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보듬고희망을길어올리는
공감·연민·회복의기억공간산책
2022년가을,젊은이150여명이불의의사고로유명을달리하는참사가발생했습니다.생때같은청년들을한꺼번에떠나보낸‘10·29참사’를겪으며,한국사회는또한번충격과실의에빠졌습니다.많은이가고통속에스러져간현장을목격한우리는제일인양아파하며희생자와유족을,그리고비통에빠진서로를위로했습니다.
사회적아픔을잊지않고기억하는일은결코쉽지않습니다.기억저편의고통을다시불러일으키는방아쇠를당기는데는많은용기가필요하기때문입니다.하지만그토록어렵게마음써야만가능한일을,우리는굳이하려듭니다.잊으려야잊을수없는기억일뿐더러,좀더나은시대를만들려면잊지않고되새겨야만하는일들이니까요.그래서우리는재난재해,사회적참사,역사적비극이지나간현장들을‘기억공간’으로조성합니다.
당시의상흔을보존하거나상징적조형으로기록하여그장소를기억공간으로만들면,사람들은종종그곳을찾아그때를되새기며새삼오늘을돌아보게됩니다.그럼으로써우리는한층더공감하고배려하며,서로의안위를살피며조심하는더욱끈끈한공동체로거듭납니다.그렇게사회는,시대는더나은곳으로한걸음나아갑니다.《공간,시대를기억하다》는이런기억공간들가운데,그가치를새로이톺아본사례들을엄선하여소개합니다.
기억공간,새시대를향한약속의기념비
‘다크투어리즘’의인문·사회적가치에일찍이눈떠,2017년《건축은어떻게아픔을기억하는가》를펴냈던건축가김명식.기억공간들을찾아다니며그곳의인문학과미학을발견해온그는,이번엔좀더일상가까이에서만날수있는공간들을,보다살갑고애정어린시선으로살핍니다.우선일제강점기와한국전쟁그리고현대에이르기까지,폭압적이고야만적인권력에의해무고한이들이희생된장소들을찾아가봅니다.제1장‘역사화된기억공간’에서가본이공간들은,근현대의비극적기억으로부터길어올린새시대에의염원을드러냅니다.
제주4·3평화공원에마련된추모조형물‘비설’.토벌대를피해달아나다눈밭에서죽어간모녀의모습을그대로담았습니다.총에맞아주저앉은젊은어머니는두살배기딸을품에안은채서서히얼어갔고,모녀의시신은눈더미속에서발견되었습니다.이들의비극을재현한‘비설’은제주식돌담에빙둘러싸여있습니다.돌담을따라띠처럼길게적힌제주전래자장가‘웡이자랑’의노랫말이이들모녀의영혼을조용히달랩니다.저자는‘비설’에표현된피에타의형상과의미가,바티칸성베드로대성당에있는미켈란젤로의‘피에타’나,독일작가케테콜비츠의피에타‘죽은아들을안은어머니’못지않은장엄함과성스러움을지닌다고강조합니다.
여러지역에속속들어선5·18추모기념물‘오월걸상’도인상적입니다.1980년이라는시간,광주라는지역의한계를뛰어넘어,언제어디서누구든걸터앉아‘1980년광주’의기억을되새길수있도록마련된걸상들입니다.형태도,거기담긴메시지와이미지도각양각색인걸상들은지금까지부산서면,목포역광장,서울명동성당앞,남양주모란공원,수원경기도청앞,서울기독교회관앞등지에세워졌습니다.도심한편에조용히들어선채오가는사람들을바라보는빈오월걸상.일상의빈틈에잠시나마거기앉아,우리민주화의잊힌의인(義人)들을기리는시간을가져보아도좋겠습니다.
이밖에도1장에서는,일제강점기여수주민이동원되어뚫은‘여수마래제2터널’과여순사건희생자봉분,한국전쟁당시무고하게학살된이들의비극이깃든‘노근리쌍굴다리’,무책임한정부에경종을울리고희생자를추념하는‘4·16생명안전공원’,영웅적분신(焚身)이후반세기넘도록빛이바래지않는전태일의행적을기록한‘전태일기념관’,전태일의후예노회찬을기리며살아있는것의존재이유를되새기는‘모란공원’등을답사합니다.비극적희생과상실의기억으로가득찬이공간들에서,더나은시대를염원하는메시지를읽어내봅니다.
