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기유:조선학자의눈에비친열하와북경』소개
『열하기유(熱河紀遊)』는서호수가1790년(정조14)청나라건륭제의팔순만수절진하사의부사로서열하와북경을다녀오며중요한사건과견문을기록한연행일기다.
이책에서서호수는만주족이지배하던청나라의현실을있는그대로보고분석하려는치밀한시선을견지한다.그는연행중거쳐간지역의연혁과당시수비병력등의현황을세밀하게기록하고고증하였다.또한청조의인물이나몽골,베트남,티베트등외국사절과의교류에도적극적인모습을보이며,외국의지리와풍속에도관심을갖고기록하는등조선외교관으로서의면모도드러낸다.특히궁중극장에서관람한당시청나라궁중연극을기록하여귀중한자료를남겼다.
또한천문학자이자수학자로서청에소개된서양과학에도큰관심을보였다.그는청에머물고있는서양선교사를방문하여학문적대화를나누고,마테오리치의무덤을찾아상우(尙友)의감회를표출하였다.
이처럼그의연행기는당시동아시아국제정세를보여주는역사적기록일뿐아니라,18세기동서양의문물이만나새로운싹을틔우는모습을보여주는교류의문화지(文化誌)이기도하다.
『열하기유』내용
18세기기행의시대에탄생한서호수의‘청나라문화유산답사기’
제목만보고서는‘박지원의열하일기?’라고생각할지모르겠다.그‘열하’가맞긴맞다.조선의230여년연경행역사중열하를다녀온것은1780년과1790년단두번뿐이었는데,박지원은1780년에열하를다녀온후『열하일기』를저술했으며,서호수는1790년에열하를다녀온후『열하기유』를남겼다.
한자문화권에서는시(時)와함께문(文)으로서는사실을말하는실기류(實記類)의산문들이존중되는전통이강했다.기행문이나일기류는이런산문의전통에따라발전했는데,일찍이신라승려혜초가727년에완성한『왕오천축국전』만으로도1,300년가까이된우리나라기행문학의역사를확인할수있다.이후삼국과고려를거쳐조선시대에도유람과기행을글로남기는전통은계속돼왔는데,특히조선시대에는명나라와청나라,일본으로오가는사행(使行)단이한해에도천여명씩있어서,그체험을쓴사행일기문학이풍부해졌다.
중국사절단의체험은조선시대에만500편이상의연행록으로남아전해지고있고,일본으로오간통신사일기또한수십편에이른다.조선시대에는해마다세차례이상사절단이중국여행길에올랐고,연경에갔던선비들대부분이기행문을남겼다.조선시대의말엽에나온『연원직지』에서김경선은수많은연행록중에서김창업의『노가재연행일기』,홍대용의『담헌연기』,박지원의『열하일기』를‘북경기행문의삼가(三家)’라고평가했다.흥미로운점은이들이모두18세기의인물이라는점으로,18세기에는이외에도수많은연행기가탄생했다.이처럼연행사와통신사가활발했던동아시아뿐만아니라당시서양도대항해시대,그랜드투어의시대가절정으로치닫고있으니,18세기는그야말로만개한‘여행의시대’였다고할수있겠다.
18세기기행의시대에탄생한서호수의『열하기유』는당시절대권력으로서의중국,서양과의관계등동아시아국제정세를보여주는역사적기록일뿐아니라,18세기동서양의문물이만나새로운싹을틔우는모습을보여주는교류의문화지(文化誌)이기도하다.방문한지역의지세,연원,역사적인사건들을자세히기록한서호수못지않게역해자인서울대중문과이창숙교수가자세한평설을덧붙임으로써열하기유는현대판‘청나라문화유산답사기’로재탄생했다.
『열하일기』와『열하기유』
박지원의『열하일기』와서호수의『열하기유』는각각청나라건륭제의칠순(1780년)과팔순(1790년)생일의사절단으로서다녀온체험을기록한것으로,10년이라는세월의차이를제외하고는사행의목적과시기가같고,방문한곳또한북경과열하로같다.사절단으로서는처음으로열하를방문했다는것때문에당시에주목을받았고,그의명성과유려한필치덕분에현재까지도열하기행문으로는박지원의『열하일기』가널리알려져있다.
