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기유 (조선 학자의 눈에 비친 열하와 북경 | 양장본 Hardcover)

열하기유 (조선 학자의 눈에 비친 열하와 북경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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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열하기유』에서 서호수는 만주족이 지배하던 청나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분석하려는 치밀한 시선을 견지한다. 그는 연행 중 거쳐 간 지역의 연혁과 당시 수비 병력 등의 현황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고증하였다. 또한 청조의 인물이나 몽골, 베트남, 티베트 등 외국 사절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외국의 지리와 풍속에도 관심을 갖고 기록하는 등 조선 외교관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낸다. 특히 궁중 극장에서 관람한 당시 청나라 궁중 연극을 기록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이처럼 그의 연행기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일 뿐 아니라, 18세기 동서양의 문물이 만나 새로운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류의 문화지(文化誌)이기도 하다.
저자

이창숙

역자 이창숙(李昌叔) (역해)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같은 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고전희곡을 전공하여 원잡극을 비롯한 청대의 궁중 연극 등 중국 고전극 전반을 연구하고 있다. 『모란정(牡丹亭)』 등 중국 희곡의 명작과 조선시대의 한문 희곡 『북상기(北床記)』(공역)를 번역·해설하여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두보(杜甫) 시의 역주와 해설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연행록을 중심으로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의 교류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목차

해제 9
열하기유서(熱河紀遊序) 23
1권 진강성(鎭江城)에서 열하(熱河)까지 29
2권 열하(熱河)에서 원명원(圓明園)까지 143
3권 원명원(圓明園)에서 연경(燕京)까지 243
주석 399
참고문헌 416
찾아보기 421

출판사 서평

『열하기유: 조선 학자의 눈에 비친 열하와 북경』 소개

『열하기유(熱河紀遊)』 는 서호수가 1790년(정조 14)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 만수절 진하사의 부사로서 열하와 북경을 다녀오며 중요한 사건과 견문을 기록한 연행일기다.
이 책에서 서호수는 만주족이 지배하던 청나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분석하려는 치밀한 시선을 견지한다. 그는 연행 중 거쳐 간 지역의 연혁과 당시 수비 병력 등의 현황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고증하였다. 또한 청조의 인물이나 몽골, 베트남, 티베트 등 외국 사절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외국의 지리와 풍속에도 관심을 갖고 기록하는 등 조선 외교관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낸다. 특히 궁중 극장에서 관람한 당시 청나라 궁중 연극을 기록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또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로서 청에 소개된 서양 과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청에 머물고 있는 서양 선교사를 방문하여 학문적 대화를 나누고, 마테오리치의 무덤을 찾아 상우(尙友)의 감회를 표출하였다.
이처럼 그의 연행기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일 뿐 아니라, 18세기 동서양의 문물이 만나 새로운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류의 문화지(文化誌)이기도 하다.

『열하기유』 내용

18세기 기행의 시대에 탄생한 서호수의 ‘청나라 문화유산답사기’

제목만 보고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열하’가 맞긴 맞다. 조선의 230여 년 연경행 역사 중 열하를 다녀온 것은 1780년과 1790년 단 두 번뿐이었는데, 박지원은 1780년에 열하를 다녀온 후 『열하일기』를 저술했으며, 서호수는 1790년에 열하를 다녀온 후 『열하기유』를 남겼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시(時)와 함께 문(文)으로서는 사실을 말하는 실기류(實記類)의 산문들이 존중되는 전통이 강했다. 기행문이나 일기류는 이런 산문의 전통에 따라 발전했는데, 일찍이 신라 승려 혜초가 727년에 완성한 『왕오천축국전』만으로도 1,30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기행 문학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삼국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유람과 기행을 글로 남기는 전통은 계속돼왔는데, 특히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와 청나라, 일본으로 오가는 사행(使行)단이 한 해에도 천여 명씩 있어서, 그 체험을 쓴 사행 일기 문학이 풍부해졌다.

중국 사절단의 체험은 조선시대에만 500편 이상의 연행록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고, 일본으로 오간 통신사 일기 또한 수십 편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세 차례 이상 사절단이 중국 여행길에 올랐고, 연경에 갔던 선비들 대부분이 기행문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말엽에 나온 『연원직지』에서 김경선은 수많은 연행록 중에서 김창업의 『노가재 연행일기』, 홍대용의 『담헌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북경 기행문의 삼가(三家)’라고 평가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모두 18세기의 인물이라는 점으로, 18세기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연행기가 탄생했다. 이처럼 연행사와 통신사가 활발했던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당시 서양도 대항해 시대, 그랜드 투어의 시대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으니, 18세기는 그야말로 만개한 ‘여행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다.

18세기 기행의 시대에 탄생한 서호수의 『열하기유』는 당시 절대권력으로서의 중국, 서양과의 관계 등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일 뿐 아니라, 18세기 동서양의 문물이 만나 새로운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류의 문화지(文化誌)이기도 하다. 방문한 지역의 지세, 연원, 역사적인 사건들을 자세히 기록한 서호수 못지않게 역해자인 서울대 중문과 이창숙 교수가 자세한 평설을 덧붙임으로써 열하기유는 현대판 ‘청나라 문화유산답사기’로 재탄생했다.

