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도키아 미술 : 비잔티움 천 년의 기억 - 대우학술총서 645

카파도키아 미술 : 비잔티움 천 년의 기억 - 대우학술총서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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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미술사학의 미개척지 카파도키아 현장 연구

‘마케도니아 르네상스’ 문화예술의 증거이자
비잔티움 교회와 교리에 대한 시각적 응답
이 책은 비잔티움 제국 시기의 카파도키아에서 전개된 예술의 면모를 조명한다. 카파도키아 교회의 회화를 초기 발달단계, 성화상 논쟁과 마케도니아 르네상스, 위기의 시대,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문화 접변이라는 주제로 나누어 시기별 주요 도상(圖像)의 기원과 의미, 역할을 살폈다. 특히 카파도키아의 비잔티움 교회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대상으로, 각 도상의 해석, 조형적 요소의 기원과 의미, 그 변화 양상, 교회 내부 장식에서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의 관계와 의미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설명했다. 또한 이슬람과의 문화 접변으로서 어떻게 비잔티움 미술이 변용 혹은 재창조되는가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마지막 장에서 다루었다.
이 책의 저자 조수정 교수는 석사와 DEA, 박사 논문 모두 이 지역의 회화를 주제로 삼았으며 현재도 이 지역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있을 정도로 국내 카파도키아 연구의 권위자이다. 특히 저자는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재학하던 시절 카파도키아 비잔티움 교회 연구팀의 일원으로서 여러 차례의 현지 조사와 학술 활동에 참여했다. 이 책은 현재까지 알려진 이 지역의 중요한 교회를 대상으로 하며,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도 저자의 개인 연구로 보충했다. 또 2000년도부터 카파도키아 지방 답사 결과를 토대로 비잔티움 교회의 목록을 부록으로 첨부했다. 국내에서는 카파도키아가 여전히 미술사학의 미개척지임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보기 드문 주제에 귀한 현장 연구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비잔티움 교회미술의 보고, 카파도키아 미술
비잔티움 제국에서 마케도니아 왕조기-이슬람 지배기의 변천 살펴

카파도키아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부터 교회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4세기경에는 카이사레아의 성 바실리우스와 니사의 성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저명한 교부(敎父)들이 활동했던 곳으로서 그리스도교 성지로 이름이 높았던 지방이다. 이렇게 많은 은수자들이 모여들어 수도원 밀집 지역을 이루었기에 카파도키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보다 더 활발하게 교회미술이 전개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비잔티움 교회는 화산활동으로 생긴 바위산을 깎아 만든 암혈 건물이라는 건축적 특성과 대도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외딴곳에 세워진 지리적 특성 때문에 후대의 파괴를 모면할 수 있었고, 상당히 많은 수의 교회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또한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암혈 교회라는 특징 덕분에 프레스코화들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을 수 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내부를 그림으로 장식한 교회는 300개가 넘으며, 장식이 없는 단순한 교회를 합하면 교회의 수는 1,000개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비잔티움 제국 시기 카파도키아의 역사는 미술 양식의 변화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비잔티움 제국 초기부터 성화상 논쟁까지의 시기로, 특히 7세기 초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는 ‘변모의 시기’ 혹은 ‘암흑기’로 불린다. 이 시기는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뿐 아니라 성상파괴주의의 여파로 건축과 회화 등 예술 분야에서 일대 침체기였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성화상 논쟁 시기를 대변하는 독특한 작품들이 남아 있어 당대 성상파괴주의가 교회와 예술에 끼친 영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두 번째는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로 당대 사람들은 이를 ‘제2의 헬레니즘’으로 생각했을 정로도 번영을 누리던 때였다. 종교예술 활동은 절정에 달했는데, 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새로 지어지거나 보수되었고, 다수의 예술품이 제작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카파도키아의 암혈 교회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세 번째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된 시기로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튀르크 정복과 카파도키아의 문화 재생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13세기 동안의 기간이다. 비잔티움의 세력이 약화하는 가운데 1082년 카이사레아가 점령당하는 수난을 겪은 카파도키아는 이후 룸 이슬람 왕조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사회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이 시기의 예술은 카파도키아 지방 전통, 튀르크 문화, 니케아 왕조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비잔티움 제국의 생활상과 종교상이 반영된 카파도키아 미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문화 접변은 유례없는 문화유산 남겨