형식면에서『열하기유』는일기체저술로,주로그날있었던일을기록하고관련문헌을인용해자신의견해를덧붙였다.『열하일기』는그형식과내용에따라일기체로쓴기행문과그렇지않은글로이루어져있다.대체로주제에따라글을나누고제목을붙였는데북경과열하로이동하는여정은주로일기체로썼다.나머지글들은다양한형식과내용으로기술했는데물건이나장소,인물등에대해백과사전식으로서술한글도있고,「허생전」과「호질」같은소설도있다.
내용면에서는둘다꼼꼼한기록을남기고있으나,당시실학에심취하고이용후생에관심을기울였던연암의경우여행중견문한청나라의문물과삶의모습을바탕으로이용후생에대한자신의견해를다양한필치로피력하였다.반면서호수가사행을나섰던1790년에는이미북학의논의가무르익었고박제가와유득공을수행원으로데려갈만큼북학파와도사이가가까웠지만『열하기유』에는북학논의는잘보이지않는다.대신만주족청나라의현실을있는그대로분석하는치밀한시선이돋보인다.물론서호수도전형적인조선의성리학자였지만이미대명의리론에만매여있지는않았다.만주족이중원에들어가이룩한번영과평화의실상을목도하고,그가치를인정하는데조금도주저하지않았다.
박지원이청조의대내외정치적상황을주의깊게살피고,대명의리론을고집하는조선관료들에대해일침을가하는등정치적견해를강하게드러내고있다면,서호수는사실기술에더집중한다.특히자신의전공분야인천문,역산,악률에대한내용이자세하게기록되어있다.또한열하와북경에서매일관람했던연극에대한기록또한큰가치가있다.
조선최고의과학자서호수에게연행은배움과물음의길이었다
서호수(1736~1799)는조선후기영·정조때육조판서를모두,그것도여러번지낸엘리트관료다.서호수의가문은북학파의시조로일컬어지는부친서명응과『임원경제지』를편찬한아들서유구등3대에걸쳐과학·농학서적편찬을비롯한여러업적을쌓은과학기술자집안이다.우리에게는장영실이나홍대용만큼잘알려지지는않았지만,서호수역시조선최고의과학자중한명이다.
서호수는세종이후또한번의과학기술부흥기였던영·정조시기에정부의공식적인천문역산학을정리하고,중국을통해서들어온서양의수학및천문학이론을연구검토함으로써조선후기천문역산의기반을탄탄하게한인물이다.구체적으로는조선400여년간의천문현상기록을수집해서정리해《국조역상고》를편찬하고,밤과낮의시각과절기를정확하게계산해냈으며,두개의해시계를하나의돌에새겨놓은간평일구·혼개일구를창제했다.2016년에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선정한‘대한민국대표과학자31인’에포함될정도로인정받은과학자였다.
『열하기유』에드러난생각들로미루어볼때,그는오늘날의자연과학적기초를충분히갖추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서양선교사와천문학을두고나눈대화를봐도당시까지중국에소개된서양천문학지식을잘파악하고있었음이나타난다.서호수는과학지식을배우려는열정못지않게외교관으로서의임무에도열의를다한다.몽골,베트남,티베트,라오스등연회에참석한외국사신들을부지런히찾아다니며대화를나누고귀기울이는가하면방문한지역의지세,연원,역사적인사건들을자세히기록한다.그의연행은학자로서배움과물음의길이기도했다.
서호수『역상고성후편』의일전과월리,교식(交食)은이미타원의방법을썼으니오성(五星)의본천도타원이라고보아야합니다.그러나금성,수성두별의본천과태양의본천은같아서당연히일전타원법(?圓法)을따라야하고,토성,목성두별은지구에서거리가매우멀어본천이거의항성본천과같으니타원법을쓸필요가없습니다.오직화성(본천)은혹은태양의본천밖에있고혹은태양의본천안에있어변동이무상한데,화성이태양의본천안에있을때화성과지구의거리와태양과지구의거리는100대266이됩니다.이는화성본천이태양본천보다더낮을때가있어서태의타원법(?圓法)으로계산하여자료표를얻을수있습니다.이미측량한것이있는지모르겠습니다.
