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안진경연보 한국어판 서문
연보 제작은 처음 당ㆍ송나라에서 창조하여 명ㆍ청나라에서 성행하였고, 인물을 평가하면서 세상사의 득실을 논하는 학자의 사랑을 받으며, 전기(傳記)의 변체(變體)로 보기 시작하였다.
본 연보는 남송의 유원강(留元剛, 생몰 미상)과 청나라 말기 황본기(黃本驥, 1781~1856) 의 두 종류 「안노공연보(顔魯公年譜)」를 다시 편집하였다. 이전 사람은 아직 꼼꼼하지 못하여 후인이 다듬어 마무리하였다. 여기에서는 정사(正史)의 본전을 의지하고 은량(殷亮, 735-792, 안진경 처남 殷寅의 장자)의 「안노공행장(顔魯公行狀)」을 더하여 기본 줄기로 삼았다. 대체로 사승전장(史乘典章)ㆍ시부문장(詩賦文章)ㆍ금석저록(金石著錄)에서 연보의 주인과 관계가 있는 것은 광범위하게 채용하고, 앞뒤로 다섯 가지를 고찰하였다. 즉 가세(家世, 母族과 妻族 포괄)ㆍ사리(仕履, 벼슬 경력)ㆍ행적(行蹟, 湖州刺史를 大宗으로 삼음)ㆍ교유(交遊, 釋道ㆍ翰墨 삼백여 명 포괄)ㆍ서적(書迹, 〈顔塔題名〉에서 〈三表〉에 이르는 148점) 등이다. 작은 것을 찾아 결정하고 그릇됨을 살피며, 이지러진 것을 보충하고 이전 사람이 아직 펴내지 않은 것을 펴내며, 더욱 완전하게 하여 서학자에게 거울로 삼게 하려고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곽노봉 선생은 한국의 저명한 학자로 중국 고대 서론을 많이 번역하고 출판하여 영향력이 크다. 1996년 중국으로 유학을 하여 중국미술학원에서 저명한 국학가(國學家) 장조안(章祖安) 선생을 지도교수로 모셨다. 나와는 동문의 반열로 교분이 많고 박학다재한 동학으로 서로 존중하였다. 그는 서예이론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마침내 한국과 중국 두 곳에서 쌍 박사가 되었다. 그는 귀국한 이후 광대함을 선양하면서 한ㆍ중문화 특히 서예학술 교류에 특수한 공헌을 하였다.
이 연보는 곽노봉 학형이 높이 받들어 존중하고 심혈을 기울여 번역해 출판한 것이어서 이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 서문을 대신한다.
임인년 원소절 朱關田이 西子湖에서 쓰다.
연보 제작은 처음 당ㆍ송나라에서 창조하여 명ㆍ청나라에서 성행하였고, 인물을 평가하면서 세상사의 득실을 논하는 학자의 사랑을 받으며, 전기(傳記)의 변체(變體)로 보기 시작하였다.
본 연보는 남송의 유원강(留元剛, 생몰 미상)과 청나라 말기 황본기(黃本驥, 1781~1856) 의 두 종류 「안노공연보(顔魯公年譜)」를 다시 편집하였다. 이전 사람은 아직 꼼꼼하지 못하여 후인이 다듬어 마무리하였다. 여기에서는 정사(正史)의 본전을 의지하고 은량(殷亮, 735-792, 안진경 처남 殷寅의 장자)의 「안노공행장(顔魯公行狀)」을 더하여 기본 줄기로 삼았다. 대체로 사승전장(史乘典章)ㆍ시부문장(詩賦文章)ㆍ금석저록(金石著錄)에서 연보의 주인과 관계가 있는 것은 광범위하게 채용하고, 앞뒤로 다섯 가지를 고찰하였다. 즉 가세(家世, 母族과 妻族 포괄)ㆍ사리(仕履, 벼슬 경력)ㆍ행적(行蹟, 湖州刺史를 大宗으로 삼음)ㆍ교유(交遊, 釋道ㆍ翰墨 삼백여 명 포괄)ㆍ서적(書迹, 〈顔塔題名〉에서 〈三表〉에 이르는 148점) 등이다. 작은 것을 찾아 결정하고 그릇됨을 살피며, 이지러진 것을 보충하고 이전 사람이 아직 펴내지 않은 것을 펴내며, 더욱 완전하게 하여 서학자에게 거울로 삼게 하려고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곽노봉 선생은 한국의 저명한 학자로 중국 고대 서론을 많이 번역하고 출판하여 영향력이 크다. 1996년 중국으로 유학을 하여 중국미술학원에서 저명한 국학가(國學家) 장조안(章祖安) 선생을 지도교수로 모셨다. 나와는 동문의 반열로 교분이 많고 박학다재한 동학으로 서로 존중하였다. 그는 서예이론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마침내 한국과 중국 두 곳에서 쌍 박사가 되었다. 그는 귀국한 이후 광대함을 선양하면서 한ㆍ중문화 특히 서예학술 교류에 특수한 공헌을 하였다.
이 연보는 곽노봉 학형이 높이 받들어 존중하고 심혈을 기울여 번역해 출판한 것이어서 이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 서문을 대신한다.
임인년 원소절 朱關田이 西子湖에서 쓰다.
안진경연보
$6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