어 밥솥에 삶고, 소쿠리에 퍼담아 걸어두는 일, 파래와 김을 구별하는 일, 아침이 오기도 전에 바다와 들을 오가는 발길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듯 외동딸이면서도 큰며느리, 칠남매의 어머니, 노동의 연속으로 점철된 고단한 삶을 형상화시켰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제 침상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다. “참새 깃털 같은 이불 하나”에 덮인 채 앙상한 형체,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연명하고 있는 처지이다. “젊었을 때 모습은” 사라지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피우던 접시꽃”은 이제 그 접시꽃이 아니다. 겨울은 견디고, 다시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우던 식물의 생애와 노동으로 이어진 어머니의 생애를 동일시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꽃은 정원의 장식이 아니라 어머니 인생을 은유하는 시적 상관물로 나타난다.
병상의 어머니는 “코로 음식을 먹는, 뼈로만 그려진” 시간을 견디고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느린 손가락으로/ 시간을 놓으려 만지고 있다.” 손가락이 시간을 만지고 놓으려 하는 행위 속에서 그동안 붙들고 있었던 삶을 천천히 내려놓는 제스처를 보인다.
이 시편은 농촌 여성의 생애사, 가족 구조, 노동과 늙음, 생명과 식물의 시간을 세밀하고 내밀하게 병치시키면서, 접시꽃이라는 이름을 깊고 무거운 상징으로 바꾸어 놓는다.

5. 겨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새벽을 밝고 가며
손끝이 시려서 하얀 입김으로 녹인 노인을 본다
지상에서 쫓겨난 몸으로 손수레를 끌고 가는 길이다
그에게도 한때 넓은 강폭의 청춘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내 몸안의 무지개가 사라지고
소나무 껍질 같은 거친 살결이 등고선을 그리며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보다 못한 시간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흰 머리칼이 찬 바람에 쏠리고
고요밖에는 아무 소식도 없다
입에서 나온 하얀 입김이 싸락눈이라도 되어
뿌렸으면 좋겠다
올려면 소복히 쌓여서 들녘 위를 덮지
길을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