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여름 (이정연 소설)

여름의 여름 (이정연 소설)

$14.00
저자

이정연

저자:이정연소설가

2018년한라일보신춘문예단편소설부문<사십사계단>당선

2022년2월소설집<신의뜨락에그녀들의자리는없다>출간,

2022년아르코문학나눔선정

2024년2월소설집<여름의여름>출간

yein-free@hanmail.net

목차

여름의여름9
루르마랭워크숍31
자술59
바다의목소리81
미궁105
거위요리를아시나요?125
운조의숲145
이스크라167
리뷰205
작가의말216

출판사 서평

창문에비치는까만밤위에별이총총박혀수런거렸다.
“별님도외로울텐데같이나가세.”
별님을혼자둘수없다는자술의아름다운대사에취해집밖으로나왔다.캄캄한원시의숲속을바람이간질이는손길에물소리가히득거리며원을그렸다.하늘엔별들의수다가,땅엔자술의수다가밤빛을마르게하고있었다.
“노래한판할게.자네도하난해야해.”
얼큰한술기운에고개를끄덕였다.봄밤의유희는얼마만인가.내몸에기쁨의에너지를모두불러모았다.
자술은<봄날은가고>를불렀고나는<맨발의청춘>을불렀다.선홍빛의봄날은가고있었고맨발의청춘은헤매고있었다.
“이제우리친구지.”
자술이내등에호미와노동으로생을견뎌온여든살의다정하고당당한손을얹었다.나는손을내밀어자술의손을잡았다.그위로별빛한점이떨어졌고벚꽃한잎이내려와앉았다.고라니울음도다정하게들리는봄밤이었다.<자술>에서

‘글쓰기는나를없애고불멸의길로들어서는것’이라던여름의말처럼현실에서허락되지않았던자기애적대상의품을좇지않고,누더기같은그곳으로부터걸어나와모두와호흡하는이야기의바다에서이정연작가의이야기가불멸하기를소망한다.범박한이글을마치며이어질듯말듯,그러나잊은적없었던우리의삼십년가까운우정이다른차원으로진입하고있음을기억해두고싶다.모두그의소설덕분이다.
이정숙(게슈탈트심리치료자,가톨릭관동대학교사범대학교수)

책속에서

일요일이었다.앞마당으로나오니고요했다.들일을나가는시간이다.부엌문을밀치고들어갔다.부뚜막위에밥과국이덮여있다.밥한그릇을국에말아후딱해치웠다.구수한된장맛이속을따뜻하게어루만졌다.할머니가내밥을남겨두었다.

이집에서내가가장아끼는토끼들이있는곳으로갔다.나는토끼들을아름다운이름으로불렀다.영원과하루.담임인털보선생님이준코피묻은책갈피속에는이렇게쓰여있었다.
<하루의열정이영원으로가는돌을놓는다.>
털보선생님은혼자돈을벌며공부했다.그러다가사는것이힘들어죽기로결심했다고한다.그런데코피를쏟은책위에엎드려새벽빛을보는순간살아야겠다고생각했단다.선생님은지금은내상황이힘들지만극복하기위해열심히노력해야한다고말씀하셨다.나는그순간,삶의극복보다는코피묻은책갈피위에엎드려있는청년과그위에쏟아지는햇빛의이미지에황홀함을느꼈다.
영원과하루가입을오물거리며입질을했다.어제뜯어놓은민들레,쑥,질경이,명아주,냉이,쇠비름을섞어서토끼장에넣어주었다.미나리아제비,애기똥풀,족두리풀,쥐손이풀은토끼가먹으면위험해조심해서뜯어야했다.도시에서살다온나는이런일이서툴렀으나사랑하는토끼를위해열심히관찰하고주의해서토끼풀을뜯었다.하루와영원이가입을오물거리며그물망사이로내미는풀을받아먹었다.영원이는입에내손이닿으면몸이라도다핥아주겠다는듯이손가락을간지럽혔다.영원이도내가좋은가보다.
곧헛간옆에서토끼풀을뜯어야겠다.개울이흐르는헛간옆에서,아이들은소에게풀을먹이려고끌고와묶어놓고는서로몸을밀치기도하고장난질을하며,토끼풀을뜯었다.
나는사실이런영혼없는놀이에는관심이없다.도서관도영화관도없는이곳아이들이할수있는놀이는산이나들을뛰어다니는지루한것들뿐이다.물론자연에도영혼은흐르지만나는아직책속에서만나는사람들의영혼을더사랑한다.

영원이와하루를들여다보다어제오주와한약속이생각나속옷과양말을담아개울가로내려왔다.내려오면서건너편언덕위를쳐다보니멀리버스가지나가며먼지를날렸다.찔레넝쿨이함부로자라발이걸렸다.찔레꽃을따서입에넣었다.하얗고싱그러운꽃맛이입안가득퍼졌다.
노래를부르고있는오주는내가걸어오는소리를듣지못했다.나는신발을벗었다.자갈돌이햇빛을머금고있어발바닥이따갑다.나는스타카토로발바닥을들어올리며물었다.
“언제왔어?”
“빨리와,기다렸잖아.”
“오,해피데이,오,해피데이”
오주가바위위에서서궁둥이를씰룩거리며손가락으로번갈아하늘을찔러댔다.

널찍한돌위에빨래를담은세숫대야를놓고앉으니도로를달리는버스가보였다.1년전,사흘후에오겠다던엄마의약속을믿고도로가보이는언덕에올라매일도시쪽에서들어오는버스를기다렸다.버스가설때마다벌떡일어나내리는사람들을유심히바라보았고그때마다내심장은터질것같았다.1년이지나도록엄마는나타나지않았고아직도버스가보이면나는목을길게빼고도로를내다보고는한다.
그러는동안,내몸속에들어앉았던그리움이란감정이슬슬궁둥이를뒤로빼면서다르게변해가는것을느꼈다.엄마를생각하며들숨을쉴때마다감정은이상하게변해간다.나는이감정변화에이름을붙였다.
‘분노의풍선불기.’
분노가풍선처럼커지면서피를타고돌기시작하면누군가를죽여버리고싶은증오가분수처럼솟아올랐다.사람들은그러면착한아이가될수없다고말하겠지만나는착한아이보다는살아남는아이가되고싶다.
-<여름의여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