탕사선합하께서는정심한경지의이면까지보셨습니다.화성차륜반경의이치는과연이해하기어려우니그까닭은본천이정원(正圓)이될수없으므로타원법을이용하여자료를구해야하지만아직추산한것이없습니다.(본문295-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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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수귀국의강역은동으로는바다에이르고서로는노과(老?,라오스)와연접하였으며,남으로점성(占城)과통하고북으로는광서(廣西),운남(雲南)과이어졌으니국내의성(省)과부(府)는얼마나됩니까?
반휘익동서가1700여리,남북이2800여리이며지금16도(道)로나뉘어있습니다.
서호수귀국은천정(天頂)이적도(赤道)에가까워서기후는항상덥고,곡식은1년에두번씩익는다고하는데그렇습니까?
반휘익그렇습니다.
서호수곽향(藿香),육계(肉桂)는귀국에서생산되는것이품질이좋다고하는데그러합니까?
반휘익곽향은광서(廣西)에서나는것이품질이좋고,육계는우리나라에서나는것이과연품질이좋습니다.그러나계피는반드시청화(淸化)지방에서채취하는데,근래에는여러번전화(戰禍)를겪어서경내의계림(桂林)이다유린돼버렸습니다.그래서좋은산품을얻기는매우어렵습니다.
조선과안남의사신은서로상대국의기본적인정보는대략파악하고있었다.조선과안남은한나라무제(武帝)이후중국을중심으로짜인동아시아의국제질서속에서가장비슷한처지의두나라였다.어쩌면세계사속에서이란성쌍둥이라고불러도좋을만큼두나라의역사는중국을상대하면서거의같은궤도를달려왔다.(본문174-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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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안남은관복이비슷하다.1790년의안남사신은청나라에서준만주족의옷을입었다.서호수는그점을지적한다.
안남사신은머리칼을묶어뒤로드리우고오사모(烏紗帽)를쓰며,소매넓은홍포(紅袍)를입고,금과대모로장식한띠를매고검은가죽신을신어서우리나라의의관과비슷한데가많다고들었다.이제보니그군신(君臣)이다만주의의관을따르되머리는깎지않았다.내가괴이하게여겨반휘익에게물었다.
“귀국의의관은본래만주와같습니까?”
반휘익이말하였다.
“황상께서우리임금의친조를가상히여겨특별히수레와의관을하사하고,또배신(陪臣)들에게까지주셨습니다.그러나또한왕의말씀을받들어경사에서조회와제사에참예할때는본국의관을사용하고,본국으로돌아가면도로본국의관을착용하기로하였습니다.이의관은한때입을뿐입니다.”
말이자못또록또록하고,낯에는부끄러운빛이있었다.
건륭은안남왕이직접입조하여체면을세워주었으므로만주족의복식을주었다.열하에서잔치에참여할때는만주옷을입고,북경과본국에서는다시본국의의관을착용하도록허락하였다.이사실을하나하나분명히밝혀서조선사신에게해명하면서도남의옷을입은부끄러움은감출수없었던모양이다.(본문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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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수는이날일기에청나라신하들이황제에게바친생일선물을세밀하게기록하였다.
(중략)새벽에근정전문앞에서내무부의관원이어느순무(巡撫)가바친물품의목록을펼쳐읽는데,30여종이다금옥(金玉)과기완(奇玩)이다.끝에는“노재(奴才)아무개는공손히바칩니다.”라고썼다.아마만주의풍속은임금과신하사이에‘신(臣)’이라고일컫지않고‘노재(奴才)’라고일컫는듯하다.또보니서장국(西藏國)에서금불12좌를바쳐출입현량문(出入賢良門)밖에진열하였고,성경장군(盛京將軍)이바친80수레의각종물품은원명원문밖에진열하여놓았다.(중략)
건륭제의80세생일잔치는인류역사상최대의잔치였음에분명하다.전국각지에서각층신민이바친선물이황궁에산더미처럼모이고,자금성서화문(西華門)에서원명원에이르는20리연도의양쪽에는임시건축물을연이어설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