일상곁기억공간에서,새로운공간경험의장소까지
제2장‘일상의기억공간’에서는우리곁에서쉽게마주할수있는도심속추모와기억의공간들을살펴봅니다.아울러,추모의공간은아니지만우리의원형적기억을떠올리게하는공간들에도찾아갑니다.너무가까워오히려지나치고마는일상다반사의기억공간들,그리고새로운감각으로재탄생한원형성의공간들을마주하며,나날의삶속에서우리의기억과공간경험은어떤모습이면좋을지새삼생각해보게해줍니다.
과거‘양재시민의숲’으로불리던서울양재동‘매헌시민의숲’.그곳엔유격백마부대충혼탑,대한항공858기희생자위령탑,삼풍백화점참사희생자위령탑등여러추모조형물이들어서있습니다.그가운데최근들어선‘일상의추념’은,2011년우면산일대에서발생한산사태로비명에숨져간이들의넋을달래는‘21세기형’기념비입니다.윗면을경사지고거칠게마감한열다섯개의대리석기둥은,많은희생을불러온산사태를형상화했습니다.베를린유대인박물관의‘추방의정원’과비교해볼만한이추모조형물은,21세기에도여전히미비한재해재난대응에경각을주는동시에,숙연한공간감을자아냅니다.
서울역서측,만리동들머리에조성된공공미술프로젝트‘윤슬’은서울도심의시공간을새로이체험하게해주는인상적인조형물입니다.도심한복판의그늘과도같던이곳에들어선‘윤슬’은우리의원형적기억을불러일으키는도시속우물과도같습니다.2800개의내림층계가만들어낸넓고둥근공간위를스테인리스스틸루버들이가로지릅니다.밤의윤슬위아래로산란하는조명의빛은,과거이곳가까이흐르던덩굴내(만초천)와그수면위어른거리던교교한달빛을오늘의시공간속에다시불러냅니다.길을걷다이광경을마주한보행자는도시경험의지평을한껏넓히게됩니다.
이외에도개발시대상징인고가도로였다가도시의공중정원으로다시태어난‘서울로7017’,조선시대사형장에서오늘날공원겸박물관으로거듭난‘서소문역사공원’과‘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독립운동테마역으로변모하여언제나3·1절을기억하게해주는‘안국역’,신라탑의형상을투각으로표현해우리의공간인식을재고하게만든‘경주타워’,태곳적공간에대한상상과숭고한건축의예술적감상을환기하는영월의‘젊은달와이파크’등을찬찬히돌아봅니다.
‘엄숙함’벗고‘친숙함’입은우리시대기억공간들
마지막,제3장에서는눈여겨보아야할해외의기억공간들을소개합니다.많은이의목숨을앗아간불의의사고,한시대를암흑으로몰아넣은광포한힘의흔적을표현해낸추모와기억의공간들입니다.단순한정보전달의형태에서부터어떤의미를내포한상징적인형태까지,다양한모습으로비극의역사를기록한이공간들은우리에게추모의또다른조형성을제시합니다.
먼저,사하라사막의광막한모래밭에들어선‘UTA항공772편추모비’.항공기테러로희생된이들의부재를안타까워하는표식이자,그들을영원히기억하겠다는다짐의이정표입니다.한편독일베를린에는우리에게잘알려지지않은반성과추념의공간이여럿있습니다.나치에핍박받고학살된동성애자를기리는‘박해받은동성애자추모비’,유대인과좌파인사의저서를불태웠던사건을잊지않기위해만든‘분서기념도서관’,케테콜비츠의비통한피에타조각상을전시해2차대전희생자를추모하는‘신위병소’,유대인들이짐짝처럼몸을싣고죽음을향해출발했던플랫폼‘그루네발트역17번선로’등입니다.
저자는말합니다.“삶과죽음은건축을통해공간으로투영되니,공간은일상의배경과무대가되기도하지만고귀하고거룩한성소가되기도합니다.”기억공간답사를시작한이래역사속어두운페이지들의흔적,비통하고공포스러웠던사건들의흔적을찾던저자의발걸음은,점차일상속에서쉽게발닿는추념의공간으로,더나아가미적상상을자아내는공간들로옮아갔습니다.처음에는‘다크투어리즘’이었던걸음이나중에는‘산책’으로바뀌었다고합니다.
기억공간답사는엄숙해야만하는게아님을,이책은자연스레이해하게해줍니다.기억하고추모해야하는일과사람을기록한공간들은,이제우리에게좀더가깝고살갑게느껴져야할것입니다.기억공간이일상의궤적에들어와친숙한곳이된다면,우리는그곳을더자주찾고더오래기억할것입니다.우리곁기억공간들이사건사고의흔적을담은타임캡슐의기능을넘어,더나은시대를위한다짐의기념비로자리잡기를바라는마음.《공간,시대를기억하다》는바로그희망을전하고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