『열하일기』와 『열하기유』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서호수의 『열하기유』는 각각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1780년)과 팔순(1790년) 생일의 사절단으로서 다녀온 체험을 기록한 것으로, 1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사행의 목적과 시기가 같고, 방문한 곳 또한 북경과 열하로 같다. 사절단으로서는 처음으로 열하를 방문했다는 것 때문에 당시에 주목을 받았고, 그의 명성과 유려한 필치 덕분에 현재까지도 열하 기행문으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형식 면에서 『열하기유』는 일기체 저술로, 주로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관련 문헌을 인용해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열하일기』는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일기체로 쓴 기행문과 그렇지 않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로 주제에 따라 글을 나누고 제목을 붙였는데 북경과 열하로 이동하는 여정은 주로 일기체로 썼다. 나머지 글들은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기술했는데 물건이나 장소, 인물 등에 대해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한 글도 있고, 「허생전」과 「호질」 같은 소설도 있다.

내용 면에서는 둘 다 꼼꼼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당시 실학에 심취하고 이용후생에 관심을 기울였던 연암의 경우 여행 중 견문한 청나라의 문물과 삶의 모습을 바탕으로 이용후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양한 필치로 피력하였다. 반면 서호수가 사행을 나섰던 1790년에는 이미 북학의 논의가 무르익었고 박제가와 유득공을 수행원으로 데려갈 만큼 북학파와도 사이가 가까웠지만 『열하기유』에는 북학 논의는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만주족 청나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치밀한 시선이 돋보인다. 물론 서호수도 전형적인 조선의 성리학자였지만 이미 대명의리론에만 매여 있지는 않았다. 만주족이 중원에 들어가 이룩한 번영과 평화의 실상을 목도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박지원이 청조의 대내외 정치적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고, 대명의리론을 고집하는 조선 관료들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등 정치적 견해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서호수는 사실 기술에 더 집중한다. 특히 자신의 전공 분야인 천문, 역산, 악률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열하와 북경에서 매일 관람했던 연극에 대한 기록 또한 큰 가치가 있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서호수에게 연행은 배움과 물음의 길이었다

서호수(1736~1799)는 조선후기 영·정조 때 육조 판서를 모두, 그것도 여러 번 지낸 엘리트 관료다. 서호수의 가문은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부친 서명응과 『임원경제지』를 편찬한 아들 서유구 등 3대에 걸쳐 과학·농학 서적 편찬을 비롯한 여러 업적을 쌓은 과학기술자 집안이다. 우리에게는 장영실이나 홍대용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서호수 역시 조선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이다.

서호수는 세종 이후 또 한 번의 과학기술 부흥기였던 영·정조 시기에 정부의 공식적인 천문역산학을 정리하고,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의 수학 및 천문학 이론을 연구 검토함으로써 조선 후기 천문역산의 기반을 탄탄하게 한 인물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 400여 년간의 천문현상 기록을 수집해서 정리해 《국조역상고》를 편찬하고, 밤과 낮의 시각과 절기를 정확하게 계산해냈으며, 두 개의 해시계를 하나의 돌에 새겨놓은 간평일구·혼개일구를 창제했다. 2016년에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과학자 31인’에 포함될 정도로 인정받은 과학자였다.

『열하기유』에 드러난 생각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기초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 선교사와 천문학을 두고 나눈 대화를 봐도 당시까지 중국에 소개된 서양 천문학 지식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서호수는 과학 지식을 배우려는 열정 못지않게 외교관으로서의 임무에도 열의를 다한다. 몽골, 베트남, 티베트, 라오스 등 연회에 참석한 외국 사신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귀 기울이는가 하면 방문한 지역의 지세, 연원, 역사적인 사건들을 자세히 기록한다. 그의 연행은 학자로서 배움과 물음의 길이기도 했다.

서호수 『역상고성후편』의 일전과 월리, 교식(交食)은 이미 타원의 방법을 썼으니 오성(五星)의 본천도 타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금성, 수성 두 별의 본천과 태양의 본천은 같아서 당연히 일전 타원법(?圓法)을 따라야 하고, 토성, 목성 두 별은 지구에서 거리가 매우 멀어 본천이 거의 항성 본천과 같으니 타원법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화성(본천)은 혹은 태양의 본천 밖에 있고 혹은 태양의 본천 안에 있어 변동이 무상한데, 화성이 태양의 본천 안에 있을 때 화성과 지구의 거리와 태양과 지구의 거리는 100대 266이 됩니다. 이는 화성 본천이 태양 본천보다 더 낮을 때가 있어서 태의타원법(?圓法)으로 계산하여 자료 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미 측량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탕사선 합하께서는 정심한 경지의 이면까지 보셨습니다. 화성 차륜 반경의 이치는 과연 이해하기 어려우니 그 까닭은 본천이 정원(正圓)이 될 수 없으므로 타원법을 이용하여 자료를 구해야 하지만 아직 추산한 것이 없습니다. (본문 295-297쪽)

***
서호수 귀국의 강역은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노과(老?, 라오스)와 연접하였으며, 남으로 점성(占城)과 통하고 북으로는 광서(廣西), 운남(雲南)과 이어졌으니 국내의 성(省)과 부(府)는 얼마나 됩니까?
반휘익 동서가 1700여 리, 남북이 2800여 리이며 지금 16도(道)로 나뉘어 있습니다.
서호수 귀국은 천정(天頂)이 적도(赤道)에 가까워서 기후는 항상 덥고, 곡식은 1년에 두 번씩 익는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반휘익 그렇습니다.
서호수 곽향(藿香), 육계(肉桂)는 귀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품질이 좋다고 하는데 그러합니까?
반휘익 곽향은 광서(廣西)에서 나는 것이 품질이 좋고, 육계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과연 품질이 좋습니다. 그러나 계피는 반드시 청화(淸化) 지방에서 채취하는데, 근래에는 여러 번 전화(戰禍)를 겪어서 경내의 계림(桂林)이 다 유린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좋은 산품을 얻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조선과 안남의 사신은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