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 없는 조사, 재판 없는 해산-'정교분리'가 교회를 겨누는 무기가 된 시대, 그 원리의 원래 주인을 찾는 책.
-1915년 포교규칙에서 오늘의 해산법까지―누가 방패를 족쇄로 바꿨는가, 100년의 계보를 추적한 책
-110만이 광화문에 모여도, 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가.
-1938년 9월 10일 오후 2시 30분, 단 3분. 한국 교회는 아직 그 3분 안에 살고 있다.
-정교분리는 교회를 지키는 방패였다. 누가 그것을 족쇄로 바꿨는가.
-침묵이 길어지면, 침묵은 공모가 된다.
-투표는 정치 행위이기 전에 신앙 고백이다.
지금, 왜 이 책인가-두 개의 논쟁, 하나의 답
영장 없는 조사, 재판 없는 해산, 보상 없는 재산 국고귀속. 국회에 계류 중인 민법 개정안, 이른바 '종교법인 해산법'의 골격이다. 해산 사유에는 '정교분리 원칙 위반'이 들어 있다. 국가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고 만든 원칙이, 국가가 교회를 해산하는 근거로 뒤집힌 것이다. 그 전도(顚倒)의 뿌리와 계보를, 이 책은 한 권으로 완성해 보여준다. 정교분리가 어디서 태어났고(로저 윌리엄스, 수정헌법 제1조), 우리 헌법에 어떻게 새겨졌으며(제헌헌법 제12조에서 현행 제20조로), 누가 그것을 교회의 입을 막는 도구로 뒤집었는지(1915년 일제 포교규칙에서 군사정권을 지나 오늘까지)―100년의 계보다.
“정교분리는 침묵의 핑계가 아니다. 자유의 보장이다.”
새문안의 종소리는 왜 멈추었는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새문안교회 종탑에서 종이 울렸다. 그 종소리는 예배의 신호가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알리는 신호였다. 당시 인구의 1.5%에 불과했던 기독교인이 민족대표 33인의 절반을 차지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열고, 성경을 번역해 한글을 백성의 문자로 만든 교회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로부터 19년 뒤인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단 3분 만에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표결은 '가(可)'만 물었고 '부(否)'는 묻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치던 교회가 우상 앞에 무릎을 꿇는 데 3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해방 후, 교회는 이 죄를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미회개가 한국 교회의 DNA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1960~80년대 독재 앞의 침묵, 성장주의와의 거래, 그리고 오늘 선거 부정 의혹 앞의 침묵까지―안전할 때만 용감하고 위험하면 입을 닫는 ‘선택적 용기’의 계보를, 이 책은 사료와 통계로 한 장면씩 복원한다.
저울, 증인, 봉인, 기록-성경은 절차의 책이다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인 지점은 선거를 신학의 언어로 읽어낸다는 데 있다. 공평한 저울(잠언), 두세 증인의 확정(신명기), 봉인과 인계의 연속성(사무엘상), 기록과 공개 보고(고린도후서), 성문 앞의 공개 재판(룻기). 저자는 이 오래된 원리들이 오늘의 교차 검증, 참관, 봉인 관리, 정보 공개와 정확히 겹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표를 세는 것도 저울질이다. 국민의 뜻을 재는 저울이 속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선동이 아니라 절차다. 전자개표기가 도입된 2000년대 초부터 20여 년, 매 선거마다 반복돼 온 논쟁 앞에서 이 책은 “부정선거다”라고 외치지 않고 “음모론이다”라고 덮지도 않는다. 볼리비아처럼 집계표를 공개하고, 케냐처럼 법원이 절차를 지키게 하고, 조지아처럼 다시 세면 된다. 정직하게 개표했다면 검증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언 28:1).
“대한민국 국회의 첫 공식 행위는 기도였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 임시의장 이승만은 첫 회의를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시작하자고 제안했고, 목사 출신 이윤영 의원의 기도로 대한민국 국회가 문을 열었다. 속기록에 남아 있는 장면이다.
이 책의 앞쪽 절반은 이렇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한국 현대사다. 인구의 1.5%가 민족대표 33인의 절반을 차지한 1919년, 문맹률 90%의 나라에서 한글을 백성의 글로 만든 29년의 성경 번역, 양반과 상놈을 가리지 않은 배재학당, 신분을 묻지 않고 치료한 제중원, 히틀러 앞에서 '로마서 13장'만 외운 독일 교회와 그 시대에 홀로 일어선 본회퍼, 그리고 새벽기도를 인도하다 총살당한 김익두와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까지―대한민국이 어떤 기도와 피 위에 세워졌는지를 복원한다.
