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인문적 건축가 서현의 매콤한 도시 읽기!
대한민국 일상에 새겨진
불신·불평등·불합리를 해부하여
그 사회를 읽다
대한민국 일상에 새겨진
불신·불평등·불합리를 해부하여
그 사회를 읽다
‘도시와 건축으로 목격한 사회’라는 부제하에 출간됐던 『빨간 도시』. 그 10년 후 대한민국 도시와 사회는 많이도 변했다. 외양상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인정도 받고 있다. 그러나 『빨간 도시』 출간 이후 도시에서 펼쳐지는 여러 현상을 흐름이나 맥락에서 보면 여전히 의문점은 가득하다. 건축과 도시에 연관된 것들로 한정될 때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언제나 구태의연했고, 결론은 쳇바퀴만 돌았다.
『도시논객』은 저자의 전작과는 달리 구체적이고 치밀한 접근을 통해 최초를 빚어낸 동인을 찾아 나선다. 우선 저자는 빗살무늬토기로부터 집과 도시의 기원을 유추하고 있다. 조목조목 그 탄생 원리를 찾아 추론하기에 이른다. 나름 빗살무늬토기도 주어진 조건에 최적화된 형태라고, 그 뿌리를 짚어낸다. 요즘 관점으로 비유하면 전력이 없던 시대의 횟집 수족관이라고 한다. 잉여를 담기 위해 태어난 토기도 건축으로 번역하면 창고이며, 나아가 창고의 잉여는 교환의 장에 놓이고, 결국 인간이 살아야 하는 곳이 ‘서식지’에서 도시로 발전했다고 본다.
구둣방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찍새’와 ‘닦새’. 번득이면서도 흥미진진한 단어 선택이 지니는 상징성이 돋보인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유통업이야말로 ‘찍새’의 극적인 분화라고 본다. 결국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흐름을 이 두 단어로 설명했다. 문장이 치밀하고 논리적이니 간혹 난해한 주제에 빠져들더라도 위트와 해학이 곳곳에 어우러져 유쾌하게 넘어간다.
‘도시의 정치화’를 다루는 꼭지에선 냉철한 시각을 넘어 신랄한 비평으로 이어진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호한 정책들이 대안없이 질러졌다. 새만금의 신기루들이 오방색 현수막에 실려 5년마다 나부꼈다. 책임 소재는 그때마다 사라졌고 새만금의 꿈은 부평초처럼 떠다녔다. 이때 물 좋고 그림 좋은, 논란을 한 방에 잠재울 수 있는 이벤트가 등장했으니 바로 잼버리대회다. 정치가 한 번 내건 공약은 결코 접지 않는 관성을 지녔으니 무책임은 다음 세대로 거리낌 없이 넘어갔다.
‘역사로 읽는 도시’ 장에선 저자의 생각은 더 깊어지고 건축철학은 보다 구체적으로 된다. 세종로 한편의 의정부 복원 과정은 희극을 보는 듯하다고 한다. 철거 후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시대가 중첩된 기초군’을 보호 지붕으로 덮기로 했는데 여기서 ’관의 논리‘가 느닷없이 등장한다. 건물을 복원해야 한다고. 흐릿한 흑백 사진 몇 장과 대충 그려진 배치도를 근거로 왕조의 자부심을 복원해야겠다고 한다. 저자는 왕조의 흔적을 모조품이라도 도시에 늘어놓겠다면 우선 역사관에 대한 치열한 질문부터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건축가답게 바람직한 건축관도 명쾌하게 제시한다. 세계에는 민주국가라고 표방해도 작동 방식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 대한민국도 그런 면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 용산의 대통령 청사를 예로 든다. 대통령의 집무실이라면 그 외양만이라도 대한민국의 꿈과 야심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그것은 건축으로 표현된 민주주의 작동 원리인데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국방부 청사로 쓰였던 그 건물은 무심한 콘크리트 덩어리라고 규정했다. 국방부가 지닌 정체성에 걸맞게 위계와 상명하복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 확연한 건물이기에 하는 말이다. 저자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충실한 소비에트 블록 관청사라고 칭하면 딱 들어맞는 모습이라고 본다.