카파도키아의 프레스코화는 문헌 사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단순히 교회 내부 장식의 기능을 넘어서 건물의 용도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고, 후원자의 역할이나 당시의 정치적·경제적 상황, 카파도키아 지역민의 종교심과 생활상을 알려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카파도키아에서 초기 비잔티움 시기부터 유행했던 도상인 십자가는 당대의 성 십자가 경배 신심과 풍습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건축되었던 성당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성화상 논쟁 시기에는 교회 내부 장식을 위해 양식화된 덩굴 문양 등으로 채워진 바탕 위에 커다란 십자가를 그려 넣는 경우가 많으며, 고전적 모티프인 풍요의 뿔, 포도나무, 석류, 아칸서스, 월계수, 공작 깃털을 장식적으로 변형한 문양을 즐겨 사용했다. 결국 십자가의 형상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다. 당시에 건축된 성당들은 모두 작은 규모이며 내부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그림으로만 장식되어 있어 정치적 혼란이 몰고 온 경제난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로 불리는 9~10세기에 카파도키아 미술은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때 매우 많은 교회가 건립되었고 그 내부도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 시기는 비잔티움 문화예술의 절정기로 알려졌지만 이를 보여주는 자료는 매우 빈약했다. 그런데 카파도키아에는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 풍부하게 남아 있어서, 이러한 자료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사용되던 십자가 도상은 10세기 이후 점차 감소했고, 교회 내부를 십자가로 장식하던 비표상적 문양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바뀌어 수많은 작품이 새롭게 제작되었다. 특히 마케도니아 왕조의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에 힘입어 제국의 변경이었던 카파도키아는 종교적 위상뿐 아니라 군사적·정치적 중요성도 높아지게 되면서 카파도키아 미술은 성경의 다양한 이야기와 성인들은 물론, 당대의 황제와 군인의 초상까지 그리게 되어, 주제 면에서 매우 풍요로워졌다.
카파도키아에서는 11세기 중반까지 매우 많은 성당이 세워졌는데, 수도원 성당이나 개인용 성당이 주를 이루었고, 후원자는 대부분 비잔티움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속하는 평신도들이었다. 후원자의 초상이 카파도키아 지역의 성당 곳곳에 남아 있는데, 때로는 그들의 이름이나 관직 등 부가 사항도 적혀 있어 당대 카파도키아 지역의 생활상과 그리스도교 신심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당 내부장식은 후원자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회화처럼 정교한 신학 체계를 반영하는 도상 체계를 도입하기도 하고, 십자가나 후원자의 초상으로 만족하는 단순한 도상체계를 따르기도 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이 약해진 12세기에 이슬람 세력권으로 편입된 카파도키아에서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으로 전통적 그리스도교 도상이 큰 변화를 겪었다. 이슬람권 정치체제로의 편입이라는 사회의 전 분야에 걸친 근본적인 변모에 따라 이 시기의 예술은 카파도키아 지방 전통, 튀르크 문화, 비잔티움을 계승한 니케아 제국의 영향이 복합된 일종의 문화 접변 현상을 반영한다. 이렇게 하여 새롭게 탄생한 카파도키아의 미술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셀주크 튀르크에 점령된 12세기에는 그리스도의 도상을 지우고 비표상적 문양으로 대체한 흔적도 찾아볼 수 있고, 비잔티움 전사인 성 게오르기우스와 성 테오도루스의 그림에서는 갑옷 위에 걸쳐 입은 망토에 술프린지 장식이 덧붙여져 있고, 말갖춤이 아랍 문자로 꾸며져 있어 당시 점증하던 튀르크 문화의 영향이 드러난다. 또한 이슬람 세력권에 편입된 이후에는 이슬람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는 상황을 반영하듯, 이슬람 문자를 모방한 장식적 모티프가 성당 내부 장식에 사용되었다.
저자