교회 안의 독자에게 이 책은 회개와 각성의 책이고, 교회 밖의 독자에게는 대한민국 현대사와 선거 제도를 관통하는 한 편의 탐사 보고서다. 정파보다 말씀을, 구호보다 사실을, 소란보다 절차를 앞세우는 것―그것이 이 책이 제안하는, 교회가 다시 신뢰받는 길이다.
책 속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의 시간 속에서 말씀하신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기상은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6:3)고 물으셨다. 시대를 읽는 일은 신앙의 곁가지가 아니다. 예언자들의 말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그들은 개인의 잘잘못을 넘어, 사회 구조에 박힌 죄를 지적했다. 뇌물을 받는 재판, 기울어진 저울, 약자를 짓누르는 장사, 권력의 남용-이런 것들이 그들의 주제였다.
다윗 앞에 선 예언자 나단은 왕의 죄를 돌려 말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지적했다. 아합과 이세벨의 시대,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예언자들은 땅과 법을 비틀어 이익을 챙긴 부정을 폭로했다. 아모스는 성문 앞에서 굽은 판결을 꾸짖었다. 그 기준은 단순했다. 진실을 사실대로 말할 것, 약자를 보호할 것, 저울을 속이지 말 것, 재판을 굽게 하지 말 것.
-11p, 프롤로그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교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상대주의의 물결이 밀려왔다. 특히 21세기 들어 젠더 이데올로기, 동성애 합법화, 차별금지법 등 창조질서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교회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미온적이었다. ‘정치적’이라는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2020년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선거 의혹들 앞에서도 교회는 ‘정치 문제’라며 외면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잠언 11:1)-선거는 민주주의의 저울인데, 그 저울이 공정한지 묻는 것이 왜 정치적 편향인가?
-27p, 서문에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차이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도 변화의 속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뒤에는 더 깊은 철학적 차이가 있다. 진보주의의 뿌리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고 외쳤다.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미신과 무지에서 해방시키는 열쇠라고 봤다. 이런 이성 신뢰는 프랑스 혁명에서 극단화되었다. 혁명가들은 노트르담 대성당 제단에 ‘이성의 여신’을 앉히고 경배했다. 이성을 숭배하는 새로운 종교였다.
진보주의자들은 이성으로 완벽한 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 건축가가 설계도를 그리듯이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고 그대로 건설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플라톤의 『국가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회가 모두 이런 발상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은 과거를 경멸한다. 과거는 무지와 미신의 시대다. 조상들은 우리보다 덜 알았고, 덜 계몽되었고, 덜 도덕적이었다.
-66p, chapter 1 우리는 예수님파입니다?세계관과 정치 사상의 이해에서
답은 간단하지 않았다. 우파도 완벽하지 않다. 국가주의, 부자 편향, 힘의 숭배, 위선의 위험이 있다. 하지만 생명, 가족, 종교의 자유라는 핵심 이슈에서 우파가 좌파보다 성경적 가치에 더 가까운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이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우파를 선택한다. 차악(次惡)의 선택이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선택하느냐다.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우상화하지 말고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정치인을 메시아처럼 떠받들지 말고, 하나님이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불완전한 도구로 봐야 한다. 고레스처럼, 다윗처럼.
그리고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느 정당의 당원이기 전에 그리스도인이다. 어느 나라의 국민이기 전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 3:20).
-218p, chapter 1 우리는 예수님파입니다?세계관과 정치 사상의 이해에서
인본주의는 인간을 진화의 산물이자 이성적 존재로 본다. 신이 없거나 무관하므로 인간 스스로 진리와 도덕을 결정한다. 이런 관점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첫째, 생명의 가치가 상대화된다. 태아, 장애인, 노인의 생명을 효용과 편의로 평가한다. 둘째, 엘리트의 이성을 신뢰하여 권력 집중을 정당화한다. 계획경제, 중앙통제, 전문가 지배를 선호한다. 셋째, 전통적 가치와 제도를 해체한다. 가정, 교회, 지역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개인을 국가와 직접 연결한다. 넷째, 평등을 자유보다 우선시한다. 결과의 평등을 위해 강제 재분배를 정당화한다.
역사가 증명한다. 20세기 공산주의 국가들은 앞서 본 대로 1억 5천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소련의 굴라크, 중국의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모두 ‘인간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인본주의 유토피아의 결과였다. 반면 기독교 전통이 강한 국가들은 인권과 자유, 번영을 동시에 이루었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한국. 완벽하지는 않지만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제도를 발전시켰다.
-272p, chapter 2 성경이 놓은 공적 삶의 토대에서
전국에서 목사들이 순교했다. 수백 명의 목회자가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납북된 것으로 추산된다. 손양원 목사는 여수에서 순교했다. 그는 이미 1948년 여순사건 때 두 아들을 잃었다. 좌익에 의해 총살당한 것이다. 손양원은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원
수를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