『도시논객』은 우리 일상에서, 거리를 거닐면서 맞닥뜨리는 풍경을 다소 미시적이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그 부조리와 불협화음에 가차 없이 메스를 댄다. 그러나 그 제안의 실천은 결코 멀지도 불가능하지도 않고 우리 삶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비평만을 위한 크리틱이 아닌 ‘우리 사회를 읽는 건강한 건축가의 시선’으로 당당히 자리 잡을 것이다.
『도시논객』은 저자의 전작과는 달리 구체적이고 치밀한 접근을 통해 최초를 빚어낸 동인을 찾아 나선다. 우선 저자는 빗살무늬토기로부터 집과 도시의 기원을 유추하고 있다. 조목조목 그 탄생 원리를 찾아 추론하기에 이른다. 나름 빗살무늬토기도 주어진 조건에 최적화된 형태라고, 그 뿌리를 짚어낸다. 요즘 관점으로 비유하면 전력이 없던 시대의 횟집 수족관이라고 한다. 잉여를 담기 위해 태어난 토기도 건축으로 번역하면 창고이며, 나아가 창고의 잉여는 교환의 장에 놓이고, 결국 인간이 살아야 하는 곳이 ‘서식지’에서 도시로 발전했다고 본다.
구둣방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찍새’와 ‘닦새’. 번득이면서도 흥미진진한 단어 선택이 지니는 상징성이 돋보인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유통업이야말로 ‘찍새’의 극적인 분화라고 본다. 결국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흐름을 이 두 단어로 설명했다. 문장이 치밀하고 논리적이니 간혹 난해한 주제에 빠져들더라도 위트와 해학이 곳곳에 어우러져 유쾌하게 넘어간다.
‘도시의 정치화’를 다루는 꼭지에선 냉철한 시각을 넘어 신랄한 비평으로 이어진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호한 정책들이 대안없이 질러졌다. 새만금의 신기루들이 오방색 현수막에 실려 5년마다 나부꼈다. 책임 소재는 그때마다 사라졌고 새만금의 꿈은 부평초처럼 떠다녔다. 이때 물 좋고 그림 좋은, 논란을 한 방에 잠재울 수 있는 이벤트가 등장했으니 바로 잼버리대회다. 정치가 한 번 내건 공약은 결코 접지 않는 관성을 지녔으니 무책임은 다음 세대로 거리낌 없이 넘어갔다.
‘역사로 읽는 도시’ 장에선 저자의 생각은 더 깊어지고 건축철학은 보다 구체적으로 된다. 세종로 한편의 의정부 복원 과정은 희극을 보는 듯하다고 한다. 철거 후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시대가 중첩된 기초군’을 보호 지붕으로 덮기로 했는데 여기서 ’관의 논리‘가 느닷없이 등장한다. 건물을 복원해야 한다고. 흐릿한 흑백 사진 몇 장과 대충 그려진 배치도를 근거로 왕조의 자부심을 복원해야겠다고 한다. 저자는 왕조의 흔적을 모조품이라도 도시에 늘어놓겠다면 우선 역사관에 대한 치열한 질문부터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건축가답게 바람직한 건축관도 명쾌하게 제시한다. 세계에는 민주국가라고 표방해도 작동 방식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 대한민국도 그런 면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 용산의 대통령 청사를 예로 든다. 대통령의 집무실이라면 그 외양만이라도 대한민국의 꿈과 야심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그것은 건축으로 표현된 민주주의 작동 원리인데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국방부 청사로 쓰였던 그 건물은 무심한 콘크리트 덩어리라고 규정했다. 국방부가 지닌 정체성에 걸맞게 위계와 상명하복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 확연한 건물이기에 하는 말이다. 저자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충실한 소비에트 블록 관청사라고 칭하면 딱 들어맞는 모습이라고 본다.
『도시논객』은 우리 일상에서, 거리를 거닐면서 맞닥뜨리는 풍경을 다소 미시적이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그 부조리와 불협화음에 가차 없이 메스를 댄다. 그러나 그 제안의 실천은 결코 멀지도 불가능하지도 않고 우리 삶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비평만을 위한 크리틱이 아닌 ‘우리 사회를 읽는 건강한 건축가의 시선’으로 당당히 자리 잡을 것이다.
도시논객 : 우리 사회를 읽는 건축가의 시선
$22.00