조수정

(趙穗晶)
서강대학교에서불어불문학과종교학을공부하였고,프랑스로건너가리옹대학,스트라스부르제2대학에서고고미술사학전공으로학사와석사학위를취득하였다.파리제1대학에서는졸리베레비(C.Jolivet-Levy)교수의지도로카파도키아의비잔티움교회벽화를연구하여박사학위를취득하였고,비잔티움고고미술사연구소와프랑스학술원산하의비잔티움도서관에서근무하였다.현재대구가톨릭대학교역사교육과교수와박물관장으로재직중이며,경상북도문화재위원으로활동하고있다.중세서유럽과비잔티움의종교와예술,그리고상징과도상학에관련된주제를연구하고있다.저서로「예술적사고와표현」(공저),「천사와비천」(공저),「영원을향한예술」,「비잔티움미술의이해」가있고,비잔티움도상학에관련된다수의논문을발표하였다.

목차


머리말

제1장카파도키아
1.카파도키아의지리적상황
2.카파도키아약사(略史)

제2장초기카파도키아미술
1.십자가도상의발달
2.성에우스타키우스의환시

제3장성화상논쟁이후의카파도키아미술
1.마케도니아르네상스
2.<마예스타스도미니>
3.<데이시스>
4.<아나스타시스>

제4장위기의카파도키아
1.11세기후반의상황
2.이을란르킬리세:괴레메28번성당
3.카파도키아의성인도상

제5장비잔티움과이슬람의문화접변:13세기의카파도키아미술
1.그리스도교전통의수호
2.타틀라른의새로운도상:달덩어리얼굴
3.교회벽화에그려진악마:카르슈킬리세

카파도키아의비잔티움성당목록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비잔티움교회미술의보고,카파도키아미술
비잔티움제국에서마케도니아왕조기-이슬람지배기의변천살펴

카파도키아는초기그리스도교시기부터교회의주요거점중하나였다.4세기경에는카이사레아의성바실리우스와니사의성그레고리우스,나지안주스의성그레고리우스와같은저명한교부(敎父)들이활동했던곳으로서그리스도교성지로이름이높았던지방이다.이렇게많은은수자들이모여들어수도원밀집지역을이루었기에카파도키아는비잔티움제국의변방임에도불구하고다른지역보다더활발하게교회미술이전개되고발전할수있었다.
카파도키아의비잔티움교회는화산활동으로생긴바위산을깎아만든암혈건물이라는건축적특성과대도시로부터멀찍이떨어진외딴곳에세워진지리적특성때문에후대의파괴를모면할수있었고,상당히많은수의교회가오늘날까지남아있다.또한빛이거의들어오지않는암혈교회라는특징덕분에프레스코화들이지금까지선명하게남을수있었다.현재까지알려진바에의하면,내부를그림으로장식한교회는300개가넘으며,장식이없는단순한교회를합하면교회의수는1,000개가넘을것으로추산된다.
비잔티움제국시기카파도키아의역사는미술양식의변화에따라크게세부분으로나뉜다.첫번째는비잔티움제국초기부터성화상논쟁까지의시기로,특히7세기초반부터9세기중반까지는‘변모의시기’혹은‘암흑기’로불린다.이시기는전쟁으로인한재정적어려움뿐아니라성상파괴주의의여파로건축과회화등예술분야에서일대침체기였다.이시기에제작된작품은소수에불과하지만성화상논쟁시기를대변하는독특한작품들이남아있어당대성상파괴주의가교회와예술에끼친영향을가늠하는중요한단서를제공한다.
두번째는마케도니아왕조시기로당대사람들은이를‘제2의헬레니즘’으로생각했을정로도번영을누리던때였다.종교예술활동은절정에달했는데,많은수도원과교회가새로지어지거나보수되었고,다수의예술품이제작되어현재까지남아있다.카파도키아의암혈교회중상당수가이시기에만들어진것이다.
세번째는이슬람의지배를받게된시기로11세기말부터12세기초까지이어지는튀르크정복과카파도키아의문화재생을주요특징으로하는13세기동안의기간이다.비잔티움의세력이약화하는가운데1082년카이사레아가점령당하는수난을겪은카파도키아는이후룸이슬람왕조의일부로편입되면서사회문화적으로큰변화를겪었다.이시기의예술은카파도키아지방전통,튀르크문화,니케아왕조의영향이복합적으로드러난다.

비잔티움제국의생활상과종교상이반영된카파도키아미술
그리스도교와이슬람의문화접변은유례없는문화유산남겨

카파도키아의프레스코화는문헌사료의한계를극복할수있는중요한자료로서,단순히교회내부장식의기능을넘어서건물의용도를짐작하게하는단서가되기도하고,후원자의역할이나당시의정치적·경제적상황,카파도키아지역민의종교심과생활상을알려주기도한다.예를들어,카파도키아에서초기비잔티움시기부터유행했던도상인십자가는당대의성십자가경배신심과풍습을반영한것으로당시건축되었던성당곳곳에그흔적이남아있다.특히성화상논쟁시기에는교회내부장식을위해양식화된덩굴문양등으로채워진바탕위에커다란십자가를그려넣는경우가많으며,고전적모티프인풍요의뿔,포도나무,석류,아칸서스,월계수,공작깃털을장식적으로변형한문양을즐겨사용했다.결국십자가의형상을빌려예수그리스도를나타낸것이다.당시에건축된성당들은모두작은규모이며내부는매우단순하고소박한그림으로만장식되어있어정치적혼란이몰고온경제난을그대로보여준다.
반면,‘마케도니아르네상스’로불리는9~10세기에카파도키아미술은전례없는발전을이루었는데,이때매우많은교회가건립되었고그내부도가장화려하게장식되었다.이시기는비잔티움문화예술의절정기로알려졌지만이를보여주는자료는매우빈약했다.그런데카파도키아에는이시기에제작된작품이풍부하게남아있어서,이러한자료의공백을메우는중요한역할을한다.이시기에그리스도의상징으로사용되던십자가도상은10세기이후점차감소했고,교회내부를십자가로장식하던비표상적문양은그리스도의생애와가르침을주제로한그림으로바뀌어수많은작품이새롭게제작되었다.특히마케도니아왕조의팽창주의적대외정책에힘입어제국의변경이었던카파도키아는종교적위상뿐아니라군사적·정치적중요성도높아지게되면서카파도키아미술은성경의다양한이야기와성인들은물론,당대의황제와군인의초상까지그리게되어,주제면에서매우풍요로워졌다.
카파도키아에서는11세기중반까지매우많은성당이세워졌는데,수도원성당이나개인용성당이주를이루었고,후원자는대부분비잔티움사회의다양한계층에속하는평신도들이었다.후원자의초상이카파도키아지역의성당곳곳에남아있는데,때로는그들의이름이나관직등부가사항도적혀있어당대카파도키아지역의생활상과그리스도교신심을알수있는중요한자료가된다.성당내부장식은후원자의경제적여건에따라달라지기도하는데,콘스탄티노폴리스의회화처럼정교한신학체계를반영하는도상체계를도입하기도하고,십자가나후원자의초상으로만족하는단순한도상체계를따르기도했다.
비잔티움제국의세력이약해진12세기에이슬람세력권으로편입된카파도키아에서는이슬람문화의영향으로전통적그리스도교도상이큰변화를겪었다.이슬람권정치체제로의편입이라는사회의전분야에걸친근본적인변모에따라이시기의예술은카파도키아지방전통,튀르크문화,비잔티움을계승한니케아제국의영향이복합된일종의문화접변현상을반영한다.이렇게하여새롭게탄생한카파도키아의미술은그리스도교세계의어느곳에서도찾아볼수없는독특한면모를지니게되었다.
셀주크튀르크에점령된12세기에는그리스도의도상을지우고비표상적문양으로대체한흔적도찾아볼수있고,비잔티움전사인성게오르기우스와성테오도루스의그림에서는갑옷위에걸쳐입은망토에술프린지장식이덧붙여져있고,말갖춤이아랍문자로꾸며져있어당시점증하던튀르크문화의영향이드러난다.또한이슬람세력권에편입된이후에는이슬람과의접촉이빈번해지는상황을반영하듯,이슬람문자를모방한장식적모티프가성당내